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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영롱할영 Oct 13. 2020

지금 그사람 이름은 잊었지만

#잃어버린 책을 찾아서 Project 9

다른 사람의 손에 있다 다시 세상에 나왔지만, 내게로 와 더 빛이 나는 책. 헌책방을 다니면 내게로 와 줘서 고마운 책을 발견하는 재미가 있다. 나의 오래된 책 이야기.


   여행을 가면 꼭 그곳의 서점을 가서 책을 구입해온다. 그곳에 헌책방 골목이 있다면 더욱 행복해진다. 새 책의 냄새도 좋지만, 누군가의 책장에 꽂혀 있다 각각의 이유로 세상에 다시 나온 책에서는 연륜이 묻은 그만의 향기가 있다. 헌책을 구입할 때는 이 책을 읽어야한다는 마음보다 이 책이 가진 사연을 내게로 데려온다는 마음으로 훑어본다. 되도록 1쇄 초판에 가까운 책으로, 책 어디엔가 편지나 책에 대한 메모가 있을 것. 헌책 매입 때야 메모가 있으면 흠이라지만, 누군가에게 적은 편지나 주인이 좋다고 생각한 구절이 표시된 것은 사연을 데려온다는 내 헌책방 방문 목적에 무척이나 부합한 조건이다.


책장 한 칸은 헌책방에서 데려온 책들로 꾸려져있다. 시인을 꿈꾸던 시절이라 주로 시집을 데려왔다. 눈에 익은 시인의 시집이면 우선 들고 보았다. 더 채워갈 테다.
내게로 와 줘서 고마워

   부산 보수동 헌책방 골목에 갔을 때 단연 내 눈에 들어온 이 책은 이 조건들을 모두 갖고 있으면서도, 좋아하던 시인의 초판 도서였기에 데려오지 않을 수 없었다. 어릴 때부터 국문학도, 시인을 꿈꾸던 나는 문학사에 '목마와 숙녀'로 반향을 일으켰다며 늘 등장하는 박인환 시인의 이름을 책방에서 발견하곤 행복해했다. 보석을 찾은 것 같았다. 당시 가격으로 천원이던 도서는 헌책방에서 8배나 부풀어있었다. 책도 무척 깔끔했다. 요즘 나오는 책들에게서는 볼 수 없는 종이의 질감과 타이포. 이 책이 풍기는 카리스마가 책방에서 빛나고 있었다. 그렇게 행복한 마음으로 모시고 온 책은 시 쓰기가 어려워질 때마다 보고만 있어도 에너지를 채워줄 것 같은 든든함으로 책장에 남아있다. 또렷하게 꿈꾸던 문학의 꿈을 다시 피우라고. 사랑을 하고 또 하라고.


   가수 박인희가 부른 '세월이 가면'이 어느 술집에서 즉흥적으로 쓰인 시에 노래를 붙인 것이라는 사실을 알았을 때, 나는 그를 좋아하기로 마음 먹었다. 사랑이 사라진다고 해도 눈동자와 입술은 가슴에 남아있노라 말하는 사람이라면 응당 내가 그리던 시인의 정서를 가진 사람이 맞았다. 사랑을 애써 붙잡고 그리워하는 게 아니라, 그 순간을 묻고 살아가는 성숙한 감정을 지닌 사람. 박인환 시인을 좋아하게 된 건 이 한 구절만으로 충분했다.


   한때 의사를 꿈꿔 의대에 진학했다 결국 문학으로 돌아와 낙원동에 서점 '마리서사'를 열어 당시 문인들의 사랑방 역할을 자처했던 박인환 시인. 이상을 그리워해 그의 기일마다 술을 며칠이나 마시던 사람. 전쟁 종군 기자로 일할 때의 편지에서 늘 아내에게 존칭을 쓰던 사람. 그의 따스함은 시에서도 읽히고, 부인에게 쓴 편지에서도 보였다. 그리고 이 시집이 내게로 왔다. 시집의 첫 번째 시가 '세월이 가면'인 것을 책방에서 발견했을 때는 짝사랑하던 사람에게 한 고백이 적중한 것처럼 설렜다.



