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신없는 한 달을 보내다가 처음 맞는 여유로움이다. 그 짧은 기간 동안 몸과 마음이 얼마나 빨리 상할 수 있는지를 직접 겪고 나니 휴식이 필요했다. 아니, 휴식보단 진정 아무것도 하지 않는 나태가 절실했다. 이번 연휴 내내 집에만 있기로 했다.
창이란 창은 다 열어 빗소리와 함께 하는 주말. 간간히 허리를 펴고 아파트 사이로 보이는 금강을 힐끗거리면서 멍하니 있거나 그마저도 지루하면 책을 봤다. 어젠 하루종일 만화책을 봤고, 오늘은 김영민의 인생의 허무를 어떻게 할 것인가라는 책을 읽기 시작했다. 정신적으로 안정을 찾고 있다. 그 덕에 이렇게 글도 쓴다.
며칠 전엔 당혹스러운 일을 겪었다. 그때도 부슬거리는 비가 오던 밤. 회식이 있었던 아내를 데리러 세종시의 번화가인 나성동으로 갔다. 아내를 태우고 사거리에서 신호를 대기하고 있었는데 갑자기 덜커덩하며 차가 흔들렸다. 깜짝 놀라 뒤를 보니 한 차가 바로 뒤에 꼭 붙어 있었다. 비도 오고 어두운데, 내 차 뒤에 선다는 것을 실수로 살짝 박았나 보다 싶었다.
빨리 집에 가서 쉬고 싶었던 나는, 세게 부딪힌 것도 아닌 것 같으니 차에 큰 상함이 없으면 그냥 넘어가야겠단 마음으로 차에서 내렸다. 차 범퍼를 보니 별 흠집도 없는 것 같아서, 운전사에게 조심하시란 말씀만 드리려고 했다. 그런데 운전석에 계신 분은 창문을 꼭 닫은 채 내리지도 않고, 오히려 조수석에서 술을 꽤 드신 듯 보이는 아저씨가 내리더니 날 보고 대뜸 소리를 친다. 차 박은 거 증거 있어? 증거 있냐고?
다시 보니 차와 차 사이가 한 뼘도 안 되는 거리지만 살짝 떨어져 있었고, 내 차 범퍼가 상한 흔적도 없었으며(나중에 집에 와서 보니 페인트가 살짝 묻어 있었지만), 누구도 다친 상황이 아닌 데다가, 내 차엔 블랙박스가 없어서 증거를 제시할 수도 없었다. 거기다 내가 공무원이란 점도 마음에 걸렸다. 현재 자리도 자리인 만큼, 사사로운 시비에 휘말리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알았다고 그러면서 내가 죄지은 사람인 마냥 자리를 떴다.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화도 났지만 섭섭했다. 내가 공무원이 된 이유가 바로 그 아저씨 같은 국민이 좀 더 행복한 삶을 누릴 수 있고자 함이었는데. 그래서 윗사람에게 혼나고 욕먹는 일이 있어도 국민을 돕는 길이라 생각하면 참고 견딜 수 있었는데. 안 그래도 일 때문에 몸과 마음도 약해진 상황에서 일반 국민에게까지 그런 취급을 당하니깐 공무원이란 직업에 회의감이 많이 들게 되더라.
내가 공무원이라서 그런가. 어린이날이 낀 연휴에 비가 온다는 뉴스를 보고는 먼저 전국의 어린이들이 실망할 것에 걱정이 되었고, 폭우로 피해가 있을까 봐 걱정이 되었으며, 이러다 비가 안 오거나 적게 오면 욕먹을 기상청이 걱정되었다. 그래서 휴식이 필요한 나에겐 반가운 비라고 할지라도, 마냥 좋아한다는 티를 내기도 어렵다. 공무원으로 사는 게 참 쉽지 않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