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그릇이 여기까지인 것을
남편과 '효도는 셀프로 하자'를 모토로 하고 있지만, 어머님을 보내드리자마자 췌장암 선고를 받으시고 홀로 투병 중이신 아버님을 생각하니 셀프로만 두기가 쉽지 않다. 그렇다고 내가 아버님의 진료를 다 따라다니는 것도 아닌데 이리저리 먼저 전화를 드리게 되고, 남편이 신경 쓰지 못할 부분들을 챙기게 된다.
물론 이 모든 게 남편이 요구한 적은 한 번도 없었고, 순전히 내 마음이 쓰여서 하게 되는 일들이었다. 남편은 고마운 마음이 가득한 한편, 좋은 마음에서 하는 거여도 시댁 일이란 스트레스 받을 테니 내게 신경 쓰지 말라고 한다. 남편도 아버님께 자주 전화하면서 아버님의 상태를 체크하는 아들이라 걱정할 건 없다. 아버님도 나에 대해 이렇게 해 달라, 저렇게 해 줬으면 좋겠다 하는 것 없이 편하게 해 주시려는 분이셔서 내가 신경 쓸 부분이 정말 없는 편이다. 그렇게 잘 대해 주시려고 하니, 외려 마음이 더 쓰이는 게다.
그렇다고 해서 내가 시댁과의 문제가 아예 없었던 건 아니었다. 지난 설에는 아버님과의 오해가 있었는데, 그때 철 없이 아버님께 큰 소리로 나 할 말을 다 하면서 울먹였던 적이 있었다. 감히 아버님께 대들듯이 말했던 그때. 순간적인 내 감정을 이기지 못하고 참 부끄럽게도 하고 싶은 말을 다 했던 그때 이후 아버님은 은근히 남편을 통해 내 눈치를 살피시는 듯해 아프신 아버님께 괜히 소리를 내었다 싶어 종종 마음에 걸렸다. 그래서 요즘은 되도록 아버님께 더 잘 해드리고 싶어서 진료는 잘 받으셨는지 전화해 여쭈어보기도 하고, 직접 챙겨드리지는 못하지만 식사는 잘 하고 계신지 여쭙는다.
문제는 내 마음이 우러나서 아버님께 전화드리고, 마음을 쓰고 있다고 하지만 나도 모르게 남편에게 친정 부모님에게도 조금만 더 해주었으면, 하고 바라게 된다는 것이다. '효도는 셀프'가 무색하게 남편에게 조금씩 섭섭한 마음을 품게 되는 것이 참 우스웠다. 각자 집에는 각자가 잘 알아서 하자고 해 놓고, 내 마음이 가서 아버님께 마음을 쓰고 있으면서 남편에게 바라게 되다니. 그렇다고 남편이 딱히 못하고 있는 것도 아닌데 말이다. 사람의 마음이란 게, 보상심리라는 게 참 그렇다. 내가 무언가를 하면, 상대도 그에 상응하는 무언가를 해 주길 자연스레 바라게 된다. 그 마음을 지우자고 다짐하지만, 참 쉽지 않다. 나는 아직 그 정도의 마음 그릇이 안 되는 것을.
그렇게 무언가 섭섭한 마음을 어쩌다가 드러내게 될 때마다 은근한 작은 말다툼이 생겨난다. 왜냐, 각자에겐 각자의 손가락이 더 아픈 법이니까. 표현이 서툰 남편은 아무래도 장인과 장모에게 직접 연락하는 건 많이 긴장 될 테다. 친정 부모님도 그런 사위의 전화를 받는다 한들 무어라 할 말도 없고 어색하기만 하겠지. 그래도 먼저 전화 한 번 하자고 말 해 주었음 하는 마음이 드는 건 참 나도 스스로를 이해하기가 어렵다. 그도 내가 아버님께 신경을 쓰는 게 고맙긴 하지만, 내가 하는 것처럼 장인과 장모에게 하기는 어려우니 부담스럽기도 하다고 했다. 깔끔하게 '효도는 셀프'로 하면 이럴 것도 없을 텐데, 그걸 참 무 자르듯 자르는 건 마음 오지라퍼인 내겐 어려운 문제다.
이런 이야기들을 남편과 나누다 보면 또 지극히 나는 내 입장에서 생각하고 말하는 거라 내가 생각하지 못한 부분들이 발견된다. 가령 남편은 한 번 대구에 갈 때마다 유달리 친하게 지내는 친정 식구들을 외할머니부터 외삼촌 내외, 이모 내외를 모두 만나게 될 때가 많다. 모두 잘 환영해주시지만 낯을 많이 가리는 남편에게는 매번 많은 가족들을 만난다는 게 쉽지는 않다고 했다. 내겐 너무 당연했던 대가족의 모임이 그에게는 사위로서 어려운 자리일 수밖에 없었겠구나, 하면서 내가 헤아리지 못했던 무심한 부분을 발견한다. 그 외에도 그가 친정 식구들에게 은근히 마음 쓰는 부분들을 까먹은 채, 나는 내 입장만 생각하면서 혼자 섭섭해했던 것을 그와 대화하다 보면 깨닫게 된다.
각자 자신의 입장에서만 생각하면 불어나는 오해들은, 특히나 결혼 후에 양가에 대한 문제로도 커질 수 있으니 자주 대화하고 속에 품은 말들을 꺼내놓아야 할 것 같다. 그렇게 조율하면서 결혼 생활의 문제들을 풀어나가야겠지. 명절을 앞두고 싸움을 만들지 말자고 다짐하는 이때, 다시 한 번 입장 바꿔 생각해보자는 마음을 먹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