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가 공직 생활 중에 가장 많이 들은 질문 중 하나입니다. 사람들은 KAIST 출신이 기술고시도 아니고 행정고시를 봤는지 이유가 많이 궁금한가 보더라고요. (지금은 5급 공개경쟁채용시험으로 명칭이 바뀌었지만 편의상 행정고시, 기술고시로 표현하겠습니다)
먼저 팩트부터 말하자면, 생각보다 많은 KAIST 동문들이 행정고시에 합격하고 있습니다. 대부분 일반 행정직이 아니라 재경직이긴 하지만요. 제가 합격할 때도 재경직렬에 동문이 저까지 5명이었습니다.
제가 기술고시를 안 본 이유는 단순합니다. 제 전공으로는 기술고시를 볼 시험이 없었거든요. 공무원이 되려면 행정직렬로 시험을 봐야 했는데, 일반행정은 정치학, 행정학 등 저에게 생소한 과목들이 많았고, 재경직렬은 그나마 경제학이나 통계학 같이 수리적인 역량을 요구하는 과목들이 많았거든요. 직렬은 그런 이유로 선택했던 것 같습니다.
그럼 왜 대학 전공을 살리지 않고 공무원 시험을 봤냐. 색다른 관점에서 한번 말해볼까 합니다.
저는 처음부터 공무원을 하려는 생각이 있었던 건 아닙니다. 공무원을 하기 전엔 중소기업에서 프로그래머로 일을 했죠. 그때 회사 동료, 선배들을 보면 이분들은 프로그램을 짜는 것을 진정 좋아했습니다. 집에서 쉬면서 취미로 동영상 재생 프로그램을 만들고, 소설책 대신 소위 구루라 불리는 프로그래머가 쓴 책들을 사서 읽었으며, 모여서 커피를 마시며 어떻게 하면 좀 더 짧은 코드로 성능이 좋은 프로그램을 짤 수 있을까를 토론하는 분들이었죠. 저는 프로그래머로서 이들을 절대 이길 수 없단 생각이 들었고, 이들과 경쟁하느니 다른 분야로 가야겠다는 결심을 했습니다.
그전엔 어땠을까요. 대학원이나 대학교 때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저는 동문들에 비해 압도적으로 머리가 좋은 것도 아니었고 심지어 근면하지도 않았습니다. 똑똑한 천재 같은 친구들이 나보다 더 학문에 관심 있는 데다 더 늦게까지 공부하는데, 시간이 가면 갈수록 나와의 격차는 벌어지고 있었습니다. 그때 저는 제가 학자로서도 친구들에 비해 경쟁력이 떨어진다 생각했고, 진작에 박사, 연구원, 교수의 길은 포기했습니다.
학교와 직장에서 제 자신의 한계를 알게 된 뒤에는 점점 자신이 없어졌습니다. 세상에 내가 잘할 수 있는 일이 없고 나도 세상에 필요 없는 존재인 것 같았습니다. 서른이 넘을 때까지 시간만 보내며 방황했습니다. 그러다 우연히 공무원이란 직업을 알게 되었죠. 어차피 늦은 인생, 모 아니면 도란 생각으로 시작했습니다.
저는 운 좋게도 저의 강점을 뒤늦게 발견했습니다. 저도 처음엔 몰랐는데, 공부를 하다 보니 제가 생각보다 고지식하고 원리원칙을 중시하던 사람이었더라고요. 이런 성격인 사람이 공무원이 된다면 공직사회에서도 경쟁력이 있을 거라 생각했습니다. 성과나 결과 중심적인 민간과 달리 공직에선 성실함, 청렴함, 준법정신 이런 가치들이 굉장히 중요하니깐요. 공대 사람이 융통성이 좀 없는 편이기도 하죠.
결과적으로는 잘한 선택이 되었습니다. 좋은 공무원이란 자기가 하는 업무를 정확히 이해할 수 있을 정도까지만 똑똑하면 충분하고, 무엇보다 공익을 위한 마음을 갖추는 것이 훨씬 중요하다고 생각하거든요. 저는 세상을 뒤바꿀 정도로 능력 있는 사람은 아닙니다. 하지만 공무원으로서 제가 하는 일을 파악할 정도는 되고, 가진 능력을 활용해 세상에 조금이라도 기여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사람들이 저에게 도움을 받아 감사하다고 할 때마다 보람을 느낍니다. 아무도 보지 못한 오류를 찾아 수정하고, 나중에 생길지도 모르는 문제를 미리 해결할 때도 그렇습니다. (아이러니하게도 공무원은 일이 안 터지게끔 하는 것보다, 이미 터진 일을 열심히 수습하는 모습에서 더 좋은 평가를 받습니다) 세상은 모르더라도 내가 세상을 돕고 있단 생각을 하면서 혼자 만족해하고 있습니다. 이렇게 소소한 기쁨을 느낄 수 있는 사람이라면 공무원이 되더라도 후회하지 않을 거라 생각합니다. 출신 학교랑 아무 상관없이요.
사진: 분임 동기 G