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선설 : 인간의 성품은 태어날 때부터 선하다.
성악설 : 인간의 성품은 태어날 때부터 악하다.
나는 여기서 다른 주장을 하나 추가하고자 한다. “성고설”이다. 인간은 태어날 때부터 고통스럽다. 태어난 순간부터 견뎌야 하는 인생이다. 죽을 때까지 견디다 마침내 죽고 나서야 평안에 이른다. 나로 말하자면 20대 중반정도 되었다. 지금까지 살면서 계속 버틴 기억밖에 없다. 버티다. 나아지고. 버티다. 무너지고. 그렇게 고통을 버텨내며 살아온 결과가 지금 여기 나의 모습이다. 태어난 순간부터 우리는 고통을 마주한다. 어쩌면 우리가 태어나버리고 첫울음을 터트리는 그 순간 우리는 이미 알고 있었는지도 모르겠다. 이 지긋지긋한 레이스가 시작되었다는 절망으로 빚은 통탄의 울음. 어른들도 이 고통을 알고 있을 텐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아이를 낳는 이유를 아직 나는 설명하진 못 하겠다. 그럼에도 살아볼 만한 인생인 건지. 무엇을 알려주고 싶은 건지. 아직 나는 모르겠다. 태어나서 지금까지 고통스러웠던 나의 인생에서는 아직 저것에 대한 답을 모르겠다. 정신적인 고통과 신체적인 고통. 우리는 이미 알고 있다. 모든 사람이 고통받고 있다는 것을. 태어난 순간부터. 그것이 모두에게 착하게 대하도록 만들기도 하고, 대척점에 있듯이 모두에게 나의 고통을 알리려 더 나쁘게 행동하는 것 같다. 나이가 들면 괜찮아 질까. 도로에 지나가는 저 할아버지는 이제 인생이 좀 완만할까. 나에게 “너는 고민 같은 거 없지”라고 물어본 과장님은 과거를 잊은 것일까, 아니면 나이 들어서는 지금 20대의 고통과는 비교 못할 더 악랄해진 고통이 기다리고 있는 걸까. 고통스러운 인생에서 답은 무엇일까. 편해지고 싶은 마음으로 자살에 대한 고민을 한다면 그건 정말 잘못된 것일까. 용감한 것일까. 미련한 것인가. 죽고 나면 뭐라고 평가받을까. 뭐라고 수군거릴까. “더 살아보지 뭐가 힘들다고 이렇게 갔을까”라고 할까. 이것도 아니라면 “그래 많이 힘들었나 보구나, 거기서는 편안해라”라고 할까.
겁 많고 용기 없는 아직까지의 나는 고통스럽기만 한 인생에 답을 찾아보고자 조금 더 살아보기로 한다. 조금 더 나이를 먹어보고, 조금 덜 익숙한 곳에 속해보고, 내가 멋있다고 생각하는 것들을 내 기억 속에 넣어보고 나서 결정해야겠다. 저것들을 끝내고 나서 머릿속에 있는 생각을 행동으로 옮겨봐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