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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F 패밀리

그가 떠난 후(19)

by 김영주

나의 두 아이들은 우리 부부의 성향을 적절히 나누어 가지고 있다. 몹시도 당연한 일이겠지만.

MBTI로 나누어 보자면 남편은 ISFP였고 나는 INFJ, 딸아이는 ISFJ, 아들아이는 INFP이다.

이 자리에서 MBTI의 신뢰성은 논외로 했으면 한다. 다만 이전에 성향을 나누던 혈액형보다는 좀 더 설득력 있는 구분임에는 틀림없다.

S 성향의 남편과 딸아이는 확실히 오감으로 느껴지는 것에 한 해 정보를 받아들이는 편으로 경험과 현실을 바탕으로 판단하는 편이다. 반면 나와 아들은 상상력이 좀 남다른 편이라는 공통점이 있는 것 같다. 그래서 어떤 문제 앞에서 최악의 시나리오나 염려를 시뮬레이션하는 경향이 있다. 그리고 I와 F는 네 사람 모두 공유하고 있다. 남편의 경우는 더욱 그렇고 나도 E일 것이라 생각하시는 분들이 종종 있는데 이는 요즘 응용하여 새롭게 분류된 일명 "사회적 E성향"일 뿐, 우리 가족의 정체성은 IF 패밀리, 확실히 감성적인 내향인이다.


2년 전 연말, 아들아이는 혼자 6주간 휴가를 내어 한국을 방문했었다. 베이스캠프는 나의 사촌언니의 집으로 정하고 지방 여러 지역과 일본까지 여행 다닐 계획이었다. 아이가 가서 신세를 지니 신경이 쓰여 아이가 가 있는 동안, 언니와 몇 차례 보이스톡을 했었다. 나는 어려서부터 언니의 확실한 쌍꺼풀의 예쁘고 큰 눈이 늘 부러웠었는데 눈이 예쁜 언니는 그 예쁜 눈으로 사람들을 예쁘게 보는 예쁜 성품마저 가지고 있다. 혹시 철없는 주책은 부리지 않는지 물으니 연신 칭찬일색이다. "아주 잘 지내고 있어. 잘 키웠어. 폐는 무슨, 좀 안타까운 건 내 교통카드를 줬는데 전혀 쓰지 않는구나." 나는 언니도 아들도 모두 고마워 입꼬리가 살짝 올라갔으나 마무리는 "응, 소심해서 큰 사고는 안 낼 거야. 근데 눈치는 좀 없을 수 있거든." 언니는 "소심한 게 아니라 생각이 깊고 신중한 거지. 난 너무 좋다. 신중한 남자. ㅎㅎ"라고 얘기해 주었다. 말도 예쁘게 하는 울 언니는 참 좋은 어른임에 틀림없다. 그 후로 나도 나와 아들의 소심함을 신중함으로 고쳐 생각하기로 했었다. 두 사람이 통해서였을까? 아들아이도 이모는 온유하시지만 그 누구보다도 단단하신 분이라고 했었다. 그렇다. 참으로 정확하다. 어려서는 그 큰 눈에 눈물이 그렁그렁, 마음이 약해 잘 울었던 언니었는데.... 언젠가부터 언니는 온유함과 단단함이라는 대비되는 성향을 모두 갖춘 어른이 되었다. 그리고 어느새 제대로 된 분별력을 가진 아들아이가 몹시 다행스러웠었다.


그가 타던 까만 유트를 온라인 매매 웹사이트에 올린 지 꽤 시간이 지났지만 적절한 구매자가 나타나지 않은 채 기다리고만 있었다. 유틸리티 차량의 약칭으로 통용되는 유트(UTE)는 이 나라 남자들의 로망으로 5인승 차량에 큰 짐칸이 있고 차량 전면에는 불바(Bull bar)를 후방에는 토우 바(Tow bar)를 장착하고 있는 데다 SUV보다 큰 타이어 탓에 더 높고 더 큼직하여 차량에도 성향이 있다면 호방함 그 자체의 모습이랄 수 있다.

