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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 많이 달랐던 크리스마스

그가 떠난 후(13)

by 김영주

이곳도 성탄절을 앞둔 얼마간은 쇼핑몰이 밤 10시까지 영업을 하는 특별한 기간이다. 한여름에 맞는 성탄절과 연말, 새해도 이제는 30년을 넘기고 보니 이미 익숙해져 오히려 평안하다. 그는 이 시즌이면 늘 가족들과 함께 쇼핑몰 나들이를 즐기곤 했다. 정작 쇼핑보다는 푸드코트에서 외식을 하거나 아이스크림을 먹거나 박싱데이 때 살 물건들을 아이쇼핑하는 정도였지만 그는 퇴근하여 집에 돌아오면 아이들과 내게 장난기 가득한 눈짓으로 조르거나 꼬드겨 함께 쇼핑몰을 향하곤 했었다. 아이들이 다 자란 후부터 내가 정한 새로운 규칙은 “성탄절은 예수님 생신이니 우리가 날짜 맞춰 선물을 받기보다는 12월 26일 박싱 데이 세일 이후에 서로에게 선물을 하자!”였다. 박싱데이는 권투와 연관된 날이 아니라 서양의 가장 큰 명절이며 가족들이 모두 모이는 성탄절 그 다음 날로 크리스마스 트리 아래 놓아둔 선물을 언박싱하는 날이라는 뜻으로 주로 상점들은 12월 26일부터 박싱 데이 세일을 시작한다. 그런데 이번 성탄 시즌엔 우리 식구 모두 마트의 식료품 장보기 외에는 함께 쇼핑몰 나들이를 하지 않았었다.


우리 가정은 성탄절엔 언제나 11시 예배를 드리곤 했다. 평소엔 1부에서 4부까지 나뉘어진 예배로 서로 만나지 못했던 분들을 만나 “메리 크리스마스”와 함께 안부와 축복을 나누고 부지런히 집으로 돌아간다. 그리고 이곳은 여름, 바야흐로 바비큐의 계절이고 보니 우리 “가자” 식구의 오랜 전통대로 각각 바비큐 준비를 하여 호수가 있는 파크에 모이곤 했다. 특히 바비큐에 진심이었던 그는 각종 바비큐 버너를 구비하고 있었을 뿐 아니라 피크닉용 테이블과 의자에 가제보까지 갖추고 가장 먼저 도착하여 자리를 잡고 장비를 펼쳐 모두를 위한 준비를 시작했었다. 그래서 오늘, 더욱 그의 모습이 눈앞에 어른거린다. 항상 기운찼고 유쾌했던 그는 고기를 굽고 오랜만에 만난 친구들과 안부를 나눌 때도 소소한 농담을 잊지 않았으며 언제나 그 자리에선 시끌벅적, 웃음소리가 그치지 않았었다. 작년부터는 몇몇 결혼한 친구의 자녀들과 손주도 함께 하여 언제 어디서나 꽃처럼 아름답고 사랑스러운 존재인 아가들의 재롱이 새로운 즐거움이 되었었다. 모두 둘러앉아 얘기를 나눌 때도 늘 유쾌하고 즐거웠었다. 여러 해를 알고 지내며 함께 웃고 울고 위로해 온 친구들과의 대화는 또 하나의 익숙한 편안함이었다. 저녁 무렵에 접어들면 다시 저녁 식사 준비를 위해 남편들이 바비큐 버너에 모여든다. 언제나 그랬듯 모두 한 마음으로 준비해 온 음식들은 모든 친구들이 함께 풍성히 누리고도 남아 서로 나누어 주기까지 했었다.


