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토록 형편없는 위로의 끝에, 뭉뚱그려진 알록달록한 사랑
오래전 1917년 로빈슨 크루소는 무인도에 표류하다 기적적으로 살아남았고, 20세기 후반에 표류한 억척스러운 페덱스 직원 척은 4년에 달하는 시간을 무인도에 표류하다 생환한다. 인간은 사회적 동물이고 이들을 가장 고통스럽게 한 결핍은 식량이나 그 어떤 자원보다도 바로 사람의 온기였다. 구출과 복귀는 결말이 아닌 하나의 이벤트일 뿐, 이들을 기다리고 있는 것은 그 후로도 지속해서 추구해야 할 '인생', 그 자체였다.
'섬'은 작은 사회를 그려내거나 혼자만의 이야기를 그려내는 데에 매우 적합한 무대이다. 15 소년 표류기, 파리대왕 등 수많은 작품들이 섬에 표류한 소수의 인물을 통해 사회의 부조리함을 표현한 바 있으며 개인이 표류하는 작품도 그만큼 다양하고 많다. 바쁜 삶을 살아가고 남들과 부대끼느라 돌보지도 자각하지도 못한 개인의 심각한 문제, 내면세계를 들여다보는 데에도 섬은 유용하게 쓰인다. '우리의 깃발은 곧 죽음(Our flag means death)'의 시즌 2에서 한동안 정신을 잃었던 에드워드 티치의 정신세계를 보여준 것도 바로 호니골드와 함께 표류한 외딴섬이었다. 섬은 때로 작은 사회를, 때로 개인의 내면세계 그 자체를 표현하기도 한다. 공통점이라면 대부분의 등장인물들이 이 공간을 무척이나 벗어나고 싶어 한다는 것이며 그 주된 이유는 대체로 '낯설기 때문'이라는 점에 있다. 그래서 섬이라는 공간은 시간이 갈수록 익숙한 것이 된다. 사회의 일면으로 도망칠 수 있었던 과거와 달리 냉담한 현실로써 섬을 자각하고 받아들이는 과정이 곧 이러한 '표류기'의 주된 내용이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몇몇은 그곳에 그대로 남기도 하며 심지어 떠나온 뒤에 그리워하기도 한다. 섬은 작품에서 이제 막 까고 나온 아프락사스의 알껍질과 같은 존재이다. 벗어나야 할 성가신 틀, 장애물이기도 하지만 그 자체로 섬은 울타리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하나부터 열까지 모두 파악하고 있는 생태계라면 지루함과 비례할 만큼 안정감을 지니고 있을 것이 분명하니까. 그것이 섬에 머무는 자들 일부를 게을러 보이게 만들지만 사실 작품 대부분에서 말하는 것은 '삶을 지속하는 것의 소중함'이며 그들은 이미 생존하고 존재하는 것만으로도 하루하루를 이겨나가고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섬은 그 자체로 그들 자신이 되며 때로 감옥이 되기도, 두 사람만을 위한 사랑의 공간이 되기도 했다.
그래서 영화 초반부에 낯부끄러운 콧노래를 기어코 이어 불러가며 자신의 혁대를 애써 목에 두르고 있던 행크를 보는 것은 그리 놀라운 일이 아니다. 추레한 차림새와 평화로운 파도의 파열음이 이미 그의 표류 상태를 짐작하게 했고 그 외딴 공간에서 더 이상 나갈 방법이 없자 자신의 목숨을 끊어내려는 행동을 하는 것은 지극히 정상적으로 보인다. 적어도 그가 부딪히는 파도의 틈새에 실려온 시신을 볼 때까지는 그러하다.
영화는 이 시신의 등장을 무척이나 담담하게 그려내고 있는데, 보통 시신의 등장은 극에서 매우 심각한 장면에 사용된다. 하물며 액션 영화에서도 시신의 사망 장면이나 등장 장면은 극단적인데, 이 시신은 마치 깃발이 바람에 휘날리듯이 자연스럽게 파도를 통해 밀려온다. 그것이 마침 목을 매려 하는 행크의 눈에 띈 것이고, 그는 마치 홀린 듯이 발을 굴러보지만 자신의 마지막 준비를 철저히 해둔 탓에 순간적으로 혁대에 목이 메고 만다. 발버둥 치는 한 남자와 파도에 온몸을 맡긴 채 해변가에 평화롭게 누워 있는 남자, 이렇게 두 남자의 만남이 시작되었다.
