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롤러코스터

그가 떠난 후(18)

by 김영주


9주간의 수업을 마치고 2주간의 부활절 방학이 시작되었다. 그리고 오늘 홈닥터가 연결해 준 상담을 받게 되었다. 그가 떠난 후... 몇 번쯤 생각해 보았었지만 이 또한 주저하여 미루던 일정 중 하나였다.

어느덧 7개월 반이 지났다. 한동안 새로 시작하는 공부에 대한 부담에 눌려 있었으나 지난주 학기의 마지막 주부터 디프레션이 오고 있음을 감지했다. 나는 병원 통역만 할 생각이지만 과정 중에 있는 경찰과 법원 통역 역시 공부해 두어야 하는데 제시되는 예문들의 내용이 심히 살벌하여 정신줄을 살짝 놓았던 중이었다. 그런데 고난 주간을 한 주 앞두고 마음의 갈피를 잡지 못하던 만학도는 마침 <The Chosen>이라는 영화 앱을 다운로드하여 보기 시작했었다. 공생애 중 예수님과 제자들의 사역을 담은 영화로 이미 시즌 4까지 완결되었고 각 시즌 8개의 에피소드로 구성되어 분량이 적잖았지만 흥미진진한 스토리 전개에 한국어 더빙까지 완벽하여 영어에 지친 내겐 딱 맞는 일탈이었다. 익히 알고 있는 복음서 사건과 말씀의 이면이 특정 사건과 연결되어 있었다는 전개는 픽션인지 아니면 외경을 통해 찾아낸 내용인지 확실지 않지만 말씀의 개연성을 더하여 감탄스럽기까지 했다. 예를 들어 주님께서 "누구든지 너희로 오 리를 가게 하거든 그 사람과 십 리를 동행하고" (마 5:41)의 말씀을 통해 보여 주시는 사건은 당시 유대인들은 로마 군인이 요구하면 5리까지는 짐을 들어주어야 하는 법이 있었는데 예수님과 제자들이 이동 중 무례한 로마 군인들이 이와 같이 요구할 때 예수님과 제자들은 자신들의 짐은 다 버리고 로마군인의 짐을 받아 들었을 뿐 아니라 투구까지 받아 쓰고 걸어야 하는 사건이 발생하였고 예수님과 제자들을 희롱하며 짐을 지우고 동행하던 로마군인들이 5리 이후 도로 받아 들으려 하자 그저 뚜벅뚜벅 발걸음을 옮기시는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이 바로 그 말씀이었다는 배경으로 실로 예수님은 제자들과 함께 5리를 더 그들의 짐을 지고 가시려 하니 오히려 로마군인들이 한껏 난처하고 미안해하며 자신들의 짐을 받아 드는 연결 내용이 있었다 던가 베드로가 주님께 "형제가 내게 죄를 범하면 몇 번이나 용서하여 주리이까 일곱 번까지 하오리이까?"라고 묻는 장면은 전직 세리였던 마태와 베드로 간의 얽힌 사연을 근거로 하였다던가 열 두 제자 중 열심당원 시몬의 형이 바로 베데스다 연못 앞에서 예수님께 치유받은 사람이었더라는 전개를 비롯 무수히 많은 연결고리가 되는 이야기들이 또한 흥미를 더하는 요소이기도 했다. 금요일 수업을 마치던 날 시즌 4의 마지막 에피스드까지 다 보고 나서 시즌 5가 올해 개봉되고 6월쯤 스트리밍 된다는 소식을 찾아보게 되었다. 6월이면 과정을 마쳤을 테니 시험까지 잘 통과하여 그땐 보다 가뿐한 마음으로 감상하게 되길 기대해 본다.


한 3주 전이었다. 삼겹줄 예배를 마치고 기도제목을 나누는데 아들아이가 새로운 기도 제목을 얘기한다. 요즘 악몽으로 새벽녘 잠을 깨곤 한단다. 꿈의 내용은 엄마의, 누나의, 자기 자신의 심장이 멎는 꿈이라는 거다.

