직장 동료들이 저보고 "같이 일하기 싫은 공무원"이라고 놀립니다. 제가 일에 너무 열심히여서 그렇다고 합니다. 일하는 것도 좋아하지만, 퇴근하고 집에서 와이프랑 노는 것을 더 좋아하기 때문에 저로선 약간 억울한 면도 있습니다. 그렇지만 제가 직장에서 하는 모습만 보면 그들이 왜 그러는지를 알 것 같습니다.
저는 MZ보단 꼰대 쪽에 더 가까운 사람인지, 제가 조직에 속해있는 동안에는 개인보단 조직이 더 우선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렇다고 무조건 개인의 희생을 강요하자는 것은 아닙니다. 적절한 수준을 유지하는 게 중요한데, 저는 이걸 처음 모셨던 과장님께 제대로 배웠습니다.
그 과장님은 야근을 싫어하셨습니다. 정확히는 상사에게 보여주기 식의 불필요한 야근을 싫어하셨죠. 그래서 수습 사무관이었던 저에게 항상 강조하셨습니다. 수습일 땐 퇴근 후 다양한 사람들을 만나는 게 중요하니깐 일찍 퇴근하라고 하셨죠. 대신, 국회 대기와 같이 정말 급한 일이 있을 땐 야근은 물론 주말에도 출근하라고 지시할 수도 있다고 단서를 붙이셨는데, 정말로 그렇게 지시할 때도 있었습니다. 그때마다 그 과장님이 말씀하실 정도라면 이유가 있을 거라며 수긍했습니다.
저도 그동안 함께 일하던 여러 주무관들에게 똑같이 행동했습니다. 평소에 일이 없을 땐 굳이 남아 있을 필요가 없다고 했고, 정말 부득이할 땐 주말에 나오셔야 할 것 같다며 양해를 구한 적도 있었습니다.
그러다 언젠가 일이 한번 터졌습니다. 연말에 정말 바쁠 때였습니다. 출장이 매주 잡혀 있는데, 같이 있던 주무관은 해야 할 행정 업무가 너무 많아서 출장을 대신 제가 갔었을 정도였습니다. 그런 상황에서 주무관이 저보고 연가를 쓰겠다고 알렸습니다. (과장님이 주무관의 근태 상황은 1차적으로 제가 판단하도록 위임했습니다) 평소엔 사유도 묻지 않고 써라고 했겠지만, 상황이 이렇다 보니 뭐 때문에 연가를 쓰는 건지 물었습니다.
주무관은 건강검진 때문이라고 했죠. 여기서 저는 그 건강검진이 내시경처럼 그날에 꼭 받아야 하는 검사가 있는 거냐고 물었습니다. 그게 아니라면 다른 날로 바꾸는 건 어떠냐고 했죠. 업무가 과중하다고 해서 출장까지 열외를 시켰는데 굳이 이때 써야겠냐면서요. 지금 다시 생각해 보면 과도했을 수도 있겠다 싶었지만 그때 저는 단호했습니다. 특별한 검사를 받을 계획이 없었던 주무관은 결국 건강검진을 연기하기로 했습니다. 그리고 저는 주무관의 연가를 못쓰게 한 파렴치한 사무관으로 소문이 났었죠. ㅠㅠ
참고로 그 주무관은 지금까지도 저와 돈독하게 지내는 사이입니다. 저에게 자주 술 사달라고 하는 주무관 중 한 명이죠. 다만, 술을 마시면 그때 제가 연가를 못쓰게 한 거 가지고 놀립니다. 우리 안주거리가 되어버렸죠. 그래도 전 속으로 되뇝니다. 제가 생각했을 때 정말 필요하다 싶을 땐 욕먹을 각오로 할 말은 할 거라고.
또 다른 예도 들어보겠습니다. 저는 일을 대충 하는 걸 싫어합니다. 본인이 공문서를 기안한다면 최소한 행정안전부의 공문서 작성 지침(행정업무운영 편람)이라도 찾아봐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과거에 전임자가 한 걸 그대로 베끼기만 한다면 공무원 경력이 몇 년이 지나더라도 여전히 아는 건 없을 것입니다.