기적이라면 행크가 준비해 둔 혁대가 무척 낡아있다는 점일 것이다. 그는 그 무엇보다 반갑다는 듯 그 시신에 다가간다. 시신이라는 걸 알아보는 데에는 그리 긴 시간이 걸리지 않는다. 남자는 파도에 떠밀려오는 그 순간부터 눈에 띄게 창백했다. 다가선 행크가 그의 몸 이곳저곳을 건드리고 여전히 떠 있는 그의 눈을 바라보는데도 아무런 미동이 없다. 물론 오랜 시간 호흡을 하지 못한 상태라면 그럴 수도 있을 테지만 누가 봐도 그 자는 이미 세상을 등진 사람임에 분명해 보인다. 말끔한 정장 차림에 빛을 잃은 눈동자. 행크는 그 자가 죽었다는 것을 알고 나서는 이내 빠르게 관심을 잃는다. 다시금 전에 하려던 일정으로 돌아가려던 그에게 이 시신은 놀라운 것을 하나 보여준다. 아니 어쩌면 그건 좀 다르게 표현할 수도 있겠다. 시신의 사후에 부패로 인해 내부에 생성된 가스가 신체 외부로 유출되는 과정을 보게 된 것이다. 그러나 이런 말들을 쓰지 않고 간단히 표현하자면 '방귀'이며, 이는 파도에 수없이 불어나는 거품으로, 지독할 만큼 큰 소리로, 마치 살아있듯이 경련하는 시신의 모습 그 자체로 행크를 자꾸만 건드린다. 대답도 시선도 그 어느 인간적인 사회적 제스처도 없었지만 섬의 그 어느 것보다 그에게 열렬히 화답하는 시신에게 다가간 행크는 그렇게 그의 무한동력 방귀를 타고 이 섬을 벗어나기로 한다. 모터를 단 듯이 신나게 앞으로 나아가는 시신과 그 시신을 올라탄 행크의 모습을 시작으로 이 영화는 막을 올린다.
바닷물이 둘을 지치게 만들고 다시금 모래의 쓴 맛을 봐야 했지만 결국 그들은 다시 뭍을 디딜 수 있었다. 자신을 다른 곳까지 데려와 준 시신이 고맙고 자신 외의 인간이라는 존재 그 자체에 반가워서 행크는 기어코 그 시신을 데려다 자신이 임시로 머물 동굴까지 데려온다. 외로움에 하나둘씩 말을 걸어보고, 그 다음날 아침까지도 끝나지 않는 행크의 수다를 참다못한 듯 시신이 힘겹게 몸을 들썩이며 그에게 말을 걸기 시작한다. 이상하게도 행크와 함께하는 이 시신은 마치 살아있는 것처럼 하나둘 자신을 움직여가며 그에게 응답하려 노력한다. 기억을 잃은 것인지 아니면 시신이라는 존재로 다시 태어나서 그런지 모르지만 이 시신이라는 것에는 어떠한 사회적 개념도, 생각도 없다. 그나마 다행이라면 제대로 말을 할 수 있다는 정도일까. 6살 아이처럼 귀찮을 정도로 그에게 많은 것을 물어보지만 행크는 그 질문들이 싫지 않다. 매니. 그의 이름은 매니이다. 행크 자신이 지어준 것인지 시신이 스스로 알아서 말을 꺼낸 것인지는 모르지만 아무튼 그 자의 이름은 매니다. 앞으로도 해야 할 이야기가 무척 많으니 둘 사이에는 적어도 그런 약속 하나 정도는 필요했을 거다. 기껏해야 '나'와 '너'뿐이지만 그래도 그 이름을 불러줘야 함께 한다는 것을 마음으로 느끼는 것이 사람이니까. 스스로의 정신이 어떻게 된다는 건 생각하고 싶지 않을 정도로 행크는 매니와 수많은 이야기를 하게 된다. 그러면서 매니는 무척이나 그에게 유용하게 사용된다. 단순히 그의 이야기를 듣고, 말동무가 되는 것뿐 아니라 입을 통해 나오는 물은 식수로, 손 끝에 튕기는 경직된 손가락들은 부싯돌처럼 불꽃을 낸다. 행크의 두 눈에 환희의 불꽃이 인다. 희망이라는 신호가 그의 5% 남은 핸드폰 잔량 배터리를 무척 넉넉하게 보이도록 만든다.