아이들이 다니는 현지인 교회는 성탄 예배를 24일 저녁에 드린다. 역시 성탄절이 이 나라 사람들에게 가장 큰 명절이고 보니 아마도 정작 25일에는 고향집, 혹은 본가에 모여 함께 하는 문화여서 그런 것 같다. 주일이 아니라서 교회 학교 없이 어린 자녀들과 함께 드리는 예배여 선 지 예배당 입구 앞에는 어린이들을 위한 색칠놀이 팩들이 준비되어 있는 것이 눈에 띄었다. 아기 예수가 태어나신 마구간과 구유에 누우신 아기 예수까지 구현해 놓은 단상에서는 예배 전 찬양의 시간, 몇몇 어린이들이 나와 말씀을 봉독 하는 시간이 있었는데 남반구 한켠의 교회에서도 이렇듯 다음 세대들을 향한 말씀의 전수가 이루어지고 있음에 흐뭇한 미소를 지었었다. 예배당에 나란히 자리를 잡은 가족들의 모습은 언제나 아름답다. 아직 한국 교회에서는 찾아보기 힘든 반바지 차림의 아버지들이 찬양 내내 나란히 섰는 자녀들과 어깨춤과 유쾌한 몸짓들로 함께하는 즐거움으로 가득한 예배였다. 이곳에서도 역시 예배 후 로비에서 서로 안부를 나누는 성도들로 가득했다. 나는 그곳 한켠에 놓인 소파에 앉아 성도 간의 따뜻하고 아름다운 교제의 광경을 바라보고 있었다. 나의 두 아이들도 그 무리에서 충분히 평안한 시간을 누리고 있음을 바라보며 흐뭇했었다. 그리고 방금 전까지 휠체어로 이동해야 하는 친구를 위해 기도를 해주고 있던 아들아이가 드디어 자신의 멘토를 만나 얘기를 나누고 있는 모습을 발견하였다. 지난 주일 아들은 멘토에게 “강하고 담대하라”는 문구가 적힌 머그컵을 선물 받았었다. 하나님께서 강력한 리더 모세를 잃은 차세대 리더 여호수아에게 힘 있게 전하신 말씀으로, 참으로 지금 아들에게 가장 필요한 말씀임에 틀림없다. 그래서 아들아이도 멘토를 위한 작은 선물을 준비해 가져갔으나 예배 전에는 어느 때보다 많았던 성도 가운데 만나지 못하여 애를 태우고 있던 중이었다. 조그만 컵에 초콜릿 무스를 담아 성도들에게 전하는 목사님 사모님께 감사의 눈인사를 하고 있을 때, 아들이 그의 멘토와 함께 내게로 다가오고 있는 모습을 발견하다. 이 교회에서는 청년들에게 동성(同性)의 장년 성도들과 일대일 멘토링 관계를 맺어주고 있다. 올해 초부터 아들아이와 멘토링으로 맺어진 스티브는 남편과 내 또래로 두 아들을 둔 아빠라고 한다. 가끔 우리 아이를 만나 식사를 하며 얘기를 나누곤 했다는 얘기를 들었었다. 신앙적 멘토링뿐 아니라 우리와 같은 이민자 부모들은 늘 자녀들에게 사회적 도움을 충분히 주지 못하고 있다는 안타까운 부채감 같은 것이 있는데 믿음의 선배인 현지인 멘토가 생긴 것에 남편과 나는 참 좋은 기회라 생각하며 감사했었다. 그리고 그는 남편의 천국환송예배 때도 함께 해 주었었고 그날 이후, 우리 아이를 여러 차례 만나 위로와 권면의 시간을 갖기도 했었다. 그가 다소 착잡한 표정으로 나를 향해 다가왔다. 잘 지내는지 안부를 묻고 아들에게 우리 삼겹줄 예배에 관해 들었다며 서로에게 도움이 되는 귀한 시간이라고 생각된다고 했다. 그리고 내게 “몹시 다른 성탄절”을 맞게 되었다며 안타까운 표정을 감추지 못했다. 나는 진심으로 가득한 따뜻한 위로를 전하고픈 그의 마음을 느낄 수 있었다. 언제나 조금은 난감해지는 "괜찮죠?" " 파이팅!" " 힘내" 보다 나은 위로로 느껴지는...


성탄절엔 아이들과 함께 우리 교회에 갔다. 언제나처럼 예배 30분 전에 도착하여 내가 늘 앉는 자리에 나란히 세 사람이 자리했다. 제일 먼저 그와 함께 새 가족 부를 섬겼던, 우리 아이들에게는 어려서부터 교회 안에서 함께 자란 오빠이자 형인 젊은 집사가 자리로 찾아와 우리 세 사람을 사랑의 마음을 담뿍 담은 허그로 맞아 주었다. 아이들이 함께 교회에 다닐 때부터도 우리 가족이 함께 나란히 앉아 예배를 드리는 날은 성탄절과 송구영신 예배 때뿐이었다. 딸아이는 주일학교에서 아들아이는 경찬팀 드러머로 그는 새 신자 부 담당으로 섬기고 있었기에 주일엔 늘 나 혼자 예배를 드리곤 했었고 성탄절이나 송구영신 예배 때도 늘 공사가 다망했던 그는 도착하여 기도를 마치고 바로 자리를 비웠다 예배 시작 직전에 우리 세 사람과 합류하여 나란히 자리하곤 했었다. 그러나 오늘은 나란히 앉은 우리 세 사람 곁에 그가 오지 않을 것을 안다. 그런데도 왠지 지금 교회 건물 어느 복도쯤에서 걸어 다니고 있을 것만 같다. 그가 떠난 후 얼마간 교회에 올 때마다 느꼈던 그 그리움이 또다시 찾아와 최근 몇 주간 꺼내 들지 않았던 손수건을 다시 꺼내 눈물을 닦았다.


예배 후에는 언제나 “가자” 모임의 전통대로 바비큐 차비를 하여 호수가 있는 공원으로 향했다. 오늘은 아들아이가 그의 장비를 싣고… 한국을 방문한 가정과 사정 상 참석하지 못한 가정이 있어 그 어느 해보다 단출한 바비큐 모임이었다. 모두 흥이 나지 않는 분위기에 다소 조용한 시간이었다. 마침 결혼한 친구의 자녀 가정이 도착했다. 작년엔 첫돌을 막 지냈던 친구의 손주는 이제 어느덧 두 살 배기가 되어 파크 잔디밭을 내달아 뛰어다녔다. 작년 바비큐 모임 때, 언젠가부터 할아버지가 장래희망이던 그는 친구의 손주인 그 아기를 어깨에 무등 태우고 잔디밭을 거닐었었는데.... 그 모습을 찍은 사진이 그의 폰에 여전히 남아 있다. 그날은 점심식사만 나누고 짐을 싸기 시작했었다. 그의 친구들은 그의 바비큐 버너를 닦으며 그간 친구 덕에 편하게 즐겼었다는 얘기를 나누며 떠난 친구를 추억하였다.


아들의 멘토인 스티브의 말처럼 이제 “참 다른 크리스마스”가 시작되었다. 내년에도 그다음 해에도 그러다 언젠가부터는 이 변화가 오히려 익숙해지는 날도 올 것이다. 세월이 가고 내가 나이 들어가며 기억의 세세한 조각들은 조금씩 소멸되어 갈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와 함께 했던 날들의 모든 추억은 결코 잊을 수 없는 그의 모습과 함께 언제나 빛나는 그리움으로 남아 있지 않을지... 메리 크리스마스, 여보. 사랑해, 언제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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