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가 떠난 후(16)
딸아이와 함께 “가자”의 연초 여행을 다녀왔다. 우리 “가자” 친구들은 연초에 2박 3일간의 여행을 가곤 한다. 성탄절 혹은 새해 첫날 바비큐 모임과 함께 오랜 약속과도 같은 행사이다. 그가 떠난 후, 모든 장례 일정 동안 함께 시간을 보낸 친구들과 식사를 한 날이었다. 식당에서 식사를 마친 후, 한 친구의 집에 모여 이런저런 얘기를 나누다 연초 여행을 위한 숙소를 예약하기로 했다. 마침 그 자리에 딸아이가 함께 있었는데 관심을 보이기에 나도 아이와 함께 가기로 했었다. 나는 운전 경력 30여 년에도 내가 사는 도시를 벗어나 장거리 운전을 해 본 적이 없었다. 운전을 즐기던 그가 언제나 어디든 내가 가고자 하던 곳을 태워 갔었기에… 그러니 앞으로는 차로 이동해야 하는 여행이 보다 자유롭지 못할 테니 다른 친구의 차를 함께 타고 갈 수 있는 기회에 아이와 함께 떠나야지 않을까 생각했었다. 아빠를 잃은 상실감과 엄마를 지켜야 한다는 긴장감으로 언제나 다정하게 웃어주던 아이가 최근엔 굳은 표정을 짓곤 쉬 풀지 못하는 모습이 안쓰러웠었는데 여행이 아이에게 작은 위로가 되었음 해서였다. 내가 사는 도시에서 차로 3-4시간쯤 떨어진 작은 휴양도시에 에어비엔비로 숙소를 정했다. 나와 딸아이를 포함하여 모두 다섯 가정이 함께 했었다. 이제 시간이 제법 지나 그가 없는 일상의 경험도 반복을 통해 비교적 견딜만하게 되었는데 여행은 또 다른 장르였다. 늘 차로 떠나는 여행을 할 때마다 그의 옆자리에서 바라보던 평온한 이곳의 시골 풍경을 이제는 다른 친구의 차 뒷좌석에 앉아 내다보며 파란 하늘을 올려다본다. ‘거기 있어? 혹시 지금 우리랑 함께 가고 있어?’
숙소에 도착하여 짐을 풀고는 항상 그 친구들과 함께 있던 그의 모습이 떠올라 몇 번이고 숨을 고르고 또 눈물을 삼켰었다. 늘 시장하여 일찍 일어난다던 그는 언제나 가장 먼저 일어나 주방에서 무언가를 시작했었다. 아침마다 부엌 어딘가 그가 서 있는 것만 같아 또 숨을 고르고 눈물을 삼켰다. 추억, 그와 함께한 여행의 추억이 사진처럼 떠올라 숨을 고르고 눈물을 삼켰다. 친구들의 따뜻한 배려로 일정을 잘 마치고 집에 돌아와서도 그가 없던 여행의 여운은 한동안 계속되었었다. 그래서 일주일에 한 번은 글을 올리리라 생각했었던 브런치 스토리도 덮어 둔 채였다.
2월 말로 다가온 개강을 앞두고 영어 공부를 좀 하는 중에도 집안일을 하던 중에도 운전을 하다가도 마치 사진이나 영상 속 한 장면처럼, 갑자기 그의 모습이 떠올라 눈물이 터진다. 조용히 눈물을 훔치며 그의 이름을 나직이 불러본다. 보고 싶다. 이젠 마구잡이로 슬프다 좌절하는 단계는 지났으나 각오했듯 그리움은 그냥 남아 언제든 나와 함께 할 내 몫일 것이다. 이젠 오직 내 추억 속에 살고 있는 그가 사무치게 그립다. 슬픔에 서러움 마저 얹어질 때는 여전히 간혹 믿음도 흔들린다. 60이 넘은, 심지어 권사라면서 참 형편없는 스스로의 믿음에 자괴감을 더한다. 그래도 한 구절씩 암송해 온 말씀을 지팡이 삼아 일어서본다. 겨우 겨우 일상을 보행할 정도의 힘이다. 상담을 받아 보아야 하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다음 주까지도 이와 같은 상태라면 홈닥터인 오드리에게 문의를 해봐야겠다 마음을 정했었다. 그렇게 며칠이 지났을까 매일 저녁 아이들과 함께 하는 삼겹줄 예배 시간에 아이들에게 나의 상태를 이야기하고 기도해 달라고 부탁했다. 사실 이 말도 꺼내기 쉽지는 않았다.. 아이들이 불안해하지 않을지 염려되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젠 아이들이 내겐 함께 기도하는 동역자이자 중보자들이니 염려보다는 내 속내를 솔직히 얘기하는 편을 택했다. 딸아이는 생각했던 대로 얼굴 가득 걱정의 빛이 가득했다. 그러나 학부에서 심리학을 전공한 아들은 상담받는 것을 적극 고려해 보라고 조언하였다.
매일 큐티를 마치고 주님께 엎드리는 시간, 나는 늘 절망으로 쓰러져 숨죽여 울음을 터뜨렸었다.
