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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킹오황 Feb 10. 2022

시보 떼는 날

5급 공무원은 연수원을 마치면 1년간 시보로 임용되고 그 후 정규 공무원으로 임용됩니다. 이 기간 동안에는 보통 수습 사무관으로 불립니다. 저는 부서에 배치되자마자 바로 일을 시작했기 때문에 수습이라는 것을 느낄 기회가 없었습니다. 이렇게 일하다 보면 언젠가 수습이란 글자를 떼고 사무관이 되나 보다 싶었죠.


진짜 사무관으로 임용되는 날이 왔습니다. 시보 떼는 날이라고도 불립니다. 이 날에는 저희가 시보 떡을 돌려야 한다고 하더라고요. 동기가 국에 여럿 있어서 함께 돈을 모아 국에 떡을 돌렸습니다. 예전에 시보 떡 때문에 논란이 된 적이 있었던 바로 그 떡입니다. 요즘은 분위기가 바뀌었다지만 저희 때는 그렇지 않았습니다.


그렇게 국에 떡을 돌리고 제 자리에 돌아왔습니다. 과원들이 이제 정식 사무관이라며 저를 축하해주시더라고요. 솔직히 뭐 의미가 있나 싶었습니다. 오늘도 어제와 같은 하루일 뿐이었죠. 그랬는데 갑자기 과장님께서 부르시더니 저에게 선물을 주셨습니다. 과장님께서는 과비로 자그마한 선물을 하나 샀다고, 앞으로 사무관으로서 결재할 일도 많을 텐데 그때 사용하라며 만년필을 준비하셨다는 겁니다.


시보 떼는 날에 떡을 돌렸음 돌렸지 저처럼 선물을 받은 동기는 없었습니다. 저는 우리 과에 배치된 게 정말 행운이었다 싶었습니다. 저도 나중에 과장이 되고 제 밑으로 수습 사무관이 온다면 정말 잘해줄 자신이 있습니다. 딱 제가 받은 만큼만 해주면 될 거거든요. 물론 과장이 되려면 10년은 남은 것 같습니다.


어쨌든 그때부터 저는 만년필을 쓰기 시작했습니다. 마침 과장님께서도 만년필을 쓰셨기 때문에 만년필 관리하는 법도 배웠고, 과장님께서 쓰시던 만년필과 똑같은 걸 따라 사서 써보기도 했습니다. 지금도 만년필을 쓰는 사람은 주변에서 저 말고 못 봤습니다. 다들 제가 원래부터 만년필을 쓴 줄 아시던데, 사실은 시보 떼는 날부터 쓰기 시작했던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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