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가 떠난 후(15)
누군가 어떤 때 글을 쓰냐고 묻는다. 처음엔 무엇이든 해야만 할 것 같아서였던 것 같다. 그때는 숨 쉴 수 없을 만큼 슬픔으로 가득 차 있던 때였다. 그리곤 그리움 때문이었다. 숨 쉴 수 없을 만큼의 그리움이 엄습하였을 때였다. 불현듯 그가 보고 싶고 그의 목소리가 듣고 싶고 그의 따뜻한 손을 잡고 싶을 때였다. 어느 날은 서러움에 복받쳐서였다. 슬픔과 서러움은 좀 다른 의미일 것 같다. 슬픔은 객관적 현상에 대한 반응이라면 서러움은 극히 주관적 관점의 감정이 아닐지. 슬픔은 이제 이 땅에서는 그를 다시 볼 수도 만질 수도 없는 그를 향한 절체절명의 극단적 그리움으로부터 발현한 감정이라면 서러움은 하루아침에 남편과 아빠를 잃은 나와 내 아이들의 현실을 마주하며 마치 세상으로부터 유기된 듯한 서글픔이 차오르는 감정이다. 나는 그와 같은 때에 그 숨 쉴 수 없을 만큼의 서러움을 삼키며 글을 썼었다. 언젠가는 숨 쉴 수 없을 만큼의 두려움이 삼킬 듯 다가오는 날이기도 했고 또 어느 날은 두려움을 물리치는 비법을 터득한 날이기도 했다. 더욱 그를 기억하고 싶은 날이거나 내 아이들이 숨 쉴 수 없을 만큼 안타까운 날도 있었다. 글을 써내려 가는 동안, 놀랍게도 각양 어두움의 감정으로 뒤덮여 있던 내 숨길이 드러나기 시작했고 서서히 호흡을 인식하게 되곤 했다. 물론 나는 생물학적으로는 당연히 숨을 쉬고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 어두운 감정의 더미에 파묻히고 보니 과연 숨은 쉬고 있는 것인지 갑자기 스스로의 호흡마저 의심스러워 급하게 들숨과 날숨을 쉬어 보기도 했었다.
지금의 나는 비교적 끌려다니던 감정에 고삐를 메어 스스로 방향을 잡고 완급을 조절하는 단계에 접어든 것 같다. 이는 결코 자생적인 것은 아니었고 부여받은 능력임에 틀림없다.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 (빌 4:13)
절박한 상황 속에서도 믿음을 증거 했던 사도바울의 고백에 공감하며….
그럼에도 지난 연말, 나는 좀 초조한 기분이 들었었다. 여느 때와 달리 새로운 해에 대한 긴장감으로 바라고 원하기는 계속 뒷걸음질을 치고 싶었다. 2025년, 그와 함께 할 수 없는 시간 속을 홀로 가야 하는 부담은 두려움으로 다가왔었다. 이럴 때는 또 말씀을 꺼내든다.
"두려워하지 말라. 내가 너와 함께 함이라. 놀라지 말라 내가 네 하나님이 됨이라 내가 너를 굳세게 하리라 내가 너를 도와주리라 참으로 나의 의의 오른손으로 너를 붙드리라.”(시 41:10)
그렇다. 나는 혼자가 아니다. 그와 함께 있을 때도 지금도 주님께서 늘 함께 계셨으므로…. 그래서 나는 홍해와 요단 강이 갈라지기 전, 먼저 물속에 발을 딛었던 그들처럼 어느덧 2025년에 발을 딛고 걷기 시작하였다. 시간 앞에서 누군들 뒷걸음질이 가능할까? 그러니 절규하며 발버둥 치다 좌절하며 우울의 늪에 미끄려져 버릴 수 있는 여지를 어느새 건너뛰어 발을 딛고 걸음을 내딛기 시작한 것은 분명 은혜임에 틀림없다. 나는 언제나 예상 가능한 미래를 소망하였었다. 이것이 안정적일 것으로 생각하며 또 스스로 통제권을 가지는 전지전능을 추구하였다. 이는 분명 가당치 않는 꿈이며 하나님의 권위에 대한 도전임을 간과한 교만이다. 불안한 건 딱 질색인 안전주의자라고 자신을 규정해 온 참 부적절한 성도였다. 그가 떠난 후, 내 삶에 찾아온 여러 변화 가운데 하나는 자기 통제 욕구를 내려놓아야 함을 강력하게 인식한 것이다. 이제야 인간에게 예상 가능한 미래란 없다는 것을 깨달은 때문이다. 나는 그간 통제권을 스스로 사수해 온 것이 치명적인 오류임을 알고도 무시해 온 것을 회개하기로 했다. 물론 단번에 다 되지는 않을 것 같다. 그러나 주님께 간구하므로 은혜를 구하며 내려놓음을 계속 시도하고 있다.
무안 공항에서의 사고 소식을 접하고 나와 내 아이들은 우리의 삼겹줄 예배 시간에 남겨진 이들과 순적한 장례 절차를 위해 함께 기도했었다. 누구보다도 그 슬픔과 황망함에 공감할 수 있었기에…
올 한 해도 언제나 그랬듯 예측할 수 없는 각양 사고와 사건들이 계획되어 있을 것이다. 간혹은 직접적인 피해자이거나 슬픔을 깊이 공감하는 주변인의 자리에서… 사고나 사건 가운데는 역시 언제나 그랬듯이 기쁘고 행복한 에피소드도 있을 것을 믿는다. 그래서 오늘을 살아간다. 오늘을 주신 주님께 감사함으로… 그가 떠난 후, 한 두어 주쯤 시간이 지난 때였을 것 같다. 어느 주일 예배 때 대표기도자의 “오늘도 생명을 공급하시므로 새 날을 선물해 주신 주님의 은혜에 감사합니다.”라는 기도에 마음이 상했었다. 어느 날 갑자기 생명을 공급받지 못한 누군가는 새 날을 선물 받지 못했으니 은혜가 끊어졌다는 건가? 그래서 이는 그에게 재앙이란 말인가?라는 극히 호전적인 심사로 …. 그러나 곧 나는 이 생각이 슬픔에 갇혀 현실만 주목하는 발상임을 깨닫게 되었다. 그는 믿는 자의 가장 궁극의 소망인 천국에 이미 입성했으니 주님이 주시는 궁극의 선물, 영원한 생명을 누리는 영원한 평강 안에 있음을 믿는다. 최근 악뮤 이찬혁 군의 “장례 희망”이라는 노래를 들었다. 참으로…. 항상 교우들의 천국환송예배를 다녀온 후엔 자신의 예배 때는 모두 웃으며 행복한 마음으로 자신의 천국 입성을 축하해 주었으면 한다던 그가 떠올랐다.
'해피 뉴이어, 여보. 당신도 알겠지만 우린 새해를 맞았어. 당신이 가보지 않은 2025년. 참, 당신은 영원 안에 있으니 새해란 의미가 없겠네! 다 이룬 당신, 정말 멋져! 우리의 새해를 지켜줘. 언제나 다시 만날 날을 기대하고 있어. 사랑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