새로운 뭍에 도달했다는 것, 매니라는 든든한 친구가 생긴 덕에 행크는 다시금 문명을 찾아 생환하는 희망을 품기 시작한다. 그들의 여행은 자연에서 점점 더 사회적 문명이 닿은 물건들이 보이는 후반부까지 이어지며 그들의 모험을 더 다채롭게 한다. 숲 속에서, 행크는 더 이상 외롭지 않다. 그가 매니에게 알려주는 여러 가지 아름답고 간지러운 사회적인 교류들은 사람들이 버린 쓰레기 더미들을 사용해 만들어졌음에도 무척이나 아름답고 아기자기하게 그려진다. 행크의 핸드폰 바탕화면에 있는 여성의 사진을 통해 매니는 '사랑'에 대해 관심이 생기게 된다. 분명 그의 드림걸에 가까운 여자이지만 행크는 낯부끄러워하면서도 매니에게 그녀에 대해, 사랑에 대해 이야기해 주기 시작한다. 마치 스위스 나이프처럼 유용한 매니의 요구에 한창 들떠 이것저것 만들고 있던 행크는 그에게 사랑에 대해서도 실습으로 알려주고자 한다.
한낮의 버스, 한산한 시간대에 버스에 오르는 그녀는 분명 빛이 날 만큼 아름답다. 그녀의 대걸레로 만들어진 머리도, 버려진 비닐로 만들어진 노란 원피스, 무엇보다 그녀의 그 눈동자 - 그녀 또한 자신처럼 고독을 지닌 사람임에 분명해 보인다. 창가에 앉은 그녀를 잠시 바라보며 버스의 공기는 순식간에 온화해진다. 실을 꼬아 만든 이어폰을 끼우고 긴장에 가득 찬 매니는 그녀에게 말을 건네보고 싶어 하지만 그게 쉽지가 않다. 이제껏 그토록 여러 이야기를 행크에게 해댔는데 이 여자에게는 어째서 그런 것들을 풀어내기가 이토록 어려운 걸까. 다행히 그녀의 미소는 호감을 품고 있다. 자신이 호감을 품은 여자 '사라'를 연기하는 행크는 그녀를 머리에 떠올리며 어떻게든 분위기를 이어가려 노력하지만 사실상 매니의 앞에 있는 것은 사라로 분해 있는 그 모습 그대로의 행크이다. 이 유치한 소꿉놀이에 기꺼이 동참하여 그녀와 사랑을 키워가는 매니는 전보다 더 강력한 모습을 보여줘서 행크를 놀라게 한다. 사랑은 사람을 강하게 만들어주기도 하니까.
그러나 이 우스꽝스러운 소꿉장난이 하나 둘 더 늘어나면서 매니와 행크는 미묘한 사이가 된다. 어색한 인사, 그 이후 이어지는 즐거운 식사 시간, 영화 감상 등 영락없는 데이트를 이어가면서 매니는 점점 더 사라에 대한 것들을 궁금해하게 된다. 일반적인 데이트에서 나올법한 식상한 대화내용이야 이미 나올 만큼 나온 상태. 대화보다는 서로를 더 지긋이 바라보는 시간이 많아진 둘 사이에서 매니는 늘 그렇듯 철없는 헛소리를 해대지만 행크는 그 말을 듣는 게 그리 싫지는 않다. 미묘한 분위기가 둘 사이를 감쌀 때 즈음 타이밍 좋게도 불쑥 현실이 그들 사이에 끼어든다. 그들이 있는 곳은 쓰레기 더미가 가득 들어차 있는 숲 속 한가운데이며, 여전히 표류 중이다. 그들의 데이트가 그러했던 대로 상투적인 이별의 인사를 건네며 둘은 다음 날 아침의 기약 아래 한 밤중으로 자신들의 감정을 흘려보낸다.