“아버지, 아버지, 나를 사랑하시어 기쁨을 감추지 못하시는 아버지…. 나의 기도를 들으시는 아버지…. 저 여기 있어요….” 처음 “아버지”를 부르는 순간부터 울음이 터져버린다. 아버지 앞에 엎드려 아버지를 부르며 기도하는대도 외롭고 쓸쓸함이 나를 압도한다. 내 기도를 들으시는지 나를 주목하고 계신 건지 확인하듯 다시 “아버지”를 부른다. 나는 정말 주님의 목소리를 들어야겠다고 떼를 써보기도 한다. 난 지금 외롭고 슬프고 두렵다고 마음 안에 모든 고통을 쏟아내며 울었다. 그런데 그날은 주님께서 나와의 오래된 추억을 기억나게 하셨다.
예수 믿는 엄마가 그렇게 소원하셨고 기독교 재단의 유치원과 초등학교를 다녀 하나님과 예수님, 두 분과는 친숙하다 느끼면서도 교회에 다닐 생각은 없었던 내가 살고 있던 아파트 건너편 상가의 낯선 교회에 발을 디딘 건 큰 아이의 장애 때문이었다. 첫 돌이 지나고도 말을 하지 못했던 아이를 안고 찾아간 소아정신과병원에서 행동과잉과 언어지체라는 진단명을 받아 들고 나는 그 낯선 교회에서 숨죽여 울음을 삼키며 예배를 시작했다. 이민을 와서 마일드한 자폐와 아스퍼거스 신드롬이라는 새롭고도 절망스러운 진단명을 받아 들도록 아이의 말문은 트이지 않았었고 가족 모두 엄마가 정해주신 교회를 다니면서 나의 목표는 오직 하나, 아이의 회복이었다. 무어든 열심히 해야 하나님께서 잘 보아주실 것이라 믿으며 신앙의 초보자로 당시 교회의 유일한 교육 프로그램이던 제자 훈련을 받았다. 훈련을 받고 나서는 선뜻 봉사도 시작하였다. 그때도 나의 유일한 속셈은 아이의 회복이었다. 새벽기도를 출석하기 시작했다. 그건 엄마의 신앙생활을 카피한 것이었다. 비가 오나 눈이 오나 새벽기도와 철야기도를 빠지지 않으셨던 엄마처럼 한다면 하나님이 아이의 문제를 해결해 주실 것이라는 기대로 그렇게 했었다. 젊은 나이인대다 특별히 아침잠이 많았으며 운전실력도 아슬아슬하던 내가 어두컴컴한 새벽, 새벽잠을 찢고 결연히 일어나 혼자 운전을 해 교회에 들어섰던 것은 모성애라는 초인적 동력 때문이었다. 둘째 아이가 초등학교에 들어간 해였다. 두 아이 육아로 미뤄두었던 공부를 시작할 계획을 세워두었을 때였다. 그리고 교회에서는 40일 작정 특별새벽기도회가 시작되었다. 나는 그때 잠시 새벽기도를 쉴 생각이었다. 아이들을 학교에 태워다 주고 바로 나의 학교로 가서 공부할 계획을 세워두었으므로 특별히 바쁜 아침을 맞을 것이 틀림없었기 때문이었다. 또한 이번 특별 새벽 기도회는 특별히 미리 신청을 한 신청자들이 그 기간 동안 완주를 하도록 계획되어 있었다. 삼십 대 중반, 교회에서 주일학교 교사와 찬양대원 정도로 섬기는 젊은 서리집사인 내가 신청하지 않아도 될 만한 자리라 생각했었다. 게다가 나는 바쁜 나의 일정을 새로이 시작하게 되었기에… 그런데 주보에 올라온 특별새벽기도회 신청자 명단에 내 이름이 있었다. 나는 결단코 신청한 적이 없는데…. 적잖이 당황스럽고 슬그머니 짜증도 났었다. 혹시 엄마가 그러신 건 아닌지 추궁하듯 여쭈었지만 아니시란다. 나는 교회에 명단이 잘못된 것이라고 말씀드려야겠다고 했다. 그랬더니 엄마는 혼잣말처럼 “ 작정기도인데… 이름이 있는데… 그냥 가지 그러니?”라고 하신다. 나는 내가 한 작정도 아닌 데다 내 사정을 다 아시면서도 그렇게 말씀하시는 엄마가 원망스럽기까지 해서 왜 그런 부담스러운 말씀을 하시냐며 볼멘소리를 했었다. 그런데 또 찜찜한 거다. 안 가면 안 될 것 같은 마음이 들어 생각에 생각을 거듭하다 교회에 전화하여 명단의 오류를 바로 잡는 것을 포기하였다. 이곳의 겨울이 시작된 6월, 그 특별새벽기도회의 첫날은 비바람마저도 맹렬했었다. 모진 바람의 기세에 뒤집어진 우산을 수습하며 여전히 흔쾌하지 않은 마음으로 교회 사무실이 있는 건물로 들어섰었다. 그때 우리 교회는 현지인 예배당을 빌어 예배를 드리던 때라 주일 예배는 딱 한 번 뿐이었고 수요 저녁 예배 대신 화요 저녁 예배를 드려야 했으며 새벽기도는 빌려 쓰던 교회 인근의 건물 2층에 있던 교회 사무실에서 드리던 때였다. 