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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영롱할영 Nov 05. 2024

여전히 아름다운 것들을 동경하는 일

자꾸만 뒤돌아봤던 나의 이야기들

항상 그리워하며 살았다. 낡고 오래된 것을 동경하고, 나의 과거들을 애써 지워버리려 하지 않았다. 지나온 것들을 그리워했다. 앞만 보고 걸으면 체할 것 같다. 내겐 익숙한 과거의 것들이 더 소중하며, 미래의 것들은 두렵기까지 했다.


여기 머물면 여기가 현재가 돼요. 그럼 또 다른 시대를 동경하겠죠.
상상 속의 황금시대. 현재란 그런 거예요. 늘 불만스럽죠. 삶이 원래 그러니까.
- 영화 <미드나잇 인 파리> 중     

늘 무언가를 그리워하며 살았다. 시간 돌이켜보기를 즐겨 하는 내겐 그리워하는 시간이 꽤나 많은 편이었다. 고리타분하고 고루해 보이지만, 내가 가장 좋아하는 영화가 <미드나잇 인 파리> 주인공이 그러하듯 나 역시 동경하고 있는 상상 속의 황금시대가 있었다. 그 시대가 내가 지나온 시간이건, 내가 겪지 않았던 과거 어느 때이건 간에 나는 과거를 동경하는 사람이었다.     

오래도록 고맙도록     

오래된 것에 대한 사랑은 엄마 껌딱지로 항상 엄마와 모든 걸 함께 했던 내 어린 시절부터 거슬러 올라간다. 엄마의 출퇴근 차에 항상 같이 다니며 카세트 테이프를 즐겨 들었는데, 주로 해바라기, 유익종, 최성수, 이문세 등의 음반이었다. 그때쯤부터 나도 모르게 나의 세대보다는 조금 거슬러 올라간 취향을 갖게 되었던 것 같다. 엄마와 함께 그들의 노래를 따라 부르며 차를 타고 가던 것, 해바라기의 노래에 엄마와 춤 추던 것이 아주 행복한 기억으로 남은 걸 보면 말이다. 지금도 내 플레이리스트에는 변진섭, 이문세, 김현식, 이소라의 노래가 늘 함께 한다. 사실 아이돌의 음악은 들어본 지가 꽤 오래 되었다. 


이런 내 고루한 취향은 영화에서도 드러난다. SF영화를 즐겨 보지는 않는 편인데, 재미 없어서라기보다는 알 수 없는 미래에 대한 이야기는 왠지 힘겨워서라고 하는 편이 맞을 것 같다. 미래를 꿈꾸는 일은 내게 익숙지 않아서, 일어날 일들에 대한 상상을 하는 것은 어쩐지 무모하다고 느껴지기도 한다. 사실 친구들과의 농담에서도 일어날 확률이 전혀 없는 시답잖은 이야기 하는 것을 즐겨 하지는 않는 편이다. 그러니까 내겐 익숙한 것, 실현 가능한 것들이 유의미한 것이다. 과거는 익숙한 것이고, 미래를 꿈꿀 때에는 내가 실현 가능한 선에서만. 이렇게 쓰고 보니 상당히 재미 없는 사람으로 보이는데, 날더러 재미 없다고 말하는 사람들이 꽤나 있는 편이긴 하다. 


좋아하는 공간들도 대개 과거의 숨을 이어가는 곳이 많다. 윤동주 시인의 언덕과 청운문학도서관, 한옥이 자주 보이는 경복궁 주변, 파리의 셰익스피어 앤드 컴퍼니, 부산의 보수동 책방 골목, 하동의 어느 다원 등이 그곳들이다. 예전 숨결을 그대로 지니고 있는 이 공간들에 있으면 그간 공간이 지나온 세월들이 조금이나마 느껴지고, 이 공간이 그 시간에는 어떤 곳이었는지, 지금은 어떻게 변했는지 더 알고 싶어져 또 찾게 된다. 그 공간에 잠들어 있는 시간들을 깨워보고 싶다. 흘러가는 시간 속에 홀로 그대로 남은 기분이 어떠냐고.


멀티플렉스 몰이나 백화점에 있으면 찌뿌둥한 느낌이 자꾸만 드는 것은, 어떤 시간도 머금지 않은 공간 속에서 권태로움을 느끼기 때문인 것 같다. 이곳에 왜 존재하는지, 어떤 이야기를 지니고 있는지를 담고 있는 게 아니면 그 공간을 어서 빠져나가고 싶어한다. 말하자면, 내겐 기억하고자 하는 습성이 있는데, 기억하기 위해서는 지나온 시간이 꼭 필요한 것이다. 시간을 통해 그것의 존재에 의미를 부여하려 하니까. 매출이 나지 않으면 매장이 폐업해버리고 마는 요즘의 공간들은 그래서 더욱 차갑게만 느껴진다. 3년 동안 살았던 정든 홍대를 떠나오면서 조금은 덜 섭섭했던 이유는 내가 좋아했던 오래된 골목들이 자꾸만 새것들로 교체되고 있기 때문이었다. 