그러나 그 다음날, 유난히 녹슨 파이프 위의 그들을 다시금 감정에 빠트린 것도 그 잔혹한 현실이었다. 이제는 버리고 떠날 수도 없는 사이가 되어버린 그들이 깊은 강물에 침전한 순간, 모든 것이 다시금 어처구니없을 정도로 환상이 되어버린다. 이미 죽은 시신인 매니는 물속에서 숨을 쉴 필요가 없다. 단지 행크의 머릿속 매니가 더 이상 말없이 시체처럼 물속에 축 늘어진 게 그를 패닉에 빠트렸을 뿐이다. 첫 만남에서 당황 속에 그러했던 것처럼 행크는 다시금 매니의 입술에 자신의 숨을 불어넣는다. 시신과 함께 강물에 빠지든, 스스로 홀로 빠져나오든 아니면 차라리 애초부터 그 비좁은 파이프 위를 걸어가는 건 혼자만으로 충분했을 텐데도 행크는 그렇게 한다. 이미 그의 머릿속에 있는 건 그런 이해타산적인 현실이 아니다. 혼자였던 그를 가득 채우던, 상상밖에 없던 그의 '사라'를 하루 종일 궁금해하던, 누추하고도 냄새나고 더러운데도 그 안에서 끝없이 웃으며 저녁의 끝자락에 그와 미묘한 순간을 공유했던 매니가 있을 뿐이다. 그래서 그는 그렇게 한다. 순간의 미묘한 감정들만을 골라 '사라'가 되어 행크는 매니의 입술에 입을 맞춘다. '살아라'는 게 아니라 '사랑한다'라고 말하며 그렇게 시작한다. 어디 매니가 그런 걸 거부하는 남자였던가. 그는 늘 그가 행크에게 보여왔던 대로 놀라운 힘을 발휘해 깊은 강물에서 한 순간에 행크와 함께 튀어 오른다. 가장 힘차고 누군가에게는 가장 볼썽사나운 모습으로. 영화는 이 장면을 멋들어지게 슬로모션으로 보여준다. 참 미묘한 부분이다. 슬로모션은 정말 우스꽝스러운 장면을 강조하기 위해서도 사용되지만 감동적인 모습을 오래 보여주기 위해서도 사용된다.
더욱 수다스러워진 매니와 그런 그가 미울 수 없어진 남자 행크는 그렇게 다시금 모험을 재개한다. 핸드폰의 바탕화면 속, 그녀의 얼굴 위 배터리는 점점 더 닳아가지만 어째서인지 희망은 좀처럼 그를 떠나지 않는다. 매니와 함께라면 장작불을 태우는 것도, 물속을 재빠르게 지나가는 물고기를 잡는 것도, 심지어 돌을 포탄처럼 쏘아 사슴을 사냥하는 것도 전혀 어렵지가 않다. 그런 풍요로움 속에 취한 것처럼 행크는 그 시간 속에 빠져든다. 그에게는 부족한 것이 없었다. 심지어 그들이 그렇게 지내게 할 궁극적인 목표조차도 부족하지 않았다. '표류'란 그들을 위해 마련된 안전한 무대였고 '생환'은 언젠가 그들이 거쳐가야 할 멋진 목적지일 뿐이었다. 매일 아침이 되면 시작하는 또 다른 한 걸음. 매니와의 이야기, 그의 수없는 도움, 사라와의 사랑 이야기, 미묘한 순간, 짙어지는 관계에의 안정감... 어떻게 보자면 그렇게도 말할 수 있겠다. 이 가혹한 현실조차 그들은 단지 이용했을 뿐이며 이 순간 자체는 그들에게 완전한 것일 뿐이었다고.