5년 전 구입하여 남편의 신나는 발이 되어 주었던 차이다. 우리 집 차고는 차 두대를 넣을 수 있지만 항상 그렇듯 자잘한 짐들도 차고에 보관해야 하므로 내 차만 차고에 들어가 있고 그의 차는 늘 노변주차 중이었는데 외출했다가 집으로 들아오는 골목에 그의 차가 서 있으면 아이들은 늘, 심지어는 아빠와 함께 내 차를 타고 집으로 들어가는 중에도 주차되어 있는 아빠 차를 보고 "아빠 오셨다!"라고 말하곤 하는 우리 가족만의 농담을 하곤 했다. 그리고 지난 7개월간 세워져 있던 차를 보며 언젠가부터 우리는 다시 "아빠 오셨다!"라는 지난날의 농담을 하곤 했었다. 유트는 비교적 인기 있는 차종이라 중고차 중개상들이 연락을 해오곤 했는데 시세에 못 미치는 가격을 제시하므로 결정을 내릴 수 없었다. 물론 그들도 되팔아야 하니 그럴 수 밖엔 없겠지만. 그래서 우리는 중개상들보다는 꼭 필요한 누군가가 그 차를 구입하기를 기도해 왔었다. 그런데 오늘 한 사람으로부터 연락이 왔다. 웹사이트에 아들의 전화번호를 올렸었는데 전화가 왔다고 한다. 마침 재택근무하는 날이라 아들아이는 근무 중 내 방으로 뛰어 올라와 이 소식을 알렸다. 우리가 원하는 가격은 아니었지만 언제까지 기다릴 수만은 없어 우리 나름의 할인폭을 정해 두었었다. 그간 좀 별난 사람에게 시달린 경험도 있었고 황당한 연락을 받기도 했었는데 그분은 가격만 조정되면 바로 차량을 구입하겠다고 했고 무엇보다 본인이 사용할 차량을 사려는 실구매자였다. 그런데 지방에 살고 있으므로 토요일 공항에서 만나자는 연락을 해왔다고 한다. 그리고 더욱 놀라운 것은 차량을 보지도 않고 우리가 기재해 올린 세부사항과 사진만 보고 돈을 송금하겠다고 했다. 마침 금요일이 공휴일이고 토요일 역시 은행이 휴무일이니 우리는 목요일인 오늘 송금해 줄 것을 요청했는데 그들은 우리의 요청을 받아들여 준 것이다. 이 또한 참으로 감사한 일이었다. 아들의 퇴근 시간 무렵 입금까지의 절차가 마무리되었고 아들과 구매자가 토요일 약속에 관해 통화를 했다. 퇴근 후 주일 경배와 찬양팀 연습을 위해 바로 교회에 가야 하기에 저녁 식사를 차려놓고 기다렸었는데 아들은 식사를 못 하겠다고 한다. 하루 종일 이 거래의 성사를 위해 마음을 쓰느라 긴장했던 탓으로 점심때 먹은 파스타가 덜 소화된 건지 식욕이 없다는 거다. 언제나 큰 결정은 모두 그의 몫이었다. 모든 일에 계획적인 것을 선호하는대다 최악의 시나리오를 통해 걱정회로를 가동하기 시작하는 나는 요리조리 따져보다 적절한 시기에 그에게 설득당하곤 하였다. 물론 내가 완강히 거부하는 경우엔 그가 내 의견을 존중해 주곤 했었지만. 아이들의 문제에서도 시원시원 결정을 내려주는 쪽은 역시 그였다. 그런데 이제 같은 성향의 엄마와 아들은 마음을 졸이다 함께 한 고비를 넘겼다. "어쩌냐! 우리 집에서 간이 젤 크던 아빠는 떠나시고 콩알 간들만 남았으니!" 아들은 긴장이 풀렸던지 계단에 털석 주저 않으며 나를 보고 피식 웃는다. 나는 아들을 토닥이며 안아 주었다. "이렇게 가는 거야! 잘할 수 있어, 우리!" 아들아이는 공휴일인 내일, 아빠차를 세차할 예정이라고 한다. 최근 새 차를 사고 세차에 진심이 되어 버린 아들은 차량 코팅 용품을 구입하여 손수 차량 관리를 시작했는데 내 차도 해주겠다며 사놓은 제품으로 이미 팔린 아빠차를 손질해 주겠다고 했다. 그리고 지방서 오는 구매자를 위해 기름도 가득 넣어주겠다고 했다. 참 기특하다! 아들은 비록 마음은 약해도.... 언니가 말했듯, 생각이 깊고 신중한 사람인가 보다.

엄마와 동생의 얘기 소리에 방문을 열고 나온 딸아이에게 드디어 아빠차가 팔렸다고 전하니 얼굴 가득 착하디 착한 미소로 "참 감사하네! 우리 기도에 응답하셨네!"라고 말한다. 물론 매매 가격 따윈 묻지도 않는다. 가격이 살짝 서운하다고 하니 그래도 감사하단다. 그렇다! 이 삼겹줄 중 내 믿음이 가장 취약하다. 그리곤 식사를 못 하는 동생을 안쓰럽게 바로 본다. 저녁 안 먹고 찬양 연습할 수 있겠냐고 걱정스레 묻는다. 마음은 약해도.... 역시! 현실만을 직시하는 S성향이다. 어찌 보면 딸아이는 단호하고 담대한 면이 있다. 아빠의 성향을 물려받았기 때문일 것이다. 그리고 딸아이의 졸업 사진 속에서 웃고 있는 그를 바라본다. 짙은 쌍꺼풀에 큰 눈을 가진 그는 언제부터 담대했을까? 젊어서는 잘 울지 않았고 우는 사람을 바라보는 것조차 못 견디던 그였지만 언젠가부턴 슬픈 내용의 드라마나 다큐를 보다가 또르륵 눈물을 흘리곤 했다. 젊어서 잘 알지 않았던 건, 아마도 한국 남자로서 슬픔을 표현하지 않도록 교육된 탓도 있었을 것 같다. 그러나 그의 마음씀은 확실한 감성적 내향인이었다. 그런 그가 가정을 이루고 이민까지 와서 살아가며, 이 눈이 큰 사나이는, 그 큰 눈을 한껏 부릅뜨고 살았었을 것이다. '드디어 우리도 해냈어.ㅎㅎㅎ 지오디 어머니께인 줄... 우리 경우는 아버지께인가? 암튼 참 힘들었어. 당신 정말 힘들었겠다. 잘했어! 수고 많았고! 항상 함께 있음을 믿어. 고마웠어. 사랑해. 그리고 오늘도 너무 보고 싶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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