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가 떠난 후(12)
기상 시간이 일정치 않아졌지만 간밤에도 숙면을 했다. 그가 떠난 후 한동안은 그 이전부터의 오랜 불면증이 더욱 가중되어 한숨도 잠들지 못하던 시기가 있었으나 어느 날부터인지 잠들지 못하는 고통은 사라졌다. 참, 신기하고도 감사한 일이다. 시편 127장 2절 중 “그러므로 여호와께서 그의 사랑하시는 자에게는 잠을 주시는도다.” 의 말씀처럼 주님께서 내게 특별한 선물을 주신 것임에 틀림이 없다고 생각되는 일이다. 다만 일어나 지는 시간이 일정치 않을 뿐이다. 새벽 2시쯤에 잠에서 깨면 그래도 다시 잠을 청해 보려 하지만 새벽 3시쯤이라면 하나님께 간단한 아침 인사 겸 기도를 하고 핸드폰의 우리말 성경에서 시편을 찾아 3편씩 읽고 있다. 그중 오늘의 말씀을 정하여 한 절 혹은 두 절씩 역시 폰 노트에 저장하고 암송을 시작한다. 오늘 하루 혹은 며칠간 내가 붙잡을 말씀으로. 세네시 경에 깨어난 경우, 다시 잠시 눈을 붙이기도 하지만 잠이 들지 않는다면 일어나 맥북을 펴고 워드를 클릭하여 새로운 글을 위한 폴더를 만들고 글을 쓰기 시작한다. 그가 떠난 후 얼마간의 번민의 시간을 보낸 후 자리 잡은 나의 새로운 루틴이다.
7시에 딸아이의 폰에서 알람이 울리면 우리는 서로를 꼭 끌어안고 서로에게 “사랑합니다, 축복합니다, 은혜를 내려 주시옵소서.”라고 아침 인사를 나눈다, 이는 그가 떠나기 전부터 딸아이와 나의 아침 루틴이다. 아래층으로 내려가서 제일 먼저 그와 아침인사를 한다. 손가락으로 사진 속 그의 이마와 양 뺨, 코와 턱을 살포시 두드리며 그의 미소에 나의 미소를 보낸다. 아침 식사와 아들아이가 출근하는 날이면 도시락을 준비하고 재택근무를 하는 날이면 점심 식사를 위한 준비도 대충 해놓고 사부작사부작 집안 정리를 시작한다. 모두 어른들이니 특별히 정리할 것은 없지만 그래도 한 번 돌아보기는 해야 하니 … 세탁기를 돌리고 실내 자전거에 올라 유튜브에서 30분 정도 분량의 말씀영상클립을 골라 틀어 놓고 운동을 시작한다. 주로 이찬수 목사님, 조정민 목사님, 장일석 목사님 말씀인데 자주 듣기에 늘 알고리즘이 내 홈에 디스플레이해 주어 편리하다. 그가 떠난 후, 아침엔 친구들과의 통화도 나의 새로운 일상이 되었다. 출근길이나 강아지 산책길에 언제나 전화해 주는 친구 혹은 가끔 아침나절 전화를 해오는 친구들과의 통화는 소중한 시간이다. 이전보다 깊어진 대화를 나누게 된 시간이라 더욱 그렇다. 큐티와 그날의 온전한 기도는 나의 오래된 루틴이다. 나의 온전한 기도란 나와 내 가족을 위한 기도와 함께 친척들과 친구들, 교회와 도고기도가 필요한 교회 식구들 목장 식구들, 내가 섬기는 부서와 그 식구들, 내가 속해 있는 두 나라와 악한 영적 세계에 대한 주님의 승리, 전쟁으로 고통받는 땅을 위한 기도와 무도한 무력집단을 향한 주님의 심판을 요청하는 기도의 시간이다. 아침이나 점심에 특별한 일정이 있을 때는 가족 기도만 마치고 나머지 내용들은 그 일정들을 마친 후 조용한 시간을 찾아 다시 시도한다.
요즘엔 내년 새로운 도전을 앞두고 오래된 문법책을 펴고 하루 다섯 쳅터씩 공부를 하고 있다. 혼자 공부할 수 있도록 제작된 책으로 이미 수년 전에 한번 마쳤지만 다시 들여다보니 어쩜 그리도 새로운지. 그가 떠난 후 한동안 멈추었던 컴퓨터 필사도 다시 시작하였다. 역시 다섯 장씩 쓰며 읽고 있다. 이렇게 하루를 보내고 저녁 준비를 할 때 쯤, 창문 너머 하늘을 바라보다 문득 그의 이름을 부른다. 오늘 일정을 마쳤다고 말을 걸어 본다. 그런데 대답을 듣지 못한 것 같아 마음이 허전하다. 언제나 대답을 들었던 것은 아닌데 오늘은 좀 섭섭한 마음이 들었다.
그냥 바라보고 웃고 있어서일까? 저 하늘 너머에서….
아이들도 있고 친구들도 있고 교회 식구들도 있고 시도 때도 없이 말을 걸 수 있는 하나님도 계시고 조용히 부를 수 있는 성령님도 계시고 나를 위해 안타까이 중보 하실 예수님도 계신 줄 알지만 가끔 적적하고 쓸쓸하다. 그와 함께 살았던 날에는 한 번도 느껴보지 못한 공기이다. 생기로 떠들썩하던 나의 삶이 그가 떠난 후 모든 소리가 사라진 적막함의 순간을 감지하곤 한다. 저녁 준비를 하며 다시 그를 불러 보았다. 부엌에서 바로 보이는 곳에 그의 사진이 있는 콘솔이 있다. 미소 짓고 있는 그는 평안해 보인다. 그에게 다가가 그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행복해 보이기까지 하다. 그렇겠지! 다행이다. 그래서 그와 눈을 맞추고 나도 웃어 보인다. 어느 날은 여전히 눈물이 쏟아지기도 했다. 보고 있지만 보고 싶어서 따뜻하고 두툼했던 그의 손을 잡고 싶어서….
