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 가질 순 없었다.

by 킹오황

미국에 올 때는 열심히 살면 다 얻을 수 있을 것 같았다. 영어, 학업, 미국변호사, 심지어 골프까지. 공항에 마중 나온 동기는 한 가지만 잘해도 성공한 거라고 했지만, 나는 내가 하기 나름이라고 생각했다.


슬픈 이야기지만, 여기서 한 달가량 지내면서 점점 현실과 타협하고 있다. 다행히 영어는 많이 늘고 있다. 최근 미국에 한파가 몰아치면서 TV에서 기상 뉴스만 내도록 봤더니, 어느 순간부터 기상 캐스터의 말이 들리기 시작했다. 나는 아내에게 귀가 뚫린 거 같다고 자랑했는데, 아내는 매일 똑같은 내용만 보니깐 그런 거라고 한다. 어쨌든 안 들리던 게 들리니깐 TV만 틀어놔도 도파민이 넘친다.


여기 UGA 로스쿨에 LLM 과정을 다니는 한국분을 만나 여러 가지 학업에 대한 조언을 들은 적이 있다. 그분은 한국에서 수십 년을 공부했지만, 지금 공부가 제일 힘들다고 하더라. 수업 준비만으로 하루 4~5시간이 든다고 했다. (미국 로스쿨의 악명 높은 수업 방식에 대해서는 따로 글을 써보려고 한다) 당장 가을부터 수업을 들어야 하는 나는 정신이 바짝 들어서 벌써부터 법률 용어랑, 미국 대법원 판례 같은 걸 공부하고 있다. 쉬는 시간에는 미드 Suits도 열심히 본다.


문제는 미국변호사 시험이다. 사실 고백하건대 LLM을 졸업하고 기회가 되면 미국변호사 시험을 볼 생각이 있었다. 좀 쉬지 무슨 거창한 계획까지 세웠냐 한 사람도 있겠지만(물론 좋은 시선으로 날 지지한 분들도 많다), 내 능력의 한계가 어디까지인지 확인해 보고 싶었다.


사실 우리 조직에서 일하다 보면 개인이 평가받을 때 실력도 실력이지만, 변호사(또는 사법고시 합격자)라는 권위도 꽤나 중요하게 고려되는 걸 봤었다. 법대를 졸업한 사람도 차고 넘친다. 나같이 공대 출신에 행정고시(심지어 재경직)만 패스한 사실만으로는 법적 전문성을 인정받기에 부족함을 느낄 때가 있다. 그런 의미에서 내가 한국에서 활용하기 어려운 미국변호사라는 자격이라도 들고 있으면 좀 더 낫지 않을까 했다. 자격지심에서 비롯된 점이라는 것을 부인할 수는 없다.


미국변호사(특히 워싱턴 D.C.) 시험을 보려면 여러 가지 자격 조건들이 있는데, 내가 이를 충족하기 위해서는 간략히 말하자면 평생교육원에서 법학 과목을 추가로 60학점 정도를 들어야 하는 게 있다. 미국까지 와서 노트북으로 한국 법학 교육을 한국말로 하루 몇 시간씩 들어야 한다는 게, 중간기말고사까지 보면서 공부를 한다는 게, (거기다 300만 원 정도의 비용은 덤이다) 로스쿨 학업에 따라가는 시간만으로도 부족할 것 같은 나에게 너무 부담이었다. 진작에 알았다면 한국에서 학점을 들었을 텐데, 참 아쉬웠다.


평소에 나는 일이라는 게 억지로 끌고 가다간 탈이 나기 때문에 자연스럽게 흘러가도록 하는 걸 중요하게 여긴다. 즉, 내 욕심만으로 여러 가지를 다 성취하려고 하다가 이도저도 얻지 못하는 결과를 얻게 될 것 같아서 하나는 포기하기로 했다. 여러 가지 고민 끝에 미국변호사 준비를 하지 않는 것을 선택했다. 돌아가면 나 같은 실수를 저지르지 않도록 후배들에게 미리 법학 과목을 많이 수강해 두라고 이야기를 해줄 것이다.


결국 동기의 말이 맞았다. 여기서 이 소중한 시간을 알차게 보내기 위해서는 능력에 맞게 선택과 집중을 할 수밖에 없다.


그나저나 최근에 학교에서 장학금 제안을 받았다. 장학금을 안 줘도 그 학교에 다닐 사람에게 이렇게 관대한 대우를 해주다니. 개인적으로도 엄청난 금전적 이득이지만, 이 소식을 들은 옆에 과장님은 정부 재정을 아꼈다며 장하다고 칭찬을 해주셨다. 다시 한번 딴생각을 하지 않고 학업에만 집중해야겠다는 다짐을 하게 되었다.


하지만 항상 좋은 일만 있는 건 아니다. 지난주에 산 차를 주차하다가 사이드 미러를 좀 긁었다. 중고차지만 평생 처음으로 큰돈을 들여 산 차라며 애지중지하던 아내에게 아직 말을 못 했다. 아마도 이 글을 읽다가 놀랄 것 같다.


다 가질 순 없음이다.



덧) 이 글을 발행하기 전에 미리 읽었던 아내는 내가 장학금 받는 사실보다 차를 긁었다는 사실에 더 기뻐했다. 본인이 먼저 긁었다면 2년 내내 내가 옆에서 잔소리를 해댔을 텐데, 내가 먼저 긁었기 때문에 본인이 나에게 잔소리할 권리를 얻었다고 더 좋아한다. 하루 종일 옆에서 차 긁은 이야기만 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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