그러던 것이 문명에 점점 더 가까워지며 변하게 된다. 애초에 그들을 덮치던 곰이야말로 문명과 동떨어진 것 중 하나였을 테지만 현실을 일깨우는 데에는 더없이 좋은 소재였을 것이다. 이제까지 자신들이 멋대로 만지고 뜯고 망가뜨리던 자연에서 스스로의 의지를 지니고 다가와 행크의 다리를 물고, 매니를 물어뜯은 존재란 실로 자연의 두려움을 깨우치게 하기 충분하다. 그럼에도 고통에 몸부림치던 행크를 끝까지 도와 곰을 도망치게 만든 것 역시 매니였다. 언젠가 만나게 될 '사라'라는 존재를 되새기며 매니의 희망을 바라보는 행크는 쓴 미소를 짓는다. 도달하는 목적지가 멀수록 같은 희망을 흉내 낼 수 있지만 이제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 매니가 꾸는 꿈을 깨트리는 것은 행크에게 그다지 달갑지 않은 것이다. 차라리 그토록 오래 표류가 유지된다면 좋겠지만... 그들이 쌓아온 관계와 꿈이란 그다음 컷에서 한 순간에 정상적이지 않은 것이 되어버린다. 예상보다 너무나 가까웠던 주택가. 그리고 그런 그들을 위험한 사람처럼 바라보는 한 '여자'. 그녀의 모습은 영락없이 행크의 핸드폰 화면을 장식했던, 두 사람의 꿈속의 그녀이다. 그러나 그녀는 행크를 알아보지 못한다. 매니를 제외하고 시청자들마저 모두 알고 있었던 씁쓸한 진실이 담담하고 단단하게 부딪혀온다. 쓰레기더미를 가지고 옷을 만들어가며 멍청한 짓을 하거나 시신에게 말을 걸고 시신의 입에서 나오는 물을 마시는 것보다 더 고통스러운 순간이 찾아온다. 이런 직각으로 만들어진 세계에서 멀쩡하게 생긴 사람의 따가운 시선을 받아내는 것은 무척이나 고통스러운 일이다.
그래서 행크는 빠르게 매니를 만나기 전의 자신으로 돌아간다. 사라의 차가운 행동을 마주한 이후로 매니는 더 이상 응답이 없다. 그를 처음 만났을 때처럼, 너무나 차갑고 너무나 어둡고 너무나 죽은 것만 같다. 그게 너무나 익숙해서 행크는 오히려 낯설 정도다. 귀찮아 보이는 구조대원과 그의 어깨에 둘러진 얇은 담요가 그를 부끄럽게 만든다. 행크의 아버지는 황망한 얼굴로 찾아왔음에도 차마 아들의 시신을 확인조차 하지 못한다. 와중에 자신의 핸드폰에 멋대로 저장한 사라의 얼굴이 발각되어 매니는 더한 오해를 받을 상황에 처했다. 그토록 무정하게 매니를 버려둔 채 행크가 아닌 매니의 신분으로 인터뷰를 하려던 그를 누르는 것은 모두 그를 따갑게 만든 이 '현실'뿐이다. 먹고살고 체제를 갖추고 버스를 타고 언젠가 또 이런 사라와 같은 여자를 만날지 모를 이 사회란 것이, 현실이라는 것이 행크에게 준 것은 결국 고독과 슬픔뿐이었다. 그토록 아름답고 찬란했던 표류의 생활이 그리워진 행크는 자신의 신분을 밝히고 수습된 매니를 그대로 끌고 다시 바닷가로 향한다.