그래서 홈닥터에게 상담을 요청하기로 했다. 홈닥터인 오드리는 조심스레 내 안부를 물으며 나도 상담을 받아보았으면 한다는 조언을 했다. 홈닥터 병원에 상주하는 상담사는 주중 이틀만 근무하므로 주중 근무해야 하는 아들아이보다 내가 먼저 약속을 잡아 만나게 되었다. 이곳은 가을이 시작되었다. 유독 비가 적고 날씨가 좋았던 여름이 지나고 가을에 접어들어서일까 공부 스트레스와 함께 마음이 무거워짐을 스스로 감지하고 있었던 터였다. 그녀의 이름은 멜리사였다. 나는 그 초면의 상담사 앞에서 작심이라도 한 듯 눈물을 터뜨리고 말았다. "이제 8개월이 되어 갑니다. 가끔씩 나의 감정을 점검해 보곤 하는데 한동안은 괜찮은 것 같았으나 얼마 전부터 다시 바닥으로 내려가고 있어요."

그녀는 바로 프린터에서 뽑아낸 종이 한 장을 내밀었다. "슬픔의 롤러코스터"라는 제목에 '슬픔의 은유라는 부제'가 달려 있었다. 그리고 "슬픔은 날마다, 순간마다 변할 수 있는 감정들을 지나가는 여정이다. 이러한 굴곡은 종종 불안하게 느껴지는데, 마치 롤러코스터를 타는 것과도 같다. 슬픔은 우리의 삶을 뒤흔들고, 방향 감각을 잃은 듯한 혼란스러운 기분을 들게 한다. 잦은 좌절과 길을 잃은 듯한 느낌은 흔한 일이다."라고 한 켠에 쓰여 있었다. 그리고 중앙에 자리한 롤러코스터는 "혼란" "외로움" "짜증" "분노" "수용"" 평화" "슬픔" "그리움" 부인"이라는 구간으로 나뉘어 있었다. 모두 내가 통과해 온 구간들이다.

함께 얘기를 나눌 친구가 있냐고 묻는다. 친구들은, 내 사랑스러운 친구들은 많다. 그가 떠난 후 나를 극진히 돌봐주어 왔다. 그러나 이젠 좀 미안하다. 그래서 더 이상 얘기하고 싶지 않아 자제해 왔다. 그들에게도 모두 각자의 삶이 있으니...


