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무원에게 "공무원 같지 않다"는 말이 칭찬일까요.
"공무원 같다"는 말이 주는 느낌은 어떨까 생각해 보았습니다. 일단 공무원은 정책의 일관성, 예측가능성 때문에라도 전임자가 한 일, 과거부터 있어온 일을 뒤엎기 쉽지 않습니다. 특히 정책 결정권자가 아닌 실무자들은 더 그렇지요. 문제는 요즘 같이 빠르게 변화하는 시대에서 법령이나 과거 사례에 묶여 보수적인 태도를 보일 수밖에 없는 공무원들을 바라보는 국민들의 시선은 좋지 않을 것입니다. 이러한 점들이 쌓여서 공무원 같다는 말도 긍정보단 부정의 이미지를 더 주게 되지 않았나 싶습니다.
사람은 자신이 하는 일에 자부심을 가져야 하는데, 자기 직업이 국민들에게 안 좋게 인식된다면 기분이 좋을 리가 없습니다. 특히 공익을 위하여 묵묵히 일하시는 공무원들도 많은데 이분들의 노력이 폄하되는 일은 없어야 할 것입니다. 저는 더 이상 공무원 같다, 공무원스럽다란 말이 복지부동하는 공무원들을 비아냥대는 뜻으로 해석되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제 직업을 어디서든 당당하게 말할 수 있고, 사람들도 인정하는 때가 오면 좋겠습니다. 저부터라도 열심히 살다 보면 그런 날이 오지 않을까요.
제가 지금 부처로 전입 오게 될 당시에 많은 장애물이 있었다고 합니다. 동기에 비해 나이가 많다 보니 운영지원과에서는 저를 뽑지 않으려고 했다는 말을 들었습니다. 결국에는 제가 민간에서 일을 한 경력, 공대 출신의 이력 등의 특이함 때문에 공무원처럼 일하지 않을 거라고 기대하며 뽑았다고 하더군요.
그 후로 저는 주변의 기대(?)에 부응하듯 일을 할 때마다 공무원 같지 않다는 말을 많이 들었습니다.
예를 들어보면, 어린이 교육 사업을 할 때였습니다. 교육 행사에 참여한 초등학생들에게 주는 기념품을 고르는 것도 저의 업무 중에 하나였습니다. 공무원으로서 중간 이상 가려면 과거 전임자의 사례를 찾아보고 잘 된 것을 똑같이 하면 됩니다. 과거 사례를 벤치마킹 하는 것이죠. 그런 공직사회의 실태를 잘 아는 행사 업체는 저에게 손선풍기, 우산, 휴대용 배터리 같이 행사에 기념품으로 많이 활용되는 것들을 추천했습니다.
물론 그런 실용적인 기념품들도 아이들에게 반응이 괜찮았습니다. 그러나 저는 좀 더 우리 부처를 홍보할 수 있으면서 아이들도 좋아할 만한 효과적인 아이템이 없을까 고민했습니다. 그러다 우리 부처의 캐릭터를 인형으로 만들어보면 어떨까란 생각이 들었습니다. 귀여운 인형은 어른의 입장에선 쓸모없는 것이더라도 초등학생들에게는 꽤 괜찮은 선물이 될 것 같았습니다.
거기다 우리 부처에는 그런 인형이 없었기 때문에 도전의식도 생겼습니다. 다만, 안 해도 되는 일을 벌이는 것이다 보니 주무관의 협조가 필요했습니다. 주무관에게 인형의 필요성을 설명하고 함께 의미 있는 일을 해보자고 설득했고, 주무관도 재미있겠다며 긍정적인 태도를 보였습니다.
우리는 다른 부처의 캐릭터 인형을 구해 살펴보면서, 인형의 크기와 모습을 어떻게 할지 구상했습니다. 동시에 몇몇 인형 제작 회사에 연락하여 인형 샘플들을 받았습니다. 남자 둘이서 샘플 중 어떤 인형이 귀여운 지 판단하기가 버거웠기 때문에 주변 동료들의 의견을 적극적으로 들었습니다. 그렇게 선정한 회사는 캐릭터 인형 샘플을 만들어 보내줬습니다. 인형 샘플을 검토해서 우리의 의견을 보내줬고, 그렇게 몇 번 더 왔다 갔다 한 후 최종 제품이 완성되었습니다.
그 인형은 학생들 뿐만 아니라 부처 직원들에게도 폭발적인 인기를 끌었습니다. 지금도 사무실 곳곳에 그 인형들이 놓여 있는 것을 보면 뿌듯함을 느낍니다. 굳이 안 해도 되는 일이었지만 저와 주무관이 조금 더 노력한 덕분에 세상에 작은 기여를 한 것이니깐요. 거기다 위에서 시킨 일이 아니라 저희가 주도적으로 추진했던 일이다 보니 힘든 줄도 모르고 재미있게 했습니다. 그게 중요한 거죠.
다른 예도 들어보겠습니다.
지방 공무원들에게 자치법규를 교육하고, 상담하는 업무를 한 적이 있었습니다. 처음에는 저도 자치법규에 대해 잘 몰라서 대답하는 데 어려움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혼자 공부를 많이 했는데 그때 드는 생각이 자치법규와 관련된 자료들이 참 어렵더라고요. 나름 법에 전문성이 있다고 자신하는 저도 어려운데, 주로 집행 업무를 하는 지방 공무원들이 시간 내서 공부하고 이해하기는 쉽지 않아 보였습니다. 그래서 '누가 시키지도 않았지만' 지방 공무원들을 위한 책자를 만들어보겠다는 결심을 했습니다.
