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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킹오황 Oct 26. 2022

돼지고기와 국장님

몇 년 전, 비가 많이 오던 여름이었습니다. 어느 날 갑자기 눈이 간질거리고 콧물이 줄줄 흐르기 시작했습니다. 소위 비염이었죠. 시간이 지나면 괜찮아질 줄 알았는데 웬걸, 증세는 점점 심해졌습니다. 높은 습도 때문인가 싶어 하루 종일 건조기도 틀어보고, 업무 스트레스인가 해서 연가를 쓰며 쉬어보기도 했지만, 증세는 호전되지 않았습니다. 결국 알레르기 검사를 받기로 결심했습니다.


병원에서 피를 뽑고, MAST라는 검사를 받았습니다. 혈액을 통해 수십 가지 이상 되는 알레르기 항원을 조사해서 알려주는 검사였습니다. 제가 아는 알레르기라고는 고양이 털 밖에 없었지만, 이번 검사를 통해 제 자신에 대해 좀 더 알 수 있을 것 같아 기대가 컸습니다. 거기다 제 비염의 원인을 알아낼 수 있을 것 같아 결과가 너무 기다려졌습니다. 저는 집먼지나 진드기를 유력한 후보로 생각했죠.


일주일 후 받아본 결과는 충격적이었습니다. 저에게 가장 심각한 알레르기는 집먼지나 진드기가 아니라 바로 돼지고기 알레르기였습니다. 아니, 제가 제일 좋아하는 요리가 삼겹살, 탕수육 이런 것들인데 돼지고기 알레르기라니요. 아니, 제가 평생 먹은 돼지만 해도 수십수백 마리는 넘을 텐데 그것들은 돼지고기가 아니란 말인가요. 40년 만에 처음 안 사실이었죠. 당시 병원 간호사분들은 저의 검사 결과를 보고 절 엄청 불쌍하게 여겼다더군요. 평생 돼지고기도 못 먹고 어떻게 살았을까 하면서요.


그런데 웃기게도 저는 돼지고기를 먹어도 아무런 증상이 없었습니다. 정확히는 아무 증상을 못 느꼈습니다. 그래서 저의 검사 결과가 맞나 싶을 정도였죠. 의사 선생님은 당장 느끼는 증상이 없을지라도 결과를 보니 돼지고기가 좋을 것 같진 않다며, 돼지고기는 최대한 자제하라는 말씀을 하셨습니다. 의사 선생님의 말씀을 지키려고 노력했는데, 그 결과 저는 직장에서 이상한 사람이 되어버렸습니다.



#1

모 국장님은 점심마다 새로 생긴 영하고 팬시(young and fancy)한 음식점에 가서 직원들을 대접하는 걸 즐기셨습니다. 그런데 국장님과 관련해서 소문이 하나 있었습니다. 국장님께서는 직원들과의 점심이 재미있었으면 그때 멤버를 계속해서 부르고, 그렇지 않았다면 다시 부르지 않는다는 거였습니다. 저는 그 소문이 사실인진 모르겠지만, 언젠가 국장님이 저를 부르시는 일이 생긴다면 그 자리가 재미있도록 노력해야겠다며 마음의 준비를 하고 있었습니다.


그날이 왔습니다. 국장님께서 저보고 점심을 같이 먹자고 처음으로 제안하셨습니다. 최근에 생긴 돈가스 가게로 가자며, 국장님께서 마음에 드셨는지 요즘 자주 간다고 하셨습니다. 저는 차마 돼지고기 알레르기가 있단 말씀은 못 드리고 억지로 미소를 지으며 돈가스 좋아한다고 했죠. (실제로 좋아합니다) 그런데 막상 가게 가니깐 도저히 돈가스를 못 시키겠더라고요. 그래서 한우 떡갈비를 시켰습니다. 같이 간 사람들은 다 안심 카츠나 치즈 카츠 같은 인기 메뉴를 골랐었음에도 불구하고요. 국장님께서는 여긴 돈가스 맛집인데 뭐 그런 걸 먹냐는 따가운 눈빛을 보내셨고, 국장님과의 점심은 그때가 처음이자 마지막이 되었습니다.


#2

새로운 국에 막 발령받았을 때 일입니다. 그때 국장님은 시원시원한 성격으로 직원들과 저녁을 함께 먹는 걸 즐기셨죠. 저를 처음 보고는 술은 잘 마시냐, 좋아하는 음식은 뭐냐 물으셨습니다. 저는 국장님께서 평소 농담도 많이 하시고 친근감 있게 대하시길래 반 농담 삼아 말씀드렸습니다. 제가 술은 좀 마시지만 돼지고기 알레르기가 있어서 돼지고기 빼곤 다 잘 먹습니다라고요. 국장님은 잠깐 어두운 표정을 짓더니 말씀하셨습니다.


"야, 이 사무관. 저녁 술자리에 돼지고기를 못 먹는다면 소고기 아니면 회를 사달라는 거 아니야. 내가 이 사무관 그렇게 안 봤는데 입이 참 고급이구만."


그 후로 국장님이 저를 저녁에 부르실 때는 횟집만 갔습니다. 국장님은 저에게 회나 소고기는 단가가 비싸니깐 자주 못 사준다고, 이해해달라고 하셨죠. 솔직히 말하자면, 그때 돼지고기를 먹고 있었습니다. 돼지고기 알레르기 검사 당시에만 잠깐 몇 달 참았지 다시 돼지고기를 먹기 시작했었거든요. 괜히 국장님께 돼지고기 이야기를 했나 싶었지만 이미 알레르기가 있다고 했는데 다시 말 바꾸기도 그래서 그냥 회만 쭉 얻어먹었습니다. 국장님께서 정년퇴직하실 때까지 돼지고기 안 먹는 척했는데, 악의는 아니었습니다. 죄송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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