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가 떠난 후(10)
매일 아침 그와의 인사로 하루를 시작한다. 언제나처럼 미소 짓고 있는 그는 나를 바라보고 있다.
“좋은 계절이야. 당신이 좋아하는 여름이잖아. 오늘도 날씨가 아주 좋을 것 같지? 빨래 아주 잘 마를 거야. ㅎㅎ. 오늘 타월 빠는 날이거든. 오늘도 잘 지낼게. 사랑해.”
최근에 생긴 변화는 그에게 얘기할 때 이제 슬픔을 배제하고 일상처럼 대화하려 한다. 그리움을 배제할 수는 없지만 적어도 슬픔은 걷어내려고 한다. 나를 위해서도 아이들을 위해서도 나와 우리 아이들을 걱정하는 사랑하는 분들을 위해서도 그리고 몸은 떠났어도 영은 여전히 있는 그를 위해.
시도 때도 없이 갑자기 날아드는 참소의 불화살이나 절망의 속삭임을 대적할 때마다 말씀을 암송하며 단호하게 대처하고 있다. 예수, 그 능력의 이름으로 대적하는 믿음의 방패도 적절히 사용 중이다. 참소의 불화살, 절망의 속삭임 모두 우열을 가릴 수 없이 악하다. 악은 악일 뿐 괜찮은 편은 결코 없다. 이렇게 중얼거리다 아이들의 눈에 띄었다. 의아해하는 아이들에게 엄마가 지금 아빠와 얘기하는 중이라거나 악한 영을 대적하느라 말씀을 선포하는 중이라고 설명해 주었다. 아들아이는 다른 사람들이 보면 놀라겠다고 염려했다. 나는 아들에게 엄마가 극히 상식적인 편이라 단지 집에서만 소리를 내고 있다고 안심시켰다. 밖에선 속엣말로 하면 되니까….
늘 그와 다니던 일주일 장보기는 간혹 우리 삼겹줄이 총출동하거나 평일에 가야 하는 날은 딸아이와 함께 다니고 있다. 그가 좋아하던 코코넛 워터를 지나치며 살며시 미소를 짓는다. 반갑다고 해얄 지 그립다고 해얄 지 슬픔보다는 뭐랄까? 쌉쌀한 느낌이다. 그가 떠난 후 처음 딸아이와 슈퍼마켓에서 장을 보고 물건을 차에 실을 때 눈물이 터졌었다. 차에 싣는 작업은 항상 그의 몫이었다. 그는 물건들을 차곡차곡 쌓아 차에 싣기의 달인이었으니까. 그러나 지금은 우리끼리 우리의 방식으로 잘 해내고 있다. 늘 함께 했던 일들이니 가끔은 그 쌉쌀한 느낌의 그리움이 스치지만 더 이상 울지 않으려 한다.(울게 된대도 별 수 없지만) 그리고 나는 속엣말로 그에게 말을 건다.
‘이제 나도 잘하고 있지?’
그는 한 달에 한 번씩 우리 집 세 개의 샤워부스 하수구에서 머리카락을 걸러내는 작업도 맡아주었었다. 그리고 그 일을 마치고는 늘 의기양양하여 내게 말했었다.
“나 죽으면 생각날 거야?”
왜 그런 말들을 했던 건지! 그가 떠나고 방치되었던 샤워부스마다 배수가 원활하지 않게 되어 이제는 내가 위생 장갑을 끼고 나섰다. 할 만했다. 물이 술술 잘 빠져나가는 것을 확인하고 그에게 말을 걸었다
“내가 했어. 할만하네! 그동안 고마웠어. 수고 많았어.”
나는 그다지 지혜롭지 못한 데다 까칠한 편으로 칭찬에 다소 인색한 아내였다. 아예 안 했던 건 아니지만 그에겐 충분치 않았을 것임에 틀림없다. 그러나 요즘 나는 사진틀 속에서 웃고 있는 그를 바라보며 감사와 엄지 척과 사랑을 수도 없이 보낸다. 뒤늦은 후회이나 결코 무의미하다고 생각지 않는다. 그는 지금 여기 없기도 하지만 또 있기도 하니까. 내가 그의 “있기도”함을 더욱 확신한 것은 한참 슬픔과 절망의 질곡을 헤매던 때의 일 때문이다. 그가 떠난 후 얼마 지나지 않았던 때였다. 나의 내면은 ‘너무 무서워!’라고 비명을 지르며 흐느끼고 있었고 그때 나는 나의 내면에서 급하고 단호한 음성을 들었었다
‘혼자가 아니야!’
어찌나 놀랐던지! 그 소리는 간절히 듣고 싶었던 그의 목소리로 들렸지만 실은 내 안에 계시는 성령님의 말씀이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나는 분명히 그때, 그의 목소리로 인지했었다.
