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원인의 하소연 듣기

by 킹오황

젊은 공무원들이 힘든 업무 중에 하나는 민원이 아닐까 생각됩니다. 정확하게는 악성 민원. 전체 국민을 대상으로 하는 직업이다 보니 다양한 사람을 대할 수밖에 없고, 그러다 보면 무례한 민원인을 만나는 경우도 생기게 되죠. 민원이라 하면 주로 지방의 일선 공무원들에게만 일어나는 일로 보이겠지만, 저 같은 중앙부처 공무원에게도 민원은 피할 수 없는 일입니다.


저는 민원인의 연락을 즐기기까진 못해도 최대한 그들에게 도움이 되려는 마음을 가지고 있습니다. 바쁜 일이 있어도 제가 먼저 전화를 끊은 적은 없고, 점심시간에 밥도 못 먹고 민원인과 전화한 적도 있습니다. 옆자리 주무관은 저보고 무슨 통화를 3~40분씩이나 하냐면서 사무관님 요즘 일이 없는 것 아니냐며 농담한 적도 있었습니다. 물론 저도 처음부터 그렇게 열심히는 아니었습니다.




제가 수습 사무관으로 있을 때 민원인의 전화를 받은 적이 있었습니다. 정부가 추진하는 지원 사업에 신청했는데 자기가 요건이 안되어서 지원 대상에서 빠졌다, 그런데 자기는 지원을 받아야겠으니 다시 검토를 해달라는 내용이었죠. 저는 빠르게 사업 지침을 훑어보고는 지원 대상이 아니라서 안된다고 답했습니다. 최대한 무미건조하게요. 안 되는 걸 알면서도 민원인과 싸우기 싫어서 긍정적으로 검토해 보겠다고 말하는 건 민원인에게 희망고문하는 거와 같다고, 그래서 빨리 포기하고 납득할 수 있도록 명확하게 답하는 게 더 바람직하다는 선배 공무원의 가르침을 생각하면서요.


민원인에게 한 단호한 태도를 보시더니 과장님께서 저를 부르셨습니다. 무슨 일인지 자초지종을 듣고는 저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민원인들이 처음부터 중앙부처에 전화하지 않는다. 처음엔 주민센터부터 연락하기 시작해서 시청, 도청을 거쳐도 잘 안 될 때 지푸라기라도 잡는다는 심정으로 중앙부처까지 찾게 되는 것이다. 이 사무관이 전화를 받았다는 건 그 민원인이 얼마나 절박한 상황인지를 알아야 한다. 그러니 안 되는 건 안 된다고 할지라도 그 민원인의 말씀을 잘 들어줘라. 그것만으로도 민원인의 마음이 풀릴 것이다.”


공무원 시작한 지 얼마 안 되었을 때 들었던 그 말씀은 아직까지 뇌리에 깊이 남아 있습니다. 그리고 공직 생활을 마칠 때까지 절대 잊지 않을 것입니다. 제가 공무원을 하는 이유도 사회에 기여하고자 해서인데, 내가 바쁘거나 귀찮다고 도움을 줄 수 있는 기회를 저버렸다면, 사실 공무원을 할 이유도 없는 것이죠.


그 이후로 저의 민원인에 대한 태도는 달라지기 시작했습니다. 전화로 다짜고짜 욕부터 하는 사람도 있었지만, 제가 그분의 말을 끝까지 다 듣기만 해도, 그분의 목소리에서 화가 풀리는 게 느껴지더라고요. 신기한 경험이었습니다. 민원인이 정부와 공무원을 비판하고 있을 때, 제가 이걸 해명하고 설득하려고 하면 그분의 목소리가 점점 커지는데, 그분의 하소연을 듣고만 있으면 점점 작아지더라고요. 그때 깨달았습니다. 이분들은 해결을 원하는 게 아니라 자기 말을 들어줄 사람이 필요했다는 걸요.



한 번은 이런 일도 있었습니다. 사무실 전화가 울렸습니다. 010으로 시작되는 번호라 받을까 살짝 고민했었습니다. 한창 바쁜 일을 처리하는 중이었는데, 민원인과 전화하면 몇십 분은 금방 지나가거든요. 그래도 어쩌겠습니까. 제 사무실까지 전화하려면 얼마나 많은 전화를 거쳤을까 하는 과장님의 말씀을 생각하니 받아야겠더라고요.


술에 잔뜩 취한 분이셨습니다. 말끝마다 욕설이었습니다. 제 말은 안 들리시는지 계속 혼잣말을 하셨습니다. 정부 때문에 자기 사업이 망했다는 것 같았습니다. 한 30분 들었나, 취한 분이라 대화도 어렵고 이젠 통화를 마무리해야겠다고 하던 찰나에 그분이 말씀하시더라고요. 자기는 유서도 써놨고, 이제 죽으러 가는 길이다라고. 그 순간 정신이 번쩍 들었습니다. 다급히 말했습니다.


"선생님, 그러지 말고 한번 저희 사무실에 오셔서 말씀해 주실 수 있을까요?"


내내 횡설수설하시던 분이 갑자기 정신을 차린 듯 또박또박하게 말씀하셨습니다. 내 말을 진지하게 들어줘서 고맙다고, 내일 세종에 가면 볼 수 있는지, 그렇다면 내일 보자고 하셨습니다. 순간 달라진 태도에 민원인께 낚였나 싶었지만 무슨 일인지라도 들어보고 싶은 마음에 약속을 잡았고, 실제로 다음날 만나서 2시간 정도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결과적으로 그 민원인의 요청을 받아들이기는 어려웠습니다. 그래도 그분께서는 이렇게 사무관이 손수 자기를 불러서 만나줬다는 점에 만족해하시더라고요.


제가 뭐 대단한 사람도 아닌데, 이렇게 시간 한번 내주는 걸로 죽겠다는 사람을 위로해 줬다는 사실에 또 한 번 보람을 느끼게 되었습니다.




저는 민간 회사를 다닌 적이 있었습니다. 그때 박경철의 '시골의사의 아름다운 동행'이라는 책을 읽고 제가 하는 일로 한 명이라도 더 행복하게 된다면 일하면서 얼마나 보람찰까 생각했던 적이 있었습니다. 사무관으로서 더 크고 중요한 정책 결정을 한 적도 있었지만, 그런 경우엔 직접 혜택 보는 사람들이 눈에 보이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민원은 제가 하는 행동이 그 사람에게 바로 도움이 될 수 있고, 반응도 직접 경험하게 됩니다. 사회의 구성원으로서 전혀 모르는 다른 사람을 도울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제 일의 자부심을 느낍니다.



사진: 분임 동기 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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