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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오리맘 Oct 24. 2021

글이 계절처럼 튀어나오는 경지

지난번에 엄마에 대한 글을 쓰면서는 신기한 경험을 했다. 보통 내가 하나의 글을 완성하기 위해서 거치는 단계가 있다. 초고를 쓰고, 조금 묵혀 뒀다가 수정한 후에, 다시 조금 묵혀 뒀다가 수정하고를 반복하는 편이다. '묵히는' 기간은 짧게는 몇 시간에서 길면 몇 주, 몇 달이 되기도 한다. 묵히는 시간을 두는 이유는 글에서 어디를 고쳐야 할지 판단하기 위해서다.

글을 써낸 직후에는 글과 내 자아라는 것이 너무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는 것 같다. 심할 때는 글이 나 자체라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그래서 글의 어느 부분을 고치는 편이 더 잘 읽힐 것 같다든가, 이것은 별로 필요가 없는 문장이라든가 같은 것을 잘 판단하지 못한다. 그냥 모든 문장이 내가 썼고, 감정을 부어냈다는 이유만으로, 내가 살아낸 삶이라는 이유만으로 가치가 있는 것 같이 느껴지곤 한다.

그런데 엄마에 대한 글, 우리 아빠가 아주 오랜 옛날에 바람을 피웠고 그래서 내가 어떤 시간을 보냈는지에 대한 글을 쓰는 동안에 나는 거의 쉬는 시간 없이 계속 글만 썼다. 이 주 정도를 그 글만 붙잡고 있었던 것 같은데, 정말 잠을 자고, 밥을 먹는 시간을 제외하면 글만 썼던 것 같다. 그럴 수 있었던 이유는, 내가 완성하고 싶은 하나의 조각품이 이미 내 머릿속에 있었고, 나는 어떻게든 그걸 언어화해서 글로 만들어내기만 하면 되었다. 그런 상황에서 묵힐 시간이라는 것은 필요하지 않았다.

그렇게 하나의 글을 완성하고 나서 나는 굉장히 뿌듯했던 것 같다. 정말 오랜 시간의 기억을 거슬러서 써낸 글이기도 했고, 거의 내 인생 전체를 놓고 나를 제일 괴롭혔던 일에 관해서 끝끝내 써낸 느낌이었다. 삶의 승리자가 된 것 같은 기분에 조금은 도취됐던 것 같다. 또 사람들이 글을 읽고 좋다고 말해 주고, 감동을 받았다면서 자기의 이야기를 댓글에다가 풀어놓고 갈 때는 정말 베스트셀러 작가가 되면 이런 기분일까, 싶기도 했다.

이제 나는 그런 글을 지나서, 매일 벌어지는 일들에 대해서 써야 한다고 느끼고 있다. 더 이상 엄마나 아빠에 관한 사건에 관해서는 써야 할 이야기가 없다고 느껴지기도 한다. 그 글 한 편으로 내 모든 감정과 이야기가 수렴되는 것은 아니겠지만, 너무 오랫동안 생각해왔던 그 문제와 사건에 대해서, 이제 조금은 쉬고 싶다는 생각이 든다.

이것이 나에게 주는 의미란, 어쩌면 '묵히는' 시간이 필요한 글쓰기로 돌아가는 것이다. 묵히는 시간이 필요하다는 것은 글에 대해서 곧바로 알아차리지 못하고 시간을 들여야 할 만큼, 마음과 글쓰기가 찰싹 달라붙어 있다는 이야기가 된다. 감정형 인간이라 그런지, 매일 나에게 닥치는 사건들과 나를 분리해내려면, 또 어느 정도의 시간이 걸릴 것이다.

그런데 신기한 것은, 그런 글쓰기를 하다 보니, 가끔 어떤 글은 한 번에 나온다. 이삼십 분 동안 쓰면 깔끔하게 떨어지는 한 편의 글이 완성된다고 느낄 때가 요즘에는 더러 있어서, 이렇게 글을 쓰는 것도 가능하구나, 하고 신기해하고 있다. 사실상 그렇게 글을 쓰고 나면 머리를 많이 썼다기보다도 무의식적으로 손이 움직였다고 느끼곤 하는데, 나는 어쩌면 '글을 묵히는' 시간, 즉 내 생각에 대해서 고민하고 성찰하는 시간이, 항상 나를 무의식으로 가까이 보내주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결과물이라는 것이 꼭 내가 예상한 지점에서만 나오는 것이 아니라는 점이, 오늘 몇 시간을 고민한 것이 아무 성과도 없이 흘러가서 영영 어딘가로 흡수되는 것 같다가도, 내일이면 나도 모르는 어느 구멍으로 튀어나오는 것이 재미있다. 이제는 세상 일이라는 게 그렇게 내 예상과 다르게 이루어진다는 것을, 내가 모르는 것이 이렇게나 많다는 사실을 더 깊이 받아들일 때가 아닌가, 그런 기회가 오지 않았나, 생각한다.

매일의 글쓰기가 나에게 좋은 마중물이 되면 좋겠다고 생각하면서, 그렇게 글을 쓰고 싶다. 나에게 찾아온 기회를 받아들이면서, 과거를 충실히 문장으로 바꾸면서, 미래의 가능성 앞에 언어라는 도구를 버린 채 원시인처럼 달려들면서. 내가 있고, 내가 쓴 문장이 있다면, 동그랗게 눈덩이처럼 뭉쳐 세상을 데굴데굴 구르고 싶다고 생각한다. 그렇게 살아가다 보면 글이 계절처럼 튀어나오는 경지에 다다를지도 모르는 일이니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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