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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킹오황 Oct 25. 2022

공무원의 부처 고르기

내가 대학에 들어갈 땐 학과가 없었다. 1학년생은 무학과라 불렸다. 대신 2학년  가고 싶은 과를 선택할  있었다. 인원 제한도 없었고, 성적 커트라인도 없었다. 그냥 과를 선택하기만 하면 됐다. 한 학년이 700명이 안 됐는데, 15개의 학과 중에 인기가 많은 과는 200명이 넘게 몰렸고, 인기가 없는 과는 10명도 없었다.


2학년이 되면서 중요한 선택의 순간을 맞이하게 되었다. 지금 선택이 평생을 좌우하게  것이니깐 말이다. 솔직히 말하면 그때 나는  생각이 없었다. 친한 선배에게 어떻게 하면 좋겠냐고 물어보았고, 그는 소거법을 추천해주었다. 고르지 않을 것을 소거하라는 것이었다. 선택할  있는 과를 나열해 놓고, 영어가 싫으면 생물학과를 빼고, 물리가 싫으면 기계공학과와 물리학과를 빼라는 것이었다. 그렇게 여러 가지 이유를 대면서 과들을 빼고 나니  하나가 남았다. 산업공학과. 인생에서 중요한 선택을 그렇게 쉽게 했었다.




행정고시 합격 후 부처를 선택할 때도 마찬가지였다. 고시를 준비하는 동안에는 가고 싶은 부처가 공정위였다. 자기 일만 잘하면 워라밸도 지킬 수 있으면서 업무도 꽤 보람 있다며 연수원에서도 인기가 꽤 많았다. 2차 성적을 깠을 때 공정위에 갈 성적이 안 되는 걸 보고 많이 아쉬워했었다. 연수원을 마치고 부처 선택의 시간이 왔을 땐 다시 소거법을 소환했다. 어차피 공정위 갈 성적은 안됐고, 그 외에는 정말 가고 싶은 부처가 없었기 때문에 가기 싫은 부처부터 골라내기로 했던 것이었다.


가장 먼저 제외된  재경직으로서 지원할  없는 부처였다. 법제처나 문체부는 재경직만 아니었음 도전해보고 싶었던 부처였다. 그다음엔 부처 소재지가 중요했다.  세종에서 살고 싶었기 때문에 서울이나 과천, 대전에 있는 부처들을 제외했다. (당시 기준으로) 과기부, 국방부, 행안부, 감사원, 금융위, 통계청 등이 있었다. 남는 것 중에 가고 싶어도 성적이 안되어서  가는 공정위나 국세청 같은 곳도 제외했고, 내가 나이가 은 편이기 때문에 승진이 느린 부처도 제외했다. 기재부나 국조실이 그러했다. 그리고 부처 선택 전에 우리끼리  번의 자체 시뮬레이션을 치면서 경쟁자를 이기기 어려운 부처들도 제외했다. 대표적인 곳으로 복지부가 있었다.


그렇게 남은 부처들 중에 가면 친구들도 많고 재미있을  같은 부처를 3 뽑아 1, 2, 3순위를 정했다.  부처의 면접을 거쳐 결과적으로 1순위 지원했던 부처에 가게 되었고,  부처는 여러 면에서 밸런스가 잡혀 있어 괜찮은 부처라 생각한다. 승진도 빠르고 유학이나 해외 파견 기회도 많다. 업무 강도도 다른 부처에 비해 매우 높은 것도 아니었다. 다만, 보고서 작성이나 사업을 집행하는 일 외에도 국회나 언론을 상대하는 정무적 감각을 많이 요구하는 곳이다 보니 나랑  맞지 않았고, 결국  다른 부처로 옮기게 되었다.




지금 내가 일하는 부처는 인기가 많은 부처'였다'. 공무원을 상대하는 곳이라 외부(국회, 언론, 민원)의 스트레스가 적은 편이고, 업무가 깔끔해서 자기 일만 잘 끝내면 정시에 퇴근해도 아무도 뭐라 하지 않는 문화라 젊은 사무관들에게 인기가 많았다. 다만, 외국에 나갈 기회가 거의 없고, 최근에 사무관 전입을 많이 받아 승진이 엄청나게 밀리는 바람에 점점 인기가 떨어지고 있다는 이야기가 들린다. 그래도 나는 꽤 만족하는 편이다. 공부하고 연구하는 걸 좋아하는 나 같은 스타일이 조직에서 선호되기 때문이다. 반면에 전국적으로 이슈가 되는 굵직굵직한 일을 해보고 싶은 사람들에겐 잘 맞지 않는 부처이다 보니 전출 나간 사람도 여럿 된다.


마지막으로 하고 싶은 말은 이거다. 내 입장에선 고시 공부할 때 가고 싶었던 부처와 연수원에서 어느 정도 정보를 얻고 난 후 가고 싶었던 부처가 완전히 달랐다. 거기다 실제 업무를 하다 보니 가고 싶은 부처가 달라졌다. 결론은 제한된 정보 하에선 최선의 선택을 하기 어렵단 것이다. 처음부터 부처를 만족해하는 사람을 보기 어렵고, 부처를 옮기는 경우도 많이 보게 된다. 그래서 공직 사회에서도 한 번 정도 부처를 이동하는 건 크게 흠으로 보지 않는다. (두 번은 조직 부적응자로 볼 여지가 있다) 나중에 한 번은 부처를 옮길 수도 있단 생각을 하면서 지금 갈 부처를 선택하더라도 괜찮다는 뜻이다.


참고로 몰랐던 사실인데 정말 가고 싶은 부처가 는데 높은 성적을 받을 자신이 없다면, 지방직으로 시험 보는 것도 방법이다.  때는 재경직이나 일행직 최상위권 성적이어야 겨우   있었던 공정위나 문체부였는데, 지방직 사무관은 너무나 쉽게 전입해서 그리로 가는 것을 봤다. 중앙부처에서도 지방직의 젊은 사무관이 트레이드로 오는 것은 언제든 환영이다 보니 지방직 공무원이 재경이나 일행직 공무원보다 부처 선택권 자체는  넓은 것도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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