시처럼 살고 싶어


사랑이 가더라도 내 가슴에 남아 그를 진정으로 축복해줄 수 있는 마음을 꿈꿨다. 시처럼 살고 싶었다. 그러나 이름을 잊지도 않았고, 축복도 못한 것 같다. 이제는 그리 살아볼까.


   내가 쓴 대로 사는 사람이 되고 싶다. 거짓은 쓰고 싶지 않다. 평소에도 곧이 곧대로 말해야 직성이 풀리는 성격이라 좀 가려 말해야 한다는 핀잔을 종종 듣는다. 그럼에도 나는 거짓으로 누군가에게 비춰지는 건 싫어서 되도록 나를 나대로 보여주고자 한다. 내 감정을 애써 숨기고 싶지도 않다. SNS에도 힘들거나 아픈 것을 그대로 드러낸다.


   ‘세월이 가면'은 사랑을 하면 할수록 이해가 되는 시다. 어린 날의 사랑이 끝났을 때는 '나를 망치고 간 너를 축복할 수 없어, 너는 누구와도 사랑하지 않았으면 좋겠어'가 나의 바람이었다. 그 사랑을 조금 더 품고 자란 때에는 '이제는 너도 행복하면 좋겠어'가 되었다가, 더 지나고 나니 '너가 어떤 사람이었건 그 순간의 너를 내 인생에서 기억할게'가 되었다. 이제야 '세월이 가면'에서 '사랑은 가고/과거는 남는 것'이라는 구절을 이해할 수 있을 것 같다.


   사랑이 사라져도 그 순간의 우리는 남겨둘 것. 그 시간이 헛되었다고 생각하지는 말 것. 이 이야기는 지금 내가 사랑하고 있는 사람과도 나눈 이야기다. "언젠가 우리가 못 보게 되더라도, 우리가 보냈던 시간들이 헛되다고 생각하진 말자. 그건 너무 슬퍼"라고 애인이 말했다. 나는 그런 그에게서 또 하나 배웠다며 그를 쓰다듬었다. 나를 시처럼 살게 해주는 사람이 곁에 있어서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30년 전에도 찌푸린 하늘이었구나


   책의 내지를 넘기다가 이 메모를 발견하고는 생각에 잠겼다. 1988년의 누군가의 생이 힘겨울 때 이 책은 그에게로 갔나보다. 여전히 ‘찌푸린 하늘 아래’에 살고 있는 내가 이제 책을 편다. 시간은 지나가도 개개인의 삶은 여전히 찌푸리고 있나보다. 그럼에도 책을 펴서 웃음을, 안도를 찾아보려 한다. 시는, 문학은, 책은 그래서 아직까지 유효하다.


   책을 찾는 사람은 자신의 정서를 유지하려는 노력을 끊임 없이 하는 사람일 테다. 책을 판매하기도 하고, 쓰기도 하고, 읽으면서 책의 의미를 종종 생각한다. 생각하다 보면 서점에 발걸음이 닿는다. 서점에서 책을 잡고 있는 사람들을 가만 보고 있으면 웃음이 난다. 모두가 아름답다. 이 고요한 풍경이 사라지지 않기를 기도하게 된다. 책의 의미는 어렵게 생각할 것이 아니었다. 잠깐 쉬어가는 곳이니까. 살아있음을 느끼게 해주는 사유의 시간을 안겨주는 안식처니까. 책에 적인 메모 하나에서 시작해 지금 우리가 ‘잃어버린 책’들을 굳이 찾아가며 책의 존재를 뒤적거리는 이유를 만들어본다.