솔직히 저도 예전엔 멋모르고 과거 사례를 베낀 적이 있었습니다. 제가 교육 홍보 지원사업을 담당할 때였습니다. 언론사나 교육 기획사 같은 곳에서 정부 보조금을 지원받기 위해 사업계획서를 작성해서 제출하면, 지원 타당성을 검토하여 선정 위원회에 올릴 안건 초안을 만드는 일을 했습니다.
처음에 과장님께서 저보고 사업계획서를 검토해 보라고 했습니다. 저는 그런 일을 해본 적도 없고 어떻게 하는지 배우지도 못했죠. 전임자에게 인수인계를 받았을 때도 지원 금액은 적당한 수준만 맞추면 과장님께서 크게 뭐라 하지 않는다고 했었거든요. 그래서 과거 지원 수준에 맞춰서 지원 금액을 결정하고 과장님께 보고 드렸습니다.
그때 저는 아무것도 모르면서 순진하기까지 했습니다. 과장님께서 교육 영상 제작에 드는 비용을 어떤 근거로 책정했냐라고 물으셨을 때 과거 지원 내역을 참고했다고 솔직하게 답했습니다. 그러면서 과장님께서 보시기에 부족해 보이면 조금 더 지원해도 괜찮을 것 같으니, 과장님께서 위원회에 참석하셔서 (선심 쓰듯) 지원액을 올려주시면 모양새가 좋지 않겠냐라고 했습니다. 쓸데없는 말까지 덧붙이게 된 것이었죠.
과장님께서는 대뜸 화를 내셨습니다.
“사무관이라면 합리적으로 검토해서 결론을 내려야지 그게 뭐 하는 행태인 거야. 당장 제대로 검토해서 가져와라! 이게 다 국민의 세금으로 하는 사업이니 비용을 아껴야 한다. 하지만 동시에 사업이 내실 있게 추진될 수 있도록 적절한 수준의 금액을 산정해야 하는 게 사무관의 역할이다.”
저는 바로 대변인실로 가서 신문사별로 지면에 기사나 광고를 게재하는 데 드는 단가 자료를 받고, 홍보 사업을 여러 번 추진했던 공공기관에 연락해서 그간 지원한 영상 제작비의 세부 내역을 요청했습니다. 그 자료들로 홍보물 제작에 드는 평균적인 비용을 뽑아 사업계획서에 대입하여 적정 사업비를 도출했습니다. 추가로 홍보 효과를 고려하여 지원 금액을 가감했습니다. 그렇게 정리하여 과장님께 보고 드렸던 적이 있습니다.
저는 이런 식으로 훈련을 받았기 때문에 저와 함께 일하던 주무관들에게도 비슷한 방식으로 대했습니다. 과거 자료가 중요한 건 맞지만, 아무 생각 없이 베끼는 것은 용납하지 않았죠. 그래서 저와 일할 땐 공문 하나하나도 법령 근거를 찾도록 했고, 문구 한 글자도 제가 일일이 검토하고 따졌습니다. 특히 경험이 부족한 주무관은 더 세세하게 봤었죠. 그때 저 때문에 많이 고생했던 주무관 여럿 있었는데, 지금도 종종 밥 사달라고 연락이 옵니다. 저에게 많이 배웠다고 고마워하면서요. 물론 항상 해피엔딩은 아니었습니다. "근데요? 제가 왜요?"라고 말한 주무관도 있었거든요.
어떤 선배 사무관은 저에게 그럽니다. 자기가 저보다 선배여서 다행이다라고. 지금은 제가 사무관이니깐 그 밑에 주무관만 힘들면 되지만, 제가 과장이 되면 과원들이 다 힘들 건데 본인은 저보다 선배니깐 그럴 일은 없을 거란 의미였습니다. 하지만 저보다 직급이 높다고 예외는 아닙니다.
워낙 인간적으로 편하게 대해 주셔서 제가 좋아하는 과장님이 있습니다. 그 과장님과 함께 일할 때였습니다. 과장님이 몇 월 며칠에 외부에 교육을 가겠다며 저보고 물으시더군요. 괜찮겠냐고. 제가 날짜를 봤더니 그땐 간부 보고가 있을 수도 있겠더라고요. 그래서 과장님께 안된다고 했고, 과장님은 교육을 포기하셨습니다.
이렇게 적고 보니 저는 같이 일하기 싫은 공무원일 수도 있겠네요. ㅠㅠ
사진: 분임 동기 G