매일 아침 큐티 후 기도 시간마다 "아버지"를 부르면 눈물이 차오른다. 엎드린 채 나직이 "주님이 계셔서 참 좋아요."라고 말씀드려 보다. 그가 너무 보고 싶다고도 울부짖는다. 그리곤 절박한 심정으로 오늘 꿈에 오게 해 달라고 말씀드려보곤 한다. 그래서인지 어느 새벽녘 그가 천연덕스레 내 옆에 누워있다 내게 자신의 전화기에 나타난 돌아가신 엄마의 사진을 보여주었다. 최근에 펌을 하신 모양으로 컬이 살아 있어 더욱 생기 있어 보이셨고 분홍 카디간에 하얀 블라우스를 받쳐 입으신 엄마가 작은 꽃병에 꽂힌 빨간 카네이션을 바라보고 있는 사진이다. 꿈에 나는 엄마는 돌아가셨고 남편은 살아 있는 것으로 생각했던가 보다. 사진을 바라보며 그리운 마음에 "엄마다!"라고 나직이 말하니 남편은 "그러니까. 기도하는데 이 사진이 나와서 나도 깜짝 놀랐다니까?"라고 말한다. 출근하는 아들아이 도시락을 싸주러 내려간다니까 남편은 "가지 마."라고 한다. 나는 아침부터 또 농담으로 하루를 시작하는 남편을 향해 언제나 처럼 고개를 흔들었고 잠옷을 벗고 옷을 챙겨 입으며 오늘 남편의 일정이 어떻게 되나 생각해 보았았다. 생각이 나지 않는다 그래서 다급히 어제 그의 일정은 무엇이었나 기억을 더듬다 그냥 누워 있는 그를 물끄러미 바라보곤 그가 세상에 없다는 사실을 깨닫고 잠에서 깨었다. 딸아이에게 아빠꿈을 꾸었다고 얘기했는데 그다음 날 딸아이가 아빠를 꿈에서 만났다고 한다. 그냥 침대에 누워 주무시고 계셨다고 아빠 아이패드가 켜진 채 아빠 협탁에 올려져 있는 것으로 보아, 뭔가 보시다 잠드신 것 같았다고... 아들아이가 새로 산 차를 타고 남편과 엄마가 있는 산소에 갔었다. 대학 때부터 참으로 오랫동안 타던 차를 드디어 팔고 새 차를 장만하였던 거다. 우리 모두 아빠가 계셨다면 엄청 좋아하셨을 것이라고 얘기했었다. 이미 차를 가져온 날 아빠 사진을 들고 차 주변을 한 바퀴 돌며 보여 드렸지만 또 산소도 한번 가주어야 한다는 게 아들의 생각이었다. 그런데 참 이상하다. 늘 콘솔 위에 놓여 있는 남편의 사진을 보고 무슨 얘기든 하는 나와 아이들은 산소에 가면 기분이 별로이다. 남편이 있을 때, 네 식구가 함께 엄마의 산소를 찾아갔었을 때와는 몹시 다른 기분이다. 아니다! 별로인 기분에 마음이 산란해질 필요는 없다! 엄마도 그도 그곳에 있지 않다. 하늘나라에 그곳에서 영생이라는 새로운 패턴의 삶을 시작하셨으니...


초면의 상담사 앞에서 대책 없이 터져버린 눈물 때문에 일부만 읽고 접어 두었던 그 슬픔에 관한 종이를 펴 들었다. 그리고 그제야 다른 쪽 한편에 쓰여 있는 글귀도 읽어 내려갔다.

"마치 롤러코스터를 타는 것처럼, 슬픔은 우리가 그 경험을 통제하려 하지 않고 그저 흐름에 몸을 맡기면 감당할 수 있습니다. 시간이 지나면 우리는 결국 더 나은 곳에 이르게 됩니다."

미국 친구에게 오랜만에 보이스톡을 했다. 서로 안부를 묻고 오늘 상담 다녀온 얘기를 나눴다. 친구는 "언제든 전화해. 뭐가 미안해. 모두 겪을 일, 네가 먼저 겪고 있는 거야. 나랑 다른 친구들이 겪을 때, 넌 이미 뛰어넘어 우리 전화받아주느라 바쁠걸."

퇴근한 아들아이가 그 슬픔의 종이를 펼쳐본다. 심리학을 전공한 아들은 이 "슬픔의 오 단계"는 유명한 이론이라고 한다. 아들은 "알고 있지. 그런데 언제까지나 롤러코스터를 탈 수는 없잖아. 우리는 크리스천이고 앞으로 나아가야지. 엄마가 열심히 본 <The Chosen>의 인물들처럼 길을 향해 나아가야지. 그래서 난 요즘 괜찮아. 보고 싶지만 많이 보고 싶지만... 아빠도 그런 타입이셨고. 뚜벅뚜벅 앞으로 앞으로" 방금 전까지 이층에 놓인 작은 소파에 긴 다리를 다 구겨넣고 누워서 안방문을 바라보며 "이렇게 있으니 아빠가 계단으로 올라오실 것 같아"라고 말하던 아이인데. 딸아이가 "정말 오시면 좋겠다!"라고 하니 "그러니까"라고 대답하던 아이는 그리움을 간직한 채 "앞으로 앞으로"로 마음을 정한 모양이다. 그렇지! 언제까지 롤러코스터를 타고 있을 수는 없지. 놀이동산은 특별한 날의 일정일 뿐. 더 많은 시간이 할애된 보통의 나날의 삶을 살아가야지. "결국은 더 나은 곳에 이르게 될 날을 믿으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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