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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킹오황 Jan 01. 2023

책을 발간했습니다

사실, 저의 책은 아닙니다. 우리 과에서 매년 지자체에서 법과 관련하여 문의한 내용을 모아 사례집을 발간하는데 그 업무를 제가 담당하거든요. 그래서 우리 부처 이름으로 발간되는 책입니다.


공무원으로서 책을 발간하는 업무를 맡는다는 의미는 발간 계획을 수립하여 국 과장님께 결재받는 게 끝이 아닙니다. 책의 저자, 디자이너, 편집자의 역할을 다 해야 한다는 뜻입니다. 거기다 어디에 배송할지, 책자를 어떻게 활용할지까지 고민해야 합니다. 국민의 세금으로 내는 책이니만큼 신경을 많이 써야 하죠.


제가 맡은 책은 그동안 매년 비슷한 형식으로 발간되었습니다. 1년 동안 질의응답 사례를 전부 모아 유형별로 정리한 책이었죠. 분량도 천 페이지나 되었습니다. 활용만 잘한다면 좋은 책인 것은 분명하지만, 양도 방대하고 내용도 어려워서 사람들이 많이 찾진 않은 것 같았습니다. 무엇보다 저도 거의 안 읽었죠.


저는 좀 다르게 만들어 보고 싶었습니다. 전임자가 하던 대로 똑같이 하겠다는 것은 제 업무 스타일은 아니었습니다. 힘들 수 있더라도 전에 것보다 더 효과적인 책을 만들어보고 싶었습니다. 그래서 과장님과 국장님을 설득했습니다. 정말 알찬 내용으로 구성할 테니깐 올해 사례집은 작년과 완전 다르게 만들어보겠다고. 다행히 두 분 다 저를 믿으셨는지 제 마음대로 해보라고 하시더군요. 그렇게 사서 고생이 시작되었습니다.




사례집을 개선하기 위하여 먼저 문제점을 명확히 찾았습니다. 그동안의 책은 말 그대로 읽기 어려웠습니다. 내용도 어려운 데다가 글자만 잔뜩 있어서 읽기도 지루했습니다. 책의 주요 독자가 지방의 공무원일 것인데 과연 이 책을 다 읽을 수 있을까 의심이 들었습니다. 그래서 법을 잘 모르는 신규 공무원이라도 읽을 수 있는 책을 만들고자 했습니다. (물론 내용이 흥미롭진 않습니다ㅠ) 또 책이 너무 두꺼워지면 아무도 안 읽을까 봐 딱 100페이지 정도로 얇게 만들기로 했습니다.


그러한 내용으로 사례집 발간 계획을 세웠고 국 과장님께 결재를 받았습니다. 그리고 저는 책 내용을 쓰기 시작했습니다. 공무원들이 자주 묻는 질문을 모으기 시작했습니다. 과거에 발간된 책들도 많이 참고했습니다. 어차피 공무원들이 궁금한 내용은 거기서 거기니깐요. 그 질문에 대한 답변을 달고 그 이유도 정리했습니다. 책에 담길 내용을 다 썼을 때 거의 끝이라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그게 아니더군요.


글을 다 쓴 후 이렇게 쓴 글을 어떤 방식으로 구성해야 이해가 잘 될지 고민했습니다. 마침 우리 국에 수습 사무관들이 배치되는 바람에 젊은 분들의 아이디어를 반영할 수 있었습니다. 쉽고 짧게 답하는 걸 강조하기 위해 메신저로 대화하는 것처럼 구성했죠. 그만큼 이해하기 쉽게 만드려고 했습니다. 메시지창은 어떤 모양으로 어떻게 배치하고, 텍스트는 어디다 두고 이런 것들을 정해서 샘플 페이지를 만들고, 인쇄소에다 전체 글에 반영하도록 편집을 맡겼습니다.


제가 요청한 방식으로 인쇄소에서 가제본을 10권 만들었습니다. 이걸 과장님, 국장님을 포함하여 주변 분들에게 나눠드리고 오탈자나 표현 어색한 것 또는 의견을 들었습니다. 어림 잡아 2~300개의 수정 의견이 있더군요. 그걸 다 반영하고 저도 책을 몇 번씩 보면서 오탈자를 잡았습니다. 봐도 봐도 끝없이 오탈자가 나왔습니다. 이러다 해를 넘길 거 같아서 할 수 없이 어느 정도 선에서 멈췄습니다. 편집자분들이 참 대단하단 걸 다시 느꼈습니다.


참, 책 제목과 표지 정하는 데도 시간이 꽤 들었습니다. 국장님은 공무원이 발간하는 책 느낌이 안 나게 주문하셨는데, 사실 그게 제일 어려웠습니다. 공무원이 읽을 책을 공무원이 발간하는데 공무원스럽지 않아야 한다는 지시라... 어쨌든 수습 사무관들과 고민의 고민 끝에 제목을 정하고, 대변인실의 디자이너 주무관님께 커피 쿠폰을 드려가면서 제가 원하는 책의 이미지를 잘 표현하는 이쁜 표지를 얻어냈죠.


최종 인쇄본을 오케이 하고 인쇄에 들어갔는데, 인쇄가 완료되기 전에 발간등록번호가 잘못된 위치에 찍혀 있는 것을 우연히 발견했습니다. 저도 책을 처음 발간하는 거라 위치를 신경 쓰지 않았는데, 찾아보니 법령에 위치까지 상세히 규정되어 있더라고요. 부랴부랴 인쇄소에 연락하고 수정본 받아 다시 검토하는데 진이 다 빠졌습니다. 다 끝난 줄 알았던 일인데 그게 아닌 걸 알았을 때 느끼는 스트레스가 상당하더군요. 어쨌든 결과적으로 잘 마무리가 되었습니다. 굳이 아쉬운 점을 찾자면 표지 색상이 약간 더 화사했으면 한 것 정도?




직장 동료 사무관은 저에게 작년이랑 똑같이 해도 되는데 왜 굳이 이렇게 다 엎으면서 사서 고생하냐 물었습니다. 저는 조금 더 도움이 되는 일을 한다면 재미도 있고 보람도 더 크기 때문이라고 했죠. 저도 하기 싫은데 위에서 시켜서 억지로 하는 일은 이렇게 못합니다. 하면서 스트레스도 엄청 받죠. 모든 일이 그러면 정말 회사 가는 게 불행하잖아요. 그래서 저는 언제나 제가 하고 싶은 일을 꼭 하나는 만들어둡니다. 그러면 회사 가는 것도 즐겁더라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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