이 시점에서 우리는 다양한 걸 알 수 있는데, 애초에 이들이 처음 당도했던 뭍에서 문명은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자리하고 있었다는 점이다. 행크와 매니는 고작해야 몇 분만에 바닷가에 도착하며, 그들을 쫓는 경찰들이 그들이 표류를 하며 가지고 논 쓰레기 더미들을 발견하는 장면은 가히 압권이다. 마치 연쇄살인을 저지르며 소꿉놀이라도 저지른 정신병자의 소굴을 바라보듯이 경찰들은 그들의 - 어쩌면 행크 본인의 - 작품을 소름 끼친다는 시선으로 훑기 바쁘다. 그러나 행크는 그런 것들 하나하나에 두려워하고 아파할 시간이 없다. 더 이상 대답이 없는 매니를 이끌고 다시 그들의 세상으로 돌아가는 것이 중요할 뿐이다. 아니, 차라리 자신이 안 된다면 매니 혼자라도... 애초 무릎에 생긴 타박상으로 사인이 [자살]로 추정되는 매니 - 애초에 그의 신원을 알 수도 없는 노릇이지만 - 그라도 자유를 찾아 나가길 바라며 행크는 미안함과 고마움, 그리움을 담아 기어코 그를 데리고 바닷가에 당도했다. 기어코 이 부끄럽고 수치스럽고 모멸감이 드는 순간이 찾아오고야 말았다. 행크 그 자신이 짝사랑했던 사라, 그리고 자신의 아버지, 사라의 아이와 남편, 그리고 자신이 저지른 것들을 이해할 수 없다는 듯 바라보는 몇몇의 경관들까지... 그러나 행크는 더 이상 물러나지 않는다. 그는 시신백에 든 매니를 꺼내 들고 그에게 계속해서 속삭인다.
"우릴 이상하게 여겨도 아무 상관없어. 제발..."
결국 경찰은 그에게 수갑을 채워 일으키고, 자리를 떠나는 그의 뒤에서 기적처럼 한 소리가 들려온다.
그 소리는 너무나 더럽고 멍청하고 짜증이 나는 방귀 소리이지만 행크의 머릿속에서는 더 없는 반가움으로 들려온다. 매니는 늘 그렇게 대답했다. 이해가 느리고 행동이 굼떴지만 늘 그렇듯 행크의 말에 응답하려 애써왔으니까. 행크는 기쁜 얼굴로 그를 바라본다. 이해할 수 없다는 얼굴로 그들을 바라보던 사람들의 얼굴이 더욱 일그러진다. 이들의 눈에 시신에서 나오는 그 '방귀'란 - 좀 더 상세하게 이야기해 보자면 시신의 사후에 부패로 인해 내부에 생성된 가스가 신체 외부로 유출되는 과정을 보게 된 것이니까. 환상적인 이야기 뒤에 행크는 결국 경찰에게 붙잡혀 그 자리에 남고 말았지만 매니는 다시금 새로운 모험을 떠나기 위한 준비를 시작한다. 이해할 수 없는 그 현상에 사람들은 처음에 의아함으로, 짜증으로 일관하지만 기어코 매니가 자신의 방귀를 이용해 바다의 저 멀리까지 튕겨 쳐나가자 놀라움을 금치 못한다. 마치 동화와도 같은 그 이별의 끝에 행크는 밝은 얼굴로 해안선을 쓸고 지나가는 매니를 바라본다. 영화는 행크가 바라는 - 어쩌면 진짜일지 모를 미소 짓는 매니의 얼굴을 비춘다.
살고 죽는 것은 다르게 표현할 수도 있다. 의미가 아주 통하지는 않지만 쓸모에 빗대어 보면 이렇게도 말할 수 있다. 쓸모가 '있다'와 '없다'로. 이 영화는 보통 쓸모가 없는 것들의 향연이다. 이미 표류단계에서 사회에 버려진 행크도 그러하고 목숨을 잃은 채 해안에 떠내려온 매니가 그러하다. 그렇게 버려진 행크는 매니를 만나 다시 살아난다. 매니가 행크를 만나 - 어쩌면 행크의 안에서 - 다시 살아났듯이. 바다는 마치 무대처럼 그들의 질주를 받아준다. 어처구니없는 시작의 중심을 장식하는 것은 역시 다른 사람들로 인해 무참히 버려진 수없이 다양하고 알록달록하고 냄새나고 더러운 쓰레기들이다. 이것들이 역시 버려진 그들에 의해 아름답게 다시 태어난다. 흥미로운 부분은 바로 이것이다. 그들이 다시 살아난 중심에는 '쓸모'가 아닌 '의미'가 존재한다는 것이다. 아무도 그 분리용 비닐봉지를 행크가 사라로 여장을 하는 데에 쓰라고 만들지 않았다. 붉은색 색소나 마대자루 솔도 마찬가지이며 아마 행크가 매니를 데리고 온 것도 그러했을 것이다. 자신이 사랑할 수 있는, 자신이 대할 수 있는 친구로 여기고 데려온 것이 아니다. 비록 '쓸모가 있어서'시작한 동행이었지만 그 끝은 자신의 쓸모조차 내버리며 돕고 싶은 '의미가 있는 관계'가 된다. 그 생전의 모습이란 어떤 절망감에 가득 찬 인생일지 몰라도 그 때문에 매니의 죽음은 드디어 의미를 부여받는다. 그의 삶이 그 스스로 내리는 무쓸모에 대한 결정이었다면 그의 죽음은 행크로 인해 다시 피어나는 의미의 여정이었다. 비로소 죽음으로서 그는 행크에게 다가갈 수 있었고 그를 그토록 용기 있게 만들 수도 있었다. 가장 두렵고, 낯설고, 버려져 다가가고 싶지 않은 존재. 하지만 그것을 구분하는 것은 결국 '의미'가 아니던가. 행크와 매니가 서로에게 그러했던 것처럼 말이다.