특별새벽기도이고 보니 새벽예배 장소로 사용하던 공간은 이미 신청하신 성도들로 가득했었다. 예배 때만 의자를 놓는 공간인데 이미 비치해 놓은 의자가 모두 차서 나는 한켠에 포개놓았던 의자 하나를 꺼내 자리를 잡았다. 그날의 특별 새벽기도는 왠지 특별했다. 나의 일천한 성경지식으로도 마가의 다락방 성령 강림 사건이 떠오르는 분위기였다. 그때 그곳에선 의자의 이동이 가능했기에 새벽 예배를 마치면 각자 자리를 이동하여 협소한 공간에서 서로에게 피해가 되지 않도록 기도를 하곤 했었고 나는 늘 암묵적으로 맡게 된 예배 공간의 전등 스위치를 내리는 임무를 마친 후, 그 근처 벽 쪽으로 이동하여 기도를 하곤 했었다. 그러나 그날은 여느 때보다 더 많은 성도들로 가득하여 의자를 옮겨 기도할 공간을 찾기도 어려울 듯하여 나는 의자를 두고 화장실로 통하는 복도로 자리를 옮기기로 했다. 나의 여러 가지 약점 중 하나는 무서움을 심히 타는 겁쟁이라는 점이다. 그런데도 나는 그 불빛도 없는 어스름한 복도로 나와 무릎을 꿇었다. 아마도 그날은 다른 날과는 다른 뜨거움, 수많은 성도들이 모여 기도하므로 뜨거운 성령의 열기가 마치 마가의 다락방을 연상케 할 정도였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차가운 복도 바닥에 엎드려 무릎을 꿇자 두 눈에서 눈물이 쏟아지기 시작했다. 나의 교만과 믿음 없음이 부끄럽고 죄스러워 몸을 가눌 수도 없도록 눈물을 쏟았다. 얼마쯤 지났을까? 나는 분명 보았다. 길고 긴 커튼의 밑단자락 같은 것이 펼쳐지고 그 아래로 불빛이 드러났다. 어디로부터 시작되었는지도 모를, 폭을 가늠할 수 도 없는 균일한 주름으로 시작된 , 나는 그것이 주님의 옷자락이라는 확신이 들었다. 주님이 오셨다. 내 앞에 오셨다. 나는 다시 눈물을 쏟으며 그 앞에 엎드렸다. 그날 이후, 나의 기도는 달라졌었다. 주님이 계시니까. 정말 계시니까 내게 오셨으니까. 내가 보았으니까.
이후 25년 만에 다시 주님이 내게 그날을 기억나게 하셨다. 슬프고 괴롭고 두렵다고 울부짖으며 너무 외로워 감당할 수 없을 것 같다고 내 기도 듣고 계시냐고 내 아버지 맞으시냐고 발버둥 치던 내게 주님은 주님과 나와의 옛 추억을 생각나게 하셨다. 그날처럼 내 앞에 오신 것이 아니라 마치 사진이나 그림처럼 그날의 그 찬란한 옷자락을 떠올리게 하시고는 “내가 결코 너를 떠나지도 버리지도 아니하리라” 신명기 31장 6절의 말씀. 절대적 리더였던 모세가 떠난 후, 불안하고 당황했을 후계자 여호수아에게 주님께서 하셨던 말씀의 한 부분이 가슴속에서 울렸다. 잊고 있던 추억, 이제는 내 인생의 다이어리에 다만 “주님이 옷자락으로 오신 날” 쯤으로 메모돼 있었는데 그날 주님은 그 추억을 떠올리게 하시고 임재하심에 방점을 찍으시듯 말씀을 주셨다. 나는 감격과 죄송함으로 다시 주님 앞에 엎드렸었다. 그날 저녁, 아이들과의 예배 때, 아이들은 조심스레 내 상태를 묻는다.
“우리 따님, 아드님이 기도해 주신 덕분에 엄마는 주님과의 옛 추억을 떠올리고 회복을 했답니다. 기도해 주신 나의 동역자들, 감사해요”라며 웃어 보였다. 이제 다 자라 엄마의 힘이 되어주는 아이들이 고맙고 대견하다. 그리고 ‘주님, 정말 죄송합니다. 주님과의 소중한 추억을 그냥 건조한 기록이 되게 했었네요 어떻게 그 감동의 순간을 잊었었을까요? 그와의 추억도 그럴까요? 흐려지고 잊혀질까요? 제게 오셨던 주님께서 언제나 저와 함께 하심을 믿습니다. 그리고 그는 잘 지내지요? 주님과 함께 있어 안심이에요. 전 이곳에서 제 임무 잘 마치고 갈 수 있도록 언제나 도와주세요, 늘 주님 안에 평안하도록 지켜주세요. 감사합니다. 사랑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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