나는 그가 좋아하던 에스프레소 머신을 다룰 줄 모른다. 기계 다루는데 큰 관심이 없는 대다 나이 들어가며 새로운 것을 배우는 것이 그다지 달갑지도 않았고 그가 언제든 커피를 내려주곤 해서 딱히 배울 필요가 없었다. 그래서 이제는 아들아이가 재택근무를 하는 날과 주말에만 마실 수 있다. 딸아이는 커피를 그다지 좋아하지 않아 관심이 없어 배워두지 않아 아들에게 가르쳐 달라고 하니 뭘 배우냐며 자기 있는 날만 마시라고 한다. 주중 3일간이 재택근무라 주말 포함 5번은 마실 수 있어 그렇게 하기로 했다. 어제 오전 휴식 시간에 아들아이는 잠시 부엌으로 나왔다. 나는 얼른 아이스 라테를 주문했는데 곧 들어가 봐야 한다며 나중에 내려주겠단다. 그래서 나는 콘솔 위 그를 바라보며 “여보, 얘가 지금 안 타주겠대. 난 지금 마시고 싶은데. 너무한 거 아냐?”라고 하니 아들아이는 “아빠! 정말 엄마는 언제나 일러쟁이야. 뭐든 아빠한테 일러 받치고.” 우리는 서로 마주 보고 웃었고 아들아이는 큰 컵 가득 아이스 라테를 담아 주었다.
그가 떠난 후 한 달이 된 시점이었을 거다. 그날 이후 처음으로 그가 떠나기 전까지 나의 아침 루틴이던 실내 자전거에 다시 오른 날이었다. 그가 떠난 후, 체중계 수치 상으로 큰 변화가 있었던 것은 아닌데 보는 분들마다 너무 야위었다며 안타까워하셔서 운동이라도 다시 해야 하는 것 아닐까 생각되었고 또 일상으로 돌아가보려는 의지로 일단 실내 자전거 타기를 다시 시작하기로 한 것이었다. 정신은 여전히 그다지 선명하지 못했었다. 조금 전까지도 이 일이 꿈이었으면 좋겠다고, 어서 깨어 그에게 “꿈에 당신이 죽었대! 얼마나 슬프고 놀랐던지…” 라며 얘기했으면 좋겠다고 생각하며 눈물을 훔친 후였다. 그때는 아직 하나님의 전신갑주를 생각도 못하고 있던 때로 참소의 불화살과 절망의 속삭임에 속수무책으로 당하며 흔들리고 끌려다니며 무너지기를 반복하던 때였다. 문득 나는
‘어떻게 살지? 비참해지면 어떻게 해!’ 라며 간교한 절망의 속삭임에 절망으로 반응했었던 것 같다. 그런데 그때 내 마음 안에 아주 급박한 그의 목소리가 들렸다. ‘그렇게 안 둬!’ 짧지만 단호한, 바로 그의 음성이었다. 지난번에 이어 두 번 째였지만 여전히 나는 놀랐었다. 구원의 투구도 의의 흉배도 진리의 허리띠도 평안의 복음으로 지은 신도 믿음의 방패도 말씀의 검도 생각지 못하던 때였다. 그런데 그 단호한 목소리가 맥없이 무너지려던 나를 일으켜 앉혔다.
그와 나는 모두 일하는 어머니 아래 자랐다. 그래서인지 특히 그는 내가 전업 주부이기를 더욱 바랐었다, 같은 경험을 가진 나 역시 동의하는 바였다. 그래도 간간히 내 일을 해보려는 시도 정도는 해보았었다. 허니문 베이비로 첫 아이가 찾아와 다니던 직장에서 퇴직한 후 얼마 지나지 않아 이민을 왔고 두 아이가 모두 초등학교에 다니게 되었을 때쯤, 한국에서 문예지 기자 일을 했었기에 이곳 한인잡지사에서 파트타임 기자로 근무하다 비교적 자유롭게 시간을 쓸 수 있다는 생각에 부동산 중개사에 도전해 보기도 했었다. 그러나 그쪽으론 그다지 재능이 없었던 것 같았고 한참 초등학생과 중학생이던 아이들을 양육할 때라 방과 후에는 아이들의 각종 레슨 픽업으로 늘 바빴기에 생각과 달랐던 시간 안배의 문제에 부닥쳐 길지 않게 경험한 정도였다. 그리고는 주로 그의 회사 행정과 회계 담당을 맡아했을 뿐이었다. 그러니 그가 떠난 후 적지 않은 나이에 경제적 홀로서기를 해야 하는 일은 내게 크나큰 도전이 아닐 수 없다. 그러나 새로운 도전을 위한 학교 입학도 순적하게 진행되고 있고 내 나이가 적지 않으나 반면 아이들이 이미 어른이라 오히려 큰 도움이 되고 나만의 시간 활용이 가능하니 공부와 글쓰기에도 충분한 시간을 낼 수 있는 장점도 있다. 그리고 이제는 하나님의 전신갑주를 갖추었으니 두려움의 마음보다 주님의 말씀을 더욱 붙잡기로 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것은 두려워하는 마음이 아니요 오직 능력과 사랑과 절제하는 마음이니.” (딤후 1:17)