가을은 또다시 오는 것
가을은 내 마음에
유혹의 길을 가리킨다
숙녀들과 바람의 이야기를 하면
가을은 다정한 피리를 불면서
회상의 풍경을 지나가는 것이다

전쟁이 길게 머물은 서울의 노대(露臺)에서
나는 모딜리아니의 화첩을 뒤척거리며
정막한 하나의 생애의 한시름을
찾아보는 것이다
그러한 순간
가을은 청춘의 그림자처럼 또는
낙엽 모양 나의 발목을 끌고
즐겁고 어두운 사념의 세계로 가는 것이다

즐겁고 어두운 가을의 이야기를 할 때
목메인 소리로 나는 사랑의 말을 한다
그것은 폐원에 있던 벤취에 앉아
고갈된 분수를 바라보며
지금은 죽은 소녀의 팔목을 잡던 것과 같이
쓸쓸한 옛날의 일이며
여름은 느리고 인생은 가고
가을은 또다시 오는 것이다

회색양복과 목관악기는 어울리지 않는다
그저 목을 늘어뜨리고
눈을 감으면
가을의 유혹은 나로 하여금 잊을 수 없는
사랑의 사람으로 한다
눈물 젖은 눈동자로 앞을 바라보면
인간이 매몰될 낙엽이
바람에 날리어 나의 주변을 휘돌고 있다
-박인환, ‘가을의 유혹’ 전문


   시집의 마지막에 등장하는 시다. 시인들은 저마다 철저한 계획 하에 시들을 배치한다. 그래서 시집의 첫 시와 마지막 시는 꼭 읽어본다. 비록 이 책이 그의 사후에 제작된 시선집이어서 시인 박인환이 배치한 것은 아니겠지만, 저마다 순서에는 이유가 있으니 그대로 읽어본다.

   

   ‘세월이 가면’이 첫 시로 사랑을 기억하고 잘 떠나보내는 성숙한 모습을 보여줬지만, 마지막 시인 ‘가을의 유혹’에서는 왜인지 그리움을 감추지 못하고 쓸쓸해하고 있다. 그렇다. 한결같은 사람은 없다. 세월 속에 잘 보내주었던 사랑이건만, 가을이 오면 어찌할 도리가 없이 보냈던 사랑을 곱씹게 되고 기억을 더듬게 되는 것이다. 더듬어도 괜찮다. 가을이 가고 나면 ‘눈물 젖은 눈동자’는 다시 가슴에 남고, 그의 이름은 잊으려 노력할 내가 될 테니까.


   이 시집을 가끔 꺼내게 되는 건 첫 시와 마지막 시의 묘한 연결성 때문이다. 사랑에 대한 기억을 자주 곱씹는 내게는 사랑을 어떻게 기억하느냐가 중요하다. 그것이 현재이건 과거이건 사랑했던 순간의 나를 꺼내오는 일을 좋아한다. 사랑을 하고 있는 내 모습, 그의 모습이 예뻐서 간직하고 싶다. 그 순간을 간직하려 꺼냈지만 어떤 때에는 그 순간이 그리워져 쓸쓸해지기도 한다. 그러면 ‘가을은 또다시 오는 것’이라는 박인환의 시를 찾는다. 가을이 유혹하면 여름이 오기를 찬찬히 기다리면 되는 것이기에. 가을이 왔으니 우리는 또 사랑을 해야겠다. ‘잊을 수 없는 사랑의 사람’이 되어야겠다.


가을을 기념하고 싶은 사람 ⭐️⭐️⭐️⭐️

새 책을 좋아한다면 ⭐️

사랑을 반추하며 술 한잔 하고 싶다면⭐️⭐️⭐️⭐️⭐

요즘 시는 이해가 안 된다고 생각한다면 ⭐️⭐️⭐️



<잃어버린 책을 찾아서 Project>는 계속됩니다. 다른 작가분과 함께 매거진을 만들어갈 것입니다. 매일 각기 다른 작가의 1~2편 글이 업로드될 예정입니다. 함께 써 내려갈 것이고, 함께 책으로 묶을 것입니다. 함께 살아가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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