공무원이 갑자기 책을 만드는 것은 쉽지 않습니다. 저는 제 업무 중에 사례집 발간 업무가 있고 거기 예산이 있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었습니다. 다만, 매년 아무도 안 보는 천 페이지짜리 사례집을 발간하는 것 대신 새로운 책을 기획해서 발간하겠다는 걸 국장, 과장님께 설득하고 결재를 받는 게 문제였죠. 운이 좋게도 두 분 다 제 생각을 적극적으로 지원해 주셨습니다. 더욱이 국장님은 마침 국에 배치된 수습 사무관을 붙여 주시면서 젊은 사무관의 아이디어를 잘 활용해 보라고까지 하실 정도였습니다.
책의 목적은 명확했습니다. 막 자치법규 관련 업무를 시작하는 지방 공무원들이 자치법규의 기본을 쉽게 이해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이었습니다. 다만, 어떻게 내용을 구성해야 하는지가 중요했습니다. 단순히 이론과 설명을 쭉 적는 것은 재미도 없고 이해하기도 어려우며, 무엇보다 기존의 책들과 차별성도 없었죠.
그런데 수습 사무관이 훌륭한 아이디어를 냈습니다. 카카오톡과 같이 메신저로 묻고 답하는 방식으로 구성하면 어떻겠냐는 것이었죠. 메신저는 그 특성상 길게 묻고 답하기가 어렵습니다. 질문과 대답이 짧을 수밖에 없죠. 그러려면 질문은 핵심만 담겨야 하고, 답변도 복잡한 이론을 가져와서 주저리주저리 답하는 게 아니라 한 줄로 딱 yes or no 결론만 말해야 합니다. 필요하면 아래에 설명을 덧붙이면 되고요. 이런 식의 구성은 참신할 뿐만 아니라 이해하기도 쉬워 보였습니다. 수습 사무관의 젊은 감각이 돋보이는 생각이었습니다.
내용은 이미 제가 다 써놨습니다. 사실 과거에 있던 자료들을 모아 편집하고, 지방 공무원들이 자주 물어보는 질문들을 더 추가했습니다. 그걸 여러 과장님들과 사무관들에게 검수를 부탁했습니다. 속지에 메신저 형태의 디자인, 표지 디자인 등은 다른 과의 주무관, 디자이너 등 많은 분들의 도움을 받았습니다. 이분들이 아니었으면 책자는 완성되지 못했을 것입니다. 이 책을 본 사람은 책 마지막에 발행한 사람으로 제 이름을 적어도 될 텐데 왜 안 적었냐고 그러더군요. 저는 일부러 적지 않았습니다. 저 혼자만 한 게 아니니깐요.
책을 인쇄해서 각 지자체, 지방의회 등에 뿌렸습니다. 사실 책을 만들었다는 게 중요한 게 아니라, 실제 지방 공무원들이 어떻게 생각하느냐가 더 중요했습니다. 그들의 반응이 궁금했지만 직접 물어보진 못했습니다. 그들도 제가 이 책을 만드는 데 역할을 했다는 것을 모를 테고요. 시간이 지나면서 어떤 지자체에선 책을 더 보내줄 수 있냐는 요청이 들어오기도 하고, 인터넷 홈페이지 게시판에 그 책이 도움이 많이 되었다거나 그 책의 페이지를 인용하는 글들을 보고는 책이 잘 활용되고 있단 걸 확인했습니다.
이것 또한 누가 시키지 않은 거지만 제가 자발적으로 지방 공무원들에게 도움이 되고자 시작했던 일이었고, 그래서 더 즐겁게 일을 했습니다. 그만큼 보람도 컸고요.
이상의 사례에서 혹자는 이렇게 말할지도 모릅니다. 그래도 당신은 사무관이니깐 그만큼 권한이 있으니 원하는 방식으로 업무를 기획하고 추진할 수 있었던 것 아니냐라고. 그런데 사례를 보시면 무에서 유를 창조한 것이 아니라 딱 제가 할 수 있는 업무에 대해 과거를 답습하지 않고 한걸음 더 나아간 것에 불과합니다. 심지어 어린이 교육 행사에 쓸 기념품 제작은 사실 사무관이 할 정도의 일인가 싶기도 합니다.
어쨌든 직급이 중요한 게 아니라 본인이 할 수 있는 권한 내에서 조금 더 주도적이고 적극적으로 일을 하게 된다면 일을 하는 게 재미있어집니다. 국민과 공익을 위해서라는 거창한 목적까지는 아니더라도 본인이 하는 업무의 효과를 높이기 위해 어떻게 하면 좋을지 고민하고 그걸 잘 기획해서 추진하는 것이죠. 저도 위에서 시켜서 억지로 하는 일은 이렇게까지 못합니다. 하면서 스트레스도 엄청 받죠. 제가 하는 모든 일이 그러면 정말 회사 가기 싫잖아요. 그래서 저는 언제나 제가 하고 싶은 일을 꼭 하나는 만들어둡니다. 그러면 회사 가는 것도 즐겁더라고요.
사진: 분임 동기 G