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에 대한 모든 지침서
* 영화의 결말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스포일러를 원치 않으시면 영화를 먼저 보시기를 추천합니다.
처음 영화를 보게 된 계기가 생각난다. '짐 캐리'라는 배우의 코미디 연기를 좋아했었는데, <마스크>나 <덤 앤 더머>에서 과한 표정 연기를 하던 짐 캐리의 정극 연기를 보고 팬이 되었던 기억이 난다. 그리고, 영화를 여러 번 다시 보게 되면서 배우뿐만이 아니라 여러 깊은 의미에도 빠져들게 되었다.
이터널 선샤인은 사랑에 대한 깊이감과 방향성 등 모든 부분에서 뛰어나다. 그들의 사랑은 불안하기도 하면서 아름답기도 하다. 사랑을 처음 시작하는 커플에게도, 사랑이 식어가는 커플에게도 모두 추천할 수 있는 영화라고 생각한다.
이 영화는 재미있는 상상에서 시작된다. 상처받은 사랑에 대한 기억을 잊으면 행복해질까?
영화의 제목인 <Eternal Sunshine(영원한 햇살)>의 의미에도 오해를 갖는 사람들이 많다. 이 단어는 영화에서도 등장하는 알렉산더 포프가 쓴 <엘로이즈가 아벨라르에게>에서 인용한 것이다. 이 시의 화자는 엘로이즈라는 여성인데, 중세 시대에 유명했던 엘로이즈와 아벨라르의 사랑 이야기에도 등장하는 실존 인물이다. 내용은 중세 때 있었던 30대 아벨라르와 그의 제자인 엘로이즈(10대)와의 사랑이야기가 배경이며, 두 사람은 사랑에 빠지지만 중간에 비극적인 일들로 인해 헤어지고, 그녀는 수도원에 들어가 원장 수녀가 된다. 수녀 원장이 된 그녀는 한 번도 사랑을 해 본 적이 없는 어린 수녀들에게 시 한 편을 읊어준다.
흠 없는 신녀의 운명은 얼마나 행복한가?
세상을 잊고 세상에 잊힌 자.
티 없는 마음(Spotless mind)에 영원한 햇살(Eternal sunshine)이 내리쬐니 모든 기도가 이뤄지고 모든 소망을 내려놓는다.
-알렉산더 포프의 시 中-
그 시에 나오는 문장인 'Eternal sunshine of spotless mind'는 사랑이라는 흠결이 없는 어린 수녀들이 영원한 햇살을 가졌다는 뜻이다. 반대로, 자신은 지난한 사랑을 해본 경험이 있었고 그래서 사랑이라는 것이 얼마나 아프고 힘든 것인지를 엘로이즈만이 알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영화에서 말하는 제목은 사랑에 대한 찬사가 아닌 사랑에 대한 비관적인 시각을 표현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영화는 우리들에게 두 가지 선택지를 제시하고 있다. 상대를 잊고 밝고 평안한 마음으로 살아갈 것인지, 다시 한번 햇살과는 거리가 먼 지옥 같은 사랑을 선택할 것인지를 묻고 있다.
그럼에도 우리가 이 영화를 아름답다고 여기는 이유는 극 중 조엘과 클레멘타인이 앞으로 벌어질 수 있는 불안한 상황에도 불구하고 사랑을 선택한다는 점이다. 논리적인 이유와 걱정을 뛰어넘어 다시 사랑으로 들어간다는 부분은 감동적이면서 숭고하기까지 하다.
사랑이 진행되면 동시에 함께 커져가는 불안감은 누구나 한 번쯤 느껴봤을 것이다. 그리고, 그 불안감은 서운함이나 상대에 대한 공격성으로 변하기 쉽다. 그러면 싸우게 되고, 관계는 지루해진다. 차라리 헤어지면 더 행복해지지 않을까를 고민하는 지경에 이르게 된다. 그럴 때 이 영화가 하나의 좋은 길잡이가 될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한다.
