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연애가 지겨워서 결혼했다. 열아홉 즈음부터 쉴 새 없었던 연애, 헤어짐, 상처... 스물일곱 즈음에는 참 좋아하는 남자친구를 만났었는데, 스물여덟에 헤어지고는 다시는 이렇게 좋아하는 사람을 못 만날 것 같았다. 너무 ‘사랑’에만 치우치다가, 젊은 나이를 잃어버릴까 두렵기도 했던 것 같다. 스물여덟에 지금의 남편을 만났다.
신혼부부 청약을 꼭 넣어야겠다는 남편의 설득으로, 결혼식은 날짜만 잡아 놓고 혼인신고부터 했다. 연애를 시작하고 꼭 두 달 만이었다. 이십 대 초중반에 만났던 남자친구들은 소위 ‘결혼할 준비’가 안 된 사람들이었다. 집 없고, 안정적인 소득 없고, 재테크할 줄 모르는.
아무리 좋아하는 마음이 넘쳤어도, 결혼을 하기에는 쉽지 않았다. "결혼하고 싶어"라는 말은, 그냥 애정표현 정도로 받아들여졌다. 나에게도, 상대에게도 그랬다. 실제로 남편과의 결혼은, 남편의 주도 하에 이루어졌다. 남편은 내 지랄 맞은 성격을 잘 받아내고, 무던하며, 여러 능력을 갖춘 남자였다. 그렇게 결혼을 결정했다.
물론 남편을 '사랑'했겠지만, 그런 조건 덕분에 결혼을 '결정'할 수 있었던 걸 지금에 와서 부정할 텐가. 결혼에 있어서 여자는 수동적이라거나, 적당히 젊을 때 결혼을 해야 한다는 말을 하고 싶은 건 아니다. 오히려 최근에 나는 결혼을 너무 일찍 한 건 아닐까 생각을 하기도 했다. 사실은, 어떤 스스로의 경제적 독립 없이 '덕 볼 생각'을 조금은 했기 때문에 결혼을 한 거지 않냐는 스스로에게로의 물음이다.
그건 부끄러움이 아닌가, 스스로에게 연거푸 물었다. 그러나 나는 남편이 아니고서는 결혼할 용기도, 자신도 없던 사람에 가깝다. 남편이 아니었다면 굳이 결혼하지 않았을 것이고, 연애만 하다가 나 먹고살 돈 정도를 벌며 살아갔을 것이다. 결혼은 어쩌면 그저 가정을 꾸리는 것, 나 닮은 아이 하나 낳는 것. 연애는 '사랑'만으로 가능하지만, 결혼은 진정 '생활'일까.
그래서 사람들은 자주 '돈'에 관해 이야기하는 것 같다. 현실 감각 없고 자유분방함만 월등하게 높은 나는, 돈 잘 버는 남편에게 '뮤즈'나 '철없는 우리 나연이' 정도의 여자가 되었던 것 같다. 그건 연애 시장에서 내가 얻을 수 있는 꽤 좋은 결과였을까. 젊고 예쁜 상태로, 돈 잘 벌고 다정한 남자를 만난 것.
물론 결혼은 그리 단순하지 않다. 결혼에 대한, 가정의 의미에 대한 수많은 글을 썼다. 어떻게든 의미를 찾고 싶고, 의미 안에서 평온하고 싶었던 시절도 있었을 것이다. 남편이 주는 신뢰, 육아로 인한 자아 확장... 그러나 내가 왜 결혼을 선택한 건지, 결혼은 정말로 무엇인지 밝혀 내고 싶기도 하다. 가정을 만드는 것과 아이를 낳는 것이, 절대적으로 내게 행복을 가져다주지는 않았다. 너무 당연한 이야기지만, 결혼하기 전에는 어떤 환상에 눈이 가려진 듯 간과되기도 하겠지.
그러나 내가 무얼 알 수 있을까. 이미 결혼해 버린 서른두 살짜리 유부녀가, 결혼이란 무엇인지에 대해서 밝혀낼 수 있는 걸까. 결국 내 결혼 생활이 얼마나 자랑할 만한지, 혹은 얼마나 비참한지, 둘 중 하나로 수렴되는 건 아닐까. 자랑과 비참함, 그 중간에서 머무르는 시간이 훨씬 많다는 걸 안다. 그러나 그런 '안정'은 삶에 있어서 디폴트값처럼 삭제되고, 극단적인 감정만 여전히 남아 나를 들쑤시는 건 비단 결혼뿐 아니라 삶의 여러 문제들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출처가 언제인지도 모르게 가지고 있었던 불안, 내면의 문제들, 내 부모에 관한 갖가지 감정들•••. 그런 것들은 결혼하지 않았던 나에게나, 결혼한 나에게나 당연스레 스멀스멀 올라왔고, 내 상황과 현실과 적절히 버무려져 '행복한 나'라든가, '불행한 나'를 만들어냈다. 어디서부터가 결혼 때문인지, 결혼이라는 것이 내 삶의 어디쯤 놓인 건지도 알 수 없게.
나는 단지 결혼한 여자. 내가 결혼에 대해 말한다면 그것은 결혼이 아니라 사실 내 자신에 대한 이야기에 가까울 것이다. 그 정도의 생각으로 내 이야기를 해 보려고 한다. "스물여덟에 결혼해 아홉에 아이를 낳고, 서른둘이 되었더니 이런 고민이 드는 거겠지" 정도의 생각보다는, 조금 더 깊어지고 싶다. 내 이야기를 조금 더 하고 싶다. 그런 다짐 정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