어제 딸아이는 아빠 목소리가 듣고 싶다고 했다. 그래서 몇 개 되지 않는 짧은 동영상 클립을 아이에게 전송해 주었다. 우리 식구들은 늘 생일날 함께 좀 특별한 저녁 식사를 하고 집으로 돌아와 식탁 가운데 자리에서 생일 케이크에 촛불을 밝히고 생일 노래를 부르는 의식을 해왔는데 누군가는 사진을 찍고 누군가는 피아노를 치기도 했다. 그런데 올해 남편의 생일에는 아들아이가 동영상을 찍었었나 보다. 언제나 유쾌한 그는 한껏 기분이 좋아 머리 위로 큰 하트도 올리고 생일 노래 내내 한껏 깜찍한 율동을 하고 있었고 노래가 끝나자 우리들의 이름을 부르며 모두에게 “알러뷰”를 고백하였었다. 코로나로 교회가 온라인으로만 예배가 가능했던 때, 목사님도 댁에서 설교를 녹화하여 보내셨고 대표기도자들도 각자 집에서 녹화하여 보냈었는데 그때의 영상도 있었다. 이발을 하지 못해 머리모양은 덥수룩했지만 단정하게 수트를 갖춰 입고 정성스레 기도문을 읽고 있는 그의 모습을 다시 볼 수 있어 좋았다, 그가 떠난 후, 한 집사님이 주일 예배 중 찍힌 그의 마지막 성찬식 봉사 모습의 영상을 보내주었었다. 이 또한 소중한 기억으로 간직하고 있다. 교회 동갑 친구들과 함께 떠났던 피지에서의 영상과 낚시터에서 큰 물고기를 만나 물속에서 펄떡 대는 물고기를 찍으며 신나 있던 그의 목소리가 생생하여 미소를 지었다. 늘 우리를 비롯하여 누군가를 찍어주기 좋아하던 그여서 그의 핸드폰에 남은 영상들은 다른 사람의 모습에 그는 목소리가 간혹 들릴 뿐이라 아쉬웠지만 그가 함께 살았던 날들의 추억이라 또한 소중하고 애틋하다.
이제 나는 더 이상 불행함에 매이지 않을 것을 결심했다.
“주께서 나의 슬픔이 변하여 춤이 되게 하시며 나의 베옷을 벗기고 기쁨의 띠를 띠우셨나이다.”(시 30:11)와 같은 날도 오게 될 것이다.
모든 기쁨이 사라진 것 같던 때, 매일 톡을 통해 말씀으로 안부를 물으시는 사모님께 “모든 기쁨이 사라진 제게 ‘ 항상 기뻐하라’라는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할 믿음을 주시길 기도해 주세요.”라고 톡을 보냈었다. 그때 사모님은 “권사님, 이전 기쁨은 사라졌지만 주님께서 새로운 기쁨을 주시길 간절히 기도합니다!!!”라는 답톡을 보내 주셨었다. 새로운 기쁨, 그때는 정말 그런 것이 있을지 상상할 수 없다고 생각했었다. 그러나 지금은 불행에 빠져 있지 않을 결심의 단계로 나름 비장하고 감정에는 단호하다. 그리고 새로운 기쁨에 대한 궁금함이 생겼다. 그래서 슬픔이 변하여 춤이 되게 하시는 날도 베옷을 벗기고 기쁨의 띠를 두르게 하시는 날도 올 것을 믿게 되었다. 이는 신실하신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이므로… 처음 글을 쓰려고 마음먹었을 때, 나의 수많은 감정의 엉킴 중 하나는 적적함에 대한 두려움도 있었다. 기쁨이나 생동감, 행복 같은 긍정적인 감정들이 일시에 셧다운 된 듯 사라졌고 한 번도 경험해 본 적 없는 절망과 좌절. 슬픔과 함께 몹시도 낯선 적적함이 가져다준 당혹감 때문이었다. 나는 적적함으로부터 벗어나려는 보다 능동적인 시도로 글쓰기를 시작했던 것 같다. 여전히 적적함은 시시때때로 밀려온다. 그러나 더 이상 나를 압도할 수는 없다. 적적함은 처음에는 당혹감이다 이후 잠시간 조금 익숙해진 낭패감으로 새롭게 다가왔었다. 그런데 어느 때부터였을까? 아마도 믿을 수 없던 그의 부재를 받아들이게 된 즈음부터였을 것 같다. 그 낭패감도 사라졌다. 그럼에도 그의 빈자리에 놓인 쓸쓸함은 여전히 내 것이다. 아마 언젠가 새로운 기쁨이 찾아오면 그리움과 함께 자리한 쓸쓸함이 사라질까? 아닐 것 같다. 그 자리만은 다만 쓸쓸함으로 계속 남아 있을 것 같다. 어떤 다른 모양이나 빛깔로 변화할 여지에는 가능성을 열어두지만 결코 사라질 수는 없을 것 같다. 그리고 어떻게 변하더라도 그 정체성은 다만 쓸쓸함인 채로 남아 있을 것이다. 이제는 이 또한 수용하기로 했다. 결코 잊을 수 없는 그가 떠난 빈자리에 남겨진 다만 쓸쓸함 마저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