또한 “나의 하나님이 그리스도 안에서 영광 가운데 그 풍성한대로 너희의 모든 쓸 것을 채우시리라.”(빌 4:19)를 비롯하여 수많은 말씀을 통해 하나님은 나를 비롯한 그의 자녀들에게 약속하셨다. 특히 시편 23편 1절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가 부족함이 없으리로다”의 영어 버전, “The Lord is my shepherd, I lack nothing! ” 중 이 부족함이 nothing일 것이라는 선언에 감사함으로 충만해진다. 그래서 어떤 불행도 예측하지 않을 예정이다. 다만 주님의 약속의 말씀만을 굳게 붙들고 문제가 아닌 주님만 바라보려 한다. 이미 성도라면 모두가 알고 있듯 모든 문제보다 크신 주님, 모든 지각에 뛰어나신 하나님의 평강이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내 마음과 생각을 지키신다는 말씀을 믿는 믿음으로….(빌 4:7)
아이들이 현지인 교회로 옮긴 지 어느덧 2년째이다. 한 4년여 전부터 그곳의 청년예배와 목장 예배만 다녔는데 어느 날 완전히 옮기겠다고 했을 때, 나는 말할 수 없이 서운했었다. 딸아이는 2살 반부터 아들아이는 이곳에서 태어나 유아세례를 받고 자라난 교회였기에 담임 목사님과 작별 인사를 나눌 때, 목사님도 눈물을 보이셨다고 한다. 몇몇 목사님들께 여쭈니 아이들의 교회가 건강한 교회라고 하고 교회를 떠나겠다는 것도 아니고 이미 성인인 아이들이 결정한 일이니 받아들이자고 그는 나를 다독이며 설득했었다. 그러나 그렇게 겉으론 쿨한 듯했지만 그는 나와 함께 기도할 때면, 아이들이 그 교회에서 배울 만한 것들을 잘 배워 다시 모교회로 돌아오게 해 주실 것을 간구했었다. 그가 떠난 후, 그 기도 내용을 아이들에게 전하니 아이들은 아빠의 반전에 아주 놀라워했었다. 자녀의 독립을 머리로는 이해하나 마음으론 늘 함께 하고픈 것이 부모 마음이니 유달리 정이 넘치는 그로선 더욱 그러했을 것이다. 아이들의 교회는 지역사회를 위한 특별한 성탄절 행사를 해왔었다. 한 여름에 성탄절을 맞는 이곳은 여기저기 여러 야외 행사들이 많은 편인데 이 교회는 성탄절을 앞둔 12월 중 며칠간 해가 저문 저녁 무렵부터 성도들이 교회 마당에 특별한 무대를 만들어 성경 말씀의 장면을 구현하여 지역 사회의 사람들이 드라이브 스루로 관람하기도 하고 교회 카페를 개방하여 준비한 공연을 선보여왔었는데 코로나 사태 이후 중단 되었었고 올해 다시 시작하게 되었다고 한다. 그가 떠난 후 우리 아이들은 행사 참여 신청이 늦어져 딸아이는 교회 카페일을 돕기로 하였고 아들은 팀을 짜지 못해 카페에서 혼자 찬양을 부르기로 했다. 나는 친구 가족과 함께 그곳을 찾았다. 그가 있었다면 아마 오늘도 그 답게 이 교회 분들과도 정답게 인사를 나누고 딸아이가 섬기는 모습과 아들아이의 공연을 동영상과 사진으로 담으며 한껏 신나 했었을 것이다. 아니 그는 모두 보고 있었을 것이다. 동영상보다 사진보다 영원히 살아있는 영으로 아이들을 바라보고 있었을 것이다.
'여보, 정말 멋지지! 우리 아이들. 당신 참 잘했어. 좋은 아빠였어. 고마워 사랑해.’
이번 주일 아들은 그 교회의 청소년 예배에서 설교를 할 예정이다. 두 달쯤 전에 담당 목사님의 요청을 받고 기도하며 준비해 왔었다. 어떻게든 시간을 맞추어 우리 교회 예배 전에 가보려 했더니 청소년 예배라 참관이 어렵다고 한다. 그래서 섭섭하게도 아들의 생애 첫 설교를 볼 수 없게 되었다. 하지만 그는 아마 또 보고 있을 것이다. 그래서 그에게 다시 부탁하였다.
“당신이 보고 있을 테니 안심이야. 나 대신 잘 지켜봐 줘. 정말 말할 수 없이 기쁘고 자랑스러워. 당신도 그렇지? 당신은 정말 최고의 아빠, 최고의 남편이야. 사랑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