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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오리맘 Dec 28. 2021

내 글쓰기는 발전하고 있다고 믿고 있다

일기 쓰기와 에세이 쓰기의 차이점

최근에 글쓰기 수업을 들으면서 느끼는 점은, 이전에는 내 글쓰기가 거의 일기 쓰기 정도에만 머물러 있었다는 것이다. 나는 초등학교 때부터 일기 쓰는 시간을 제일 좋아했고, 중고등학교 이후에는 어딘가에 내야 하는 일기가 없었는데도 제일 예쁜 노트를 사서 일기를 썼다.

초등학교 때는 선생님에게 칭찬을 받기 위해서 썼지만, 그 이후로는 ‘나에게’ 보여주는 일기 쓰기를 했다. 나는 글을 쓰는 나를 보면서, 나는 나에게 보여주고 싶은 것이 있구나, 믿었던 것 같다. 예컨대 감정이라는 것은 흘러가는 것이고, 그것을 한 시절 안에 잡아 두기 위해서 친구 관계의 우정이라는 것도, 연애라는 것도, 모든 사랑이라는 것도 한다고 생각하면서, 쓰지 않으면 모든 것들이 흔적도 없이 사라질 것이라고 믿었던 것 같다. 그런 것이 쓰는 이유가 되었다.

스물두 살에 대학을 뛰쳐나오고 갈 곳이 없었을 때, 스물세 살 엄마의 그늘을 벗어나 혼자 살겠다고 독립 선언을 했을 때, 돈이 없어서 저축은행에서 대출을 받은 돈으로 원룸을 구하고, 매달 악착같이 벌면서 한 끼에 이천 원 하는 밥만 먹어야 했을 때도, 역시 삶이란 마치 감정처럼 한 치 앞을 알 수 없는 것이고, 나는 언제 죽을지 모른다고, 언제 죽어도 이상하지 않다고 생각했다. 별다른 삶의 희망이랄 것은 없었고, 글쓰기는 꿈이라기보다 내가 죽을 때를 대비해서 남기는 유언장 같은 존재였다. 블로그에 비공개로 써놓은 글들도, 내가 이러다 죽으면 누군가가 언젠가는 내 글들을 발견해서 세상에 보여줄 수도 있겠지 생각했다. 적어도 엄마나 언니는 내가 생전에 썼던 글을 발견하기를 믿으면서, 글을 썼다.

그런 시절의 나는, 새벽까지 안 자고 글을 쓰다가, 글이 조금 안 써진다 싶으면 담배를 피우고, 그리고 나면 또 글을 쓰고, 심심하면 애인과 아침이 될 때까지 통화를 하고 거의 시체가 되어서 일을 하러 가는 식으로, 나 자신을 궁지에 몰아가면서, 거의 스스로를 학대하듯이 생활했던 것 같다. 모든 옷에 담배 냄새가 묻는 것이, 가끔 목이 따가울 만큼 아픈 것이 지긋지긋하게 싫으면서도, 담배를 피우지 않으면 내가 아무것도 하지 않는 느낌이 들 때가 있어서, 습관적으로 담배 한 갑과 라이터는 주머니에 들어있어야 했다.

그 시절의 나는 나이 든 남자를 보면, 꼭 우리 아빠나 새아빠를 생각했다. 나에게 칼을 들었던 남자들. 칼로 나를 찌르지는 않았지만, 내가 앉아 있던 소파를 찌르거나, 나를 꼭 찌르고 말 거라고 협박했던 남자들 말이다. 스물아홉이 되어서 만난 상담 선생님은 어떻게 남자 보호자 두 명이 모두 화가 난다고 해서 칼을 드는 사람들일 수 있었냐며, 내 지난 인생에 대해서 참 별일을 다 겪었다는 식으로 말을 했다. 그러나 그때의 나는 인생이란 누구에게나 이렇게 힘든 것이고, 세상은 슬프고, 별다른 희망이 없고, 다만 기형도 같은 시인이 죽기 직전에 쓴 시 같은 것이 삶의 고통을 그나마 끌어안게 해 주는 것이라고 믿으면서, 나도 '그런 사람'이 되기를 꿈꿨다.

'그런 사람'이 되기를 꿈꾸는 것이 죽음에 관련한 것이었는지, 쓺 그 자체에 관련한 것이었는지는 모르겠다. 다만 나는 언젠가 내가 죽을 것이라는 사실과 그래서 써야겠다는 사실에 심각할 정도로 집착하고 있었던 것 같다.

그 후로 지금의 남편을 만나고, 둘만의 미래를 계획하면서, 내 말이면 무조건 믿어 주고 응원해 주는, 나도 못 믿는 나를 대신 믿어 주고 대신 사랑해 주는, 그래서 나까지 나를 사랑할 수밖에 없게 만드는 지금의 남편을 만나면서 우리 둘이 함께 살면 살 수도 있겠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고, 남편을 만나고 이 년이 지나고 있는 지금에 와서는, 드디어 나 자신에 대한 생각을 한다. 그리고 여전히 그것은, 글쓰기를 통해서이다.

요즘 내가 하고 싶은 글쓰기는, 누군가에게 보여줄 수 있는 글쓰기다. 내 안에만 머물러 있지 않고, 나와 다른 사람들에게도 읽히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지를 고민하는 글쓰기이다. 우리 딸 해월이도 자라서 글을 읽을 수 있게 될 테니까, 해월이에게 부끄럽지 않을 수 있는 글을 세상에 남기고 싶은 느낌이라고 할까.

딸을 낳아서 가능한 건지, 다만 내가 어떤 시절을 건넜기 때문에 그런 건지는 모르겠다. 분명한 것은 글쓰기가 나에게 어떤 도구가 되어주고 있고, 내 삶이 변했을 때에, 글을 쓰는 방식이 변했다는 것이다. 그리고 좋은 시기에 좋은 모임을 만날 수 있다는 사실에도 감사하면서, 글과 삶은 참 닮아있구나, 생각한다. 어쩌면 어떻게 살고 싶다고 미리 생각하지 않아도, 그렇게 쓰는 것으로 그렇게 살 수 있는 거겠다는 생각도 한다. 생각해 보면 언제나 쓰는 일은 밀고 나가는 느낌이었기 때문이다. 아주 거대한, 보이지 않는 무언가를, 묵직한 무언가를 밀고 나가다 보면, 끝에 도착해 있었다.

소녀였던 내가 느꼈던 두려운 감정을 여전히 기억한다. 그래도, 죽어서 무언가를 보여주기보다는, 살아서 보여주고 싶다는 생각을 한다. 처음부터 남을 의식하고 쓰는 글이란, 더 이상 일기 쓰기가 아닐 수도 있을 것이다. 그렇게 내 글쓰기는 발전하고 있다고 믿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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