영화는 상대방에게 질린 조엘과 클레멘타인이 서로를 기억에서 지우면서 벌어지는 이야기이다. 조엘은 상대가 자신을 소중하게 생각하지 않고 지웠다는 사실에 분노하여 자신도 그녀를 지우려 한다. 기억을 지우는 과정이 흥미로운 점은 최근의 기억부터 그 사람을 처음 만났던 과거까지 시간의 역방향으로 지워간다는 점이다. 그 과정에서 처음에 싸우거나 지루한 일상의 쓸모없는 기억은 지우는데 거리낌이 없지만, 두 커플이 행복했고, 서로를 소중히 아꼈던 순간에 이르자 조엘은 기억을 지우는 것을 취소하고 싶다고 소리친다. 나중에는 좋았던 순간의 기억만은 남겨달라고 빌게 된다. 이것은 현실의 사랑이 식어갈 때 그 사람을 사랑하고 아꼈던 처음을 떠올리라는 조언이기도 하고, 동시에 상대의 모습 중에서 마음에 들지 않는 부분만을 지울 수는 없다는 사실 또한 알려주고 있다.
영화에서 가장 좋아하는 장면은 얼어붙은 찰스강 위에서 조엘과 클레멘타인이 사랑을 키워나가는 장면이다. 클레멘타인은 신나서 먼저 뛰어가다 넘어지고, 조엘은 얼음이 깨질까 봐 불안해한다. 두 사람이 누워있는 얼음 옆에는 큰 균열이 있다. 이것은 사랑에 대한 가장 시각적인 표현이라고 생각한다. 사랑을 시작함에 있어서 불안한 감정이 들었던 적이 있다. '혹시 이 사랑이 깨지지는 않을까?' 하는 생각 때문일 것이다. 이것은 얼음이 깨질까 봐 불안해하는 조엘의 심리와도 닮아 있다. 하지만, 다른 관점으로는 두 사람이 누워 있는 얼음에 그렇게 큰 금이 가 있음에도 얼음이 깨지지는 않는다는 점에서 진정한 사랑은 넘어지고 금이 갈 수는 있지만 깨지지는 않는다는 사실을 믿어도 좋다는 격려처럼 느껴지기도 하다.
조엘은 클레멘타인을 만나면서 자신의 이야기를 잘 꺼내지 않았다. 클레멘타인은 연인 사이에는 모든 일을 나눠야 한다고 생각하지만, 반대로 조엘은 그녀에게 자신의 어두운 부분이나 치부를 드러내지 않는 사람이다. 그렇기에 기억이 지워지는 상황에서 조엘은 그녀와 아무 상관도 없는 자신의 부끄러운 기억들에 그녀를 숨길 수 있었다.
영화 속에서 클레멘타인은 조엘이 자신의 모든 것을 이야기해 주길 원하는 장면이 있다. 그리고, 그러한 바람은 두 사람이 헤어지는 순간까지 이루어지지 못했다. 아마 조엘은 사랑하는 사람에게는 자신의 어두운 모습이나 부끄러운 부분을 보이고 싶지 않았을 것이다. 좋은 것만 보여주고 싶다는 마음에서 시작되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러한 사랑은 결국 실패하게 되었다.
조엘은 그녀와 함께하고 싶다는 마음에 자신의 부끄러운 기억에 그녀를 숨긴다. 다르게 표현하면, 그 순간 그녀에게 자신의 부끄러운 모습과 트라우마를 고백하였다고도 볼 수 있다. 그리고, 다시 클레멘타인을 만났을 때 조엘은 그녀에 대한 모든 단점과 앞으로 벌어질 안 좋은 상황들이 뻔히 보이는 상황에서도 그녀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며 가장 따뜻하고 처연한 눈빛으로 그녀에게 "Okay"라고 말한다.
영화는 사랑하는 사람의 안 좋은 부분을 없애려고 시간을 낭비하지 말라고 말하고 있다. 조엘은 처음에는 상대방이 없어지는 것을 막기 위해 뛰어다니지만 마지막에 가서는 그 순간 자체를 있는 그대로 즐긴다. 앞으로 그녀가 사라질지라도 지금 이 순간 그녀를 있는 그대로 사랑하겠다는 조엘의 모습은 사랑의 종착역처럼 느껴진다.
깨질 것 같지만 깨지지 않는 얼어붙은 찰스강 위에서
사랑하는 사람과 영원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