잊어도 될 것은 잊어도 될 테지만

잊지 못하는 것, 계속 떠올리는 것은 결국 습관이다. 나는 애써 나의 지나온 시간들을 지워버리려 하지 않는 편이다. 버리는 것도 잘 못 하는 편이다. 메신저를 초기화하지 못하는 것, 사진첩을 오래도록 정리하지 못한 채 용량을 차지하도록 두는 것, 오래된 편지까지 하나하나 고이 접어 두는 것, 필요 없는 책임에도 책장에 꽂아두는 것. 이 모든 것들이 결국 나의 잊지 못하는 습관 때문이다. 그 물건이 아까운 게 아니라, 그 물건에 담겨 있는 나의 시간들이 아깝다. 내 인생의 한 순간이라도 스쳐온 것들은 모두 소중하고, 그것들을 지니고 있으면 나의 시간이 채워지는 것만 같다. 

   

어떤 친구는 내게 그런 미련도 병이라고 했다. 일부러 시간을 내 살던 동네에 다시 가 보고, 드라이브를 뒤져가며 과거를 떠올리는 내게 말이다. 과거에서 그만 빠져 나오라고, 과거를 사는 사람은 뒤쳐지게 되어 있다고도 말했다. 그러나 나는 과거를 살진 않는다고 말했다. 현재를 무던히 잘 딛고 살고 있지만, 과거를 잊지 않으려 노력 할 뿐. 지금의 나도 과거를 지나오면서 만들어졌고, 몰랐던 것을 새로이 깨닫게 된 데에도 지나온 나의 모습들이 있어야만 가능하다고 믿는다. 그래서 나의 부끄러운 모습까지도 하나하나 잊지 않고 기억해두려 한다. 부끄러워진다는 것은 그때는 몰랐던 것을 지금 깨닫게 되었다는 뜻일 테니, 깨닫기 전과 후의 나를 비교하는 것도 제법 재미 있으니까.


나를 겉으로만 본 사람들은 내가 시원시원한 성격이라고 보는 것 같다. 하지만 나는 전혀, 이전에도 그랬고 앞으로도 깔끔한 성격은 되지 못한다. 현재에서 과거를 함께 살아내고 있으니. 과거에 얽매여 쩨쩨하게는 되지 않으려 노력한다. 다만 잊지 않으려 시간을 되짚어보며 노력하며, 시선을 영 모른 척 할 수는 없는 사람이기에 무던한 척 하고 살아갈 뿐이다. 어쩌면 지금의 이런 내 모습도 훗날 조금은 변해버린 내가 되짚었을 때 부끄러운 모습일 수도 있다. 그래도 어쩔 수 없다. 이런 모습도 나이고, 그때의 변했을지 안 변했을지 모르는 모습도 나이다. 나라는 사람은 그렇게 시간 속에서 흘러갈 테다.


이제는 과거를 딛고 현재와 미래로

LP와 카세트 테이프가 되돌아왔듯, 나팔바지가 다시 유행하듯 과거는 우리 곁에서 돌고 돈다. 할머니와 어머니의 음식이 모든 이들의 기억 한 켠에 자리하고 있는 것도 같은 맥락이다. 과거를 기억하는 것은 비단 나뿐만이 아니다. 소중하게 생각하는 것이 있다면, 아름답다고 생각하는 것이 있다면 그는 분명 과거를 되짚고 있는 것이다. 그 중에서도 나는 과거의 그것들이 여전히 아름다운지 자주 되짚어보는 사람일 뿐이다.


지금은, 당신과 함께 하는 요즘의 나는 과거만 추억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지금과 미래를 그리고 있다. 지나온 나의 모습도 모두 내 모습인 것이라 인정하며, 그 때의 내가 있었기에 지금의 내가 있는 것이라는 사실도 한없이 긍정하고, 더 좋은 어른이 되겠다는 마음을 함께 나눌 당신이 옆에 있으니 무서울 것이 없다. 그러니 미련하게 과거만을 붙들고 있는 일은 더욱 없다. 소중한 과거는 그것대로 두고, 함께 살아갈 앞으로의 날들에서 어떤 일이 우리에게 닥치더라도 헤쳐 나가겠다는 믿음. 그 믿음 하나면 된다는 것을 깨닫고 난 뒤의 나는 제법 많이 안정적인 사람이 되었다. 


함께 산다는 말의 진정한 의미를 깨닫게 해준 당신과의 미래를, 살아갈 날들을 계속 기대하게 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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