그래서 이것은 무척이나 낯설고 서툴고 엉망이지만 동시에 그렇기에 너무나도 따뜻하고, 아늑하고 안쓰러운 위로이다. 영화에서 특히 물은 그들이 앞으로 나아가는 힘을 주기도 하지만 그들을 위기에 빠트리기도 한다. 사실 대부분의 물건들이 그러하다. 사라라는 존재조차 그러하다. 그녀는 그들이 표류할 때에는 그들을 이끄는 가장 강력한 힘이었음에도 그들이 실제 맞닥뜨렸을 때에는 그들을 가장 큰 절망에 빠트리는 존재이기도 했다. 어디 그들뿐인가. 어디 방귀나 유출이나 죽음이나 삶이나 행크나 매니나 그들을 구출하러 온 구출대원이나 경찰이나 하물며 그들이 멋대로 사냥한 사슴이나 물고기, 그가 머리를 장식하는 데 쓴 쓰레기조차 의미를 가지게 되는 순간 달라진다. 얼마든지 고귀하고 소중하고 쓸모없고 덧없어진다. 그래서 그것을 아끼게 되는 순간, 사랑하게 되는 순간 그것은 한없이 빛이 나게 된다. 엉망으로 망가진 바닥의 저변에서 마주친 것들이 한없이 사랑스러울 수 있는 이유는 그러한 것이다. 바닥의 저변이란, 사회의 수치란 따가움이란 안에 만들고 있는 안에 숨기고 있는 존재의 의미를 가지는 순간 아무것도 아니게 된다. 그래서 지평선을 가르고 힘차게 나아가는 매니를 향해 아무도 뭐라 할 수 없게 된다. 세상의 이치란 보통 사람이 만들어 둔 체계에서는 '쓸모'에 의해 결정되지만 그것을 마음에 받아들이는 것은 결국 그것들이 가진 '의미'이기 때문이다.
늘 우리의 마음에는 그런 지평선을 가로지르는 매니가 있을 것이다. 그토록 남에게 숨기며 보일 수 없을 만큼 당신의 사랑스러운 구석은 어떤 점인가? 사회에 대놓고 보여줄 수는 없겠지만 그것이 당신의 결점이라면 그 또한 당신의 사랑스러움이다. 어딘가에 붙으면 달라지고 새롭고 다채로워진다. 가장 어처구니없는 행동을 할 때마다 무려 버스점프라는 엄청난 걸 할 수 있었던 에브리씽 에브리웨어 올 엣 원스(Everything Everywhere all at once)라는 영화를 아는가. 누군가는 그렇게 말한다. '아무도 하지 않은 것이라면 그것이 정상을 벗어나기 때문이며 이미 누가 한 것이라면 식상하다'라고. 하지만 이는 그렇게 말하는 듯도 하다. '아무도 하지 않은 것이라면 그것은 매우 특별하며, 이미 누가 한 것이라면 혼자가 아니기 때문에 위로받을 수 있는 것이다'라고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