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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킹오황 Jan 24. 2022

그걸 진심이라고 생각해요?

제가 수습 사무관으로서 처음 받은 제대로 된 업무가 바로 사업 평가 보고서를 작성해서 국회에 제출하는 것이었습니다. 사업의 개수가 많았고 전문성이 필요한 부분도 있어서 연구기관이 먼저 초안을 작성하고,  그걸 제가 검토해 보고서를 마무리해야 하는 거였습니다. 담당 연구원과 통화해보니 초안이 거의 완성되어 있으니 조금만 기다려달라고 했습니다. 그래서 마음을 놓고 있었습니다.


제출 기일이 다 되어 가는데도 기관에서 연락이 없었습니다. 연락해봤더니 아직도 작성 중이라고 하더군요. 슬슬 불안해졌습니다. 다 작성 안 해도 되니 일단 보내면 주말이라도 나와서 제가 한 번 검토하겠다고 했습니다. 담당자는 제가 고칠 게 별로 없을 거지만 그렇게 원하면 초안을 보내보겠다고 했습니다.


토요일에 나와서 초안을 인쇄해보니 300페이지가 넘었습니다. 처음엔 읽을 엄두가 안 났지만, 그래도 나 아니면 누가 이걸 보겠나 해서 찬찬히 보기 시작했습니다. 제가 당시에 사업들을 잘 몰랐고 주말에 누구에게 물어볼 사람도 없어서 오탈자와 논리적으로 안 맞는 부분만 살펴봤습니다. 하루 종일 봤지만 못 끝내고 일요일 아침에도 나왔습니다. 그렇게 이틀 내내 보고 수정 사항을 제가 봤던 보고서에 메모를 했습니다.


월요일에 출근해서 메일로 지적 사항을 하나씩 쓰다 보니 너무 양이 많아가지고 안 되겠더라고요. 연구원에게 전화를 해서 말했습니다. 오탈자가 너무 많아서 그냥 제가 첨삭한 것을 스캔 떠서 보내주겠다고요. 그 연구원은 황당한 듯 아니 뭐 얼마나 수정사항이 많길래 그렇게까지 하냐고 물었습니다.


"연구원님, 제가 괜히 그러시는 거라 생각하시나요? 처음에 수정할 게 없다 하셔서 진짜 그런 줄 알았습니다. 그런데 주말 내내 봤어요. 수정 사항도 대충 세봤는데 200개가 넘었습니다. 못 믿으시겠다고요? 스캔 뜬 거 메일로 보낼 테니 빠짐없이 반영해서 내일까지 보내주세요. "


사실 제가 오탈자를 잘 잡아내는 편입니다. 고시 공부할 때 학원 강사가 출판하는 책을 미리 검수해주는 알바를 하기도 했습니다. 그 연구원 입장에서는 제대로 걸린 거였죠.


그 일이 끝나고 그 기관의 다른 연구원에게서 메일을 받았습니다. 이렇게 열심히 일하는 사무관을 처음 봤다며 꼼꼼하게 봐줘서 감사하다는 내용이었습니다. 제가 그 메일을 동기들에게 자랑스럽게 말했더니 다들 저보고 그 말을 믿냐고 놀렸습니다. 그땐 순수하게 100% 믿었지만, 지금 그런 메일을 받게 되면 반만 진심이고 반은 좀 살살해달라는 말로 들을 것 같네요. 저도 순수함을 잃어가나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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