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가 떠난 후(22)
토요일, 그는 아들과 함께 미용실에 다녀왔었다. 같은 미용실을 다녔지만 같은 시간대에 함께 간 적은 없었는데 그날은 함께 가게 되었고 아이가 자신의 이발값을 내주었다며 장성한 아들의 소소한 챙김에 여간 행복해하지 않았었다. 그날의 그의 모습이 떠올라 그를 마주하듯 미소를 지었다.
지난주 토요일, 그가 떠난 날을 기억하고 있던 한 권사님으로부터 카톡이 왔다. "다음 주 금요일이 벌써 1년 되는 날이네요."
지난 해 8월의 마지막 주일, 그의 성찬식 양복 색깔이 영 거슬렸었다. 검정이나 군청색 수트를 주로 입으신 다른 장로님들 가운데 그는 확 눈에 띄는 옅은 갈색 수트 차림이었다. 불면증 때문이었다. 새벽 3시가 넘어서야 잠이 들었던 탓에 그가 옷을 챙겨 입고 나서는 모습을 보지 못했었는데.... 다음번 성찬식 때는 기필코 확인하리라는 다짐을 했었다.
지난 주일, 몇몇 장로님들이 그의 날을 기억해 주셨고 연세 높으신 한 권사님이 다가오셔서 말씀하셨다. "금요일이지요?" "기억하고 계셨네요?" 반색하는 내 손을 맞잡아 주시며 "그럼요. 언제나 교회 들어서면 제일 먼저 반갑게 맞아주시며 꼭 안아주시던 우리 장로님이신데... 아직도 믿어지지 않아요. 어디선가 뛰어나오시면서 반갑게 맞아주실 것만 같아서..."
거실에 있는 티브이, 아이들이 자라면서부터는 온 가족이 함께 티브이를 보는 일이 줄어선지 1년여간 고장 난 채였지만 고치지 않고 있었는데 거의 맥가이버 수준인 친구의 손길로 회생했었다. 지난해 그 월요일, 친구가 고쳐준 티브이를 신나게 들고 들어서던 그의 모습이 떠올랐다. 나는 그날처럼, 그를 마주 본 듯 웃음 지었다.
이번 주 화요일, 나는 비로소 첫 통역업무를 수행했다. 갑자기 예약된 전화통역으로 예약 시간을 기다리며 긴장감으로 고조된 채 주님께 손을 모았다. 그리고 무사히 첫 통역 업무를 마쳤다. 공부를 시작하면서부터 마음을 주신대로 통역을 해드린 환자분의 이름을 주님께 올려드리며 순적히 치료받아 말끔히 회복하시기를 잠시 기도했다.
화요일, 오랫동안 세워 둔 채라 꽃가루와 빗방울로 얼룩덜룩해진 아들의 차를 세차했다면 퇴근해 돌아온 아들에게 자신의 돌발적 선행을 아이처럼 으스대던 그의 얼굴이 떠올라 슬며시 웃음이 새어 나왔다.
수요일, 그의 마지막 식사는 친한 교회 동생과 함께 먹은 순대국밥이었다. 늦은 점심이라서 저녁 생각은 없다며 함께 수요예배에 다녀왔었다. 예배를 다녀와서는 2층 복도에서 딸아이와 습관성 포옹을 했었다고 한다. 딸아이는 조금 전에도 그날의 일을 추억했다.
그가 떠난 후부터는 딸아이와 둘이서 수요예배에 나가고 있다. 우리 가족의 지정석이 된 자리에 앉아 언제나 물끄러미 그의 자리였던 의자를 바라보곤 한다.
목요일이었다. 수요일밤 예배를 다녀와 평소와 다름없이 잠자리에 들었던 그가 일어나지 못하였던 그날.
생각지도 못한 이별을 맞은 나와 가족들을 비롯한 친구들과 성도들 그의 모든 지인들은 슬픔과 황망에 잠길 수밖에 없었다. 아무것도 생각할 수 없었던 날이었다.
엊그제였던 목요일, 나는 첫 현장 통역을 나갔었다. 그런데 또 공교롭게도 환자분이 남편의 고교 선배님이셨다. 내일이 그의 일주기라고 말씀드리니 역시 깜짝 놀라신다. 그가 떠난 후, 그의 카톡에 메시지를 남기셨던 분이셨다. 메시지에 대해 말씀드리니 그를 꿈에서 만났던 날이었다고 하신다. 아마 교회였던 듯, 수트 차림의 그와 평소처럼 얘기를 나누셨다고 했다. 어쩜 첫 대면 통역에서 꿈속에서 그를 만났다는 그의 선배님을 만나게 하신 건지.... 주님은 이토록 놀랍도록 세심하신 데다 감동포인트를 확실히 집고 계신 스토리텔링의 능력자이신지!
금요일, 나는 딸아이방 침대에 누어 울고 또 울고 있었다. 우리 집을 지키며 문상객을 맞이하던 친구들과 간혹 장례 일정에 관해 의논했었다. 도무지 믿을 수 없는 현실에 무엇을 말하고 있는지 조차 가늠할 수 없었지만... 오후에 장례업체에서 입관을 확인하러 오라는 연락을 받고 두 아이들과 그의 조카와 함께 잠든 듯 누워 있는 그의 모습을 보고 왔었다. '그대로인데.... ' 아들이 어느 아버지날에 선물하여 더욱 좋아했던 양복을 입고 그는 낯선 곳에 누워있었다. 미동도 없이....
항상 그렇듯, 다음 해에는 같은 날짜의 요일이 하루씩 밀려간다. 그래서 올해는 금요일이었다. 아침부터 그의 마지막 날을 기억하는 목장식구들이 그의 사진과 사랑이 담긴 추모의 글로 목장카톡방을 가득 채워주었다. 그리고 몇몇 교회 식구들의 카톡 안부도 이어졌었다. 12시에는 가자친구들이 목사님을 모시고 산소에서 함께 예배를 드리기로 계획해 두었었다. 이곳은 봄을 준비하느라 갑자기 소나기가 지나가기도 하고 갈피를 잡을 수 없는 바람이 떠돌기도 하지만 차가운 기운은 완연히 가셨음이 느껴졌다. 눈물 많으신 목사님은 오늘도 여전히 말씀을 전하시며 손수건으로 눈물을 훔치셨다. 지금도 교회 어디에선가 불쑥 나타날 것 같다시며...
바람 탓에 모든 꽃다발들과 화분들을 모두 집으로 가져와 그의 사진이 있는 콘솔에 올려두었다. 생전에는 꽃가루 알러지로 고생을 많이 했었는데 이제는 모든 것에 자유로울 그가 온전히 즐기고 있을 줄 믿으며...
토요일, 그날은 입관예배를 드렸었다. 그가 사랑하던 교회에서 그는 누운 채 마지막 예배를 드리고 사랑하는 친구들의 손에 들려 예배당 문턱을 나섰었다.
내일은 8월의 마지막 주일이다. 지난 해 처럼 성찬식이 있을 예정이고 나는 3부 예배의 대표기도를 하게되어 있어 곧 기도문을 작성해야 한다. 그리고 먼저 이 이야기의 마지막 단원의 글을 쓰기 위해 맥북을 열었다.
그의 부재, 그리고 1년. 어떻게 살아왔던 걸까? 그 어느 때의 일도 뒤돌아보고 싶지 않은 시간들이다. 죽을 것만 같은 슬픔의 순간, 고통의 절규, 그리움의 한기(寒氣)를 고스란히 겪었었다.
지난 시간, 사람들 덕분에 감사함에 목이 메었고 힘을 내어 보기도 했으며 또 사람들로 인해 자기 연민의 늪에 빨려들어가 통곡하며 허위적 거리기도 했었다.
그리고 하나님, 오늘 나와 내 아이들이 이 자리에 변함없이 주님 앞에 있음은 참으로 은혜이다.
구원받은 주님의 자녀라는 정체성마처 흔들려 주님 앞에 엎드려 눈물을 쏟을 때, 잠잠히 "나를 지으신 이가 하나님, 나를 부르신 이가 하나님, 나를 보내신 이도 하나님..." <하나님의 은혜> 찬양을 나직이 마음속에 들려주셨었다. 그러고도 주님 앞에 엎드려 주님의 이름을 부르며, '이 무슨 재앙입니까?' 울부짖을 때, "평안이요 재앙이 아니니라." 급히 외치시는 소리가 마음에 들려 성경을 펴서 말씀을 찾으니 " 나 여호와가 말하노니 너희를 향한 나의 생각을 내가 아나니 재앙이 아니라 곧 평안이요 너희 장래에 소망을 주려는 생각이라."(예레미야 29:11)
이 말씀은 그간 모든 좌절의 곱이곱이마다 나를 일으켜 세우는 알람이 되고 있다.
책 속에 활자로 존재하던 하나님의 전신갑주가 마치 4D처럼 구체적으로 모습을 드러내었고 암송을 통해 내 안에 들어온 말씀이 장검이 되어 시시때때로 덤벼드는 악한 영을 대적해 주었다.
그렇게 1년을 살아내었다. 사람들은 모두 "벌써 1년"이라며 빠른 세월을 놀라워하지만 내게 이 시간의 경과는 오직 감사이다. 한 때는 이 땅에서 살아있던 그의 흔적이 점차 내게서 멀어지는 것이라는 쓸쓸한 마음이 들기도 했었는데 언젠가부터 나의 영이 영생을 살고 있는 그에게 더욱 다가간 시간이라는 생각이 들어 감사하게 되었다.
"너를 지으신 분이 너의 남편이 되실 것이다. 그분의 이름은 만군의 주님이시다. 너를 구속하신 분은 이스라엘의 거룩하신 하나님이시다. 그분은 온 세상의 하나님으로 부를 것이다." (새 번역. 이사야 54:5)
"나 주가 너의 모든 아이들을 제자로 삼아 가르치겠고, 너의 아이들은 평화와 번영을 누릴 것이다." (새 번역, 이사야 54:13)
언제가 끝이 될지는 모르는, 그가 없는 이 땅의 날들은 여전히 두렵고 쓸쓸하여 또다시 붙잡고 매일의 기도를 통해 확인하듯 간구하기를 이 말씀을 이루실 주님을 찬양합니다.
내년에는 우리 모두 어떤 모습일지는 몰라도 분명한 것은 또 한 해 그에게 가까이 다가간 시간일 것이다. 그래서 여전히 두렵지만 한편 기대되는 시간을 살아가게 될 것이다. 그리고 언젠가부터 가끔 섬광처럼 떠오르는 그의 모습에 이젠 반가운 미소로 마주한다. 가끔 귓 전에 맴도는 듯한 그의 목소리에는 사랑한다고 고맙다고 대답하고 있다.
"오늘도 보고 싶은 당신, 사랑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