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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울 변주곡

그가 떠난 후(20)

by 김영주

6월부터 겨울이 시작되면 거센 빗줄기를 각오해야 한다. 내가 사는 곳은 겨울에도 기온이 영하로 떨어지지 않으니 눈이 내리는 일은 없고 다만 겨울비가 이 계절의 메인 테마이다. 그래서 나의 겨울 BGM은 대체로 어둡고 슬픈 느낌의 단조이다.


그는 비 오는 날을 몹시 좋아했었다. 어렸을 적, 지붕에 타닥타닥 부딪히던 빗소리를 들으면 나른하여 솔솔 잠기운이 올만큼 평안함을 느꼈다는데 다시 이곳에 와서 아파트가 아닌 지붕 있는 집에 살게 되며 그 어린 날의 추억을 다시 소환하게 되었다고 했다. 그래서 비가 오는 날이면 침대에 걸터앉아 창밖을 한참 동안 내다보며 어린 날의 평안을 추억하던 그의 뒷모습이 그립다. 그러나 나는 저혈압 탓인지 기압이 낮아지는 비 오는 날엔 두통으로 몸도 마음도 한껏 무거워 겨울, 특히 비 오는 겨울날은 심지어 두렵기 조차한, 참 싫은 계절이다. 그리고 올해도 어김없이 겨울이 시작되었다. 2월부터 시작된 통역 공부가 마지막을 향해 달려가고 있었다. 굵직굵직한 과제들의 제출일이 정해지고 또한 드디어 시험 날짜도 공고되었다. 소정의 과정을 마치면 졸업 증서가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성적에 따라 과락이 존재하므로 스트레스는 한도초과였다. 나는 두 과목의 과정을 공부하고 있었는데 이 두 과목의 이수를 위한 하이라이트는 10분 분량의 프레젠테이션과, 150 단어로 작성해야 하는 에세이 5개 문항을 포함한 37개 문항의 필기시험, 그리고 45분이 소요될 예정인 구두시험으로 세 종류의 통역과 1페이지 분량의 현장 번역이었다. 과제를 먼저 준비해 제출하고 바야흐로 시험공부, 특히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하고 있는 구두시험이 가장 큰 무게로 나의 온 신경세포를 누르고 있었다. 어느 때보다 절실하였기에 더욱 그러했겠지. 어느 날은 참담함으로 한숨이 절로 나왔고 어느 날은 급기야 눈물까지 쏟았었다. 공부하는 동안엔 적어도 절망과 희망이 교차했었는데 시험을 앞두고 보니 희망의 가닥은 어디론가 사라져 소멸한 듯했었다. 그리고 특히, 겨울.... 평소에도 두통을 유발하던 겨울이기에...


딸아이는 가끔 나를 바라보고 웃곤 한다. 왜 웃냐고 물으면 그 착하디 착한 얼굴로 "엄마가 있으니까...."라고 대답한다. 그가 떠난 후... 부터였다. 어느 날 아침, 갑자기 떠난 아빠로 인해 여전히 제 곁에 있는 엄마의 존재가 안심이 되는 가 보다. 딸아이도 내 체질을 물려받은 건지 비 오는 날엔 두통으로 통 맥이 없고 기운을 차리지 못한다. 그런데 그날은 몹시 비 오는 날이었고 시립병원에서 볼런티어를 하고 집으로 돌아온 날이었다. 두통 때문인지 기분이 좋아 보이지 않았고 집에 돌아와서는 제 방 침대에 앉아 울음을 터뜨렸다. 무슨 일이냐고 물으니 한사코 말없이 눈물만 흘리던 딸아이가 드디어 말을 꺼냈다. "엄마도 떠나면 나는 어떻게 해..." 그날 딸아이는 저녁 무렵, 삼겹줄 예배를 마친 후 겨우 눈물을 그쳤었다.


아이들 앞에선 눈물을 보일 수 없어 아이들이 집에 없을 때나 혼자 차를 타고 가면서 하나님과 떠난 그를 향해 묻어 둔 감정을 목놓아 쏟아내곤 한다. 혹은 큐티를 하거나 공부한다며 방문을 닫아 놓은 후 숨죽여 울음을 터뜨리기도 한다. 그날도 정말이지 참을 수는 없었다. 아니 실은 어느 때보다도 더욱 그러했었다. 폭우가 쏟아지는 중이라 차를 타고 나갈 수도 없고 아들아이는 재택근무 중이며 딸아이도 제 방에서 울고 있었다. 나는 울고 있는 딸아이를 힘써 달래고 내 방으로 들어가 방문을 닫았다. 그즈음 내가 주님을 향해 가장 많이 했던 말은 '무서워 죽겠어요. 저 좀 도와주세요!'였다. 예수를 믿는 성도로서 부끄럽고 죄송한 고백이지만 나는 나의 나약함을 그렇게 터뜨릴 뿐이었다. 그리고 그날은 정말, 멱까지 차오른 슬픔과 공포가 나를 짓눌렀다. 그가 떠난 후, 오직 나의 바람은 성도로서 엄마로서 내 역할을 잘 감당하다 주님께 가는 것이다. 어느 하루도 그 기도를 잊은 적이 없었다. 그런데 참으로 영육 간에 연약하기 그지없는 나는 수도 없이 절망하여 무너지곤 하였다. 그러다 다시 일어나게 하시는 것은 참으로 주님께서 조용히 나를 부축하여 일으키시는 것임에 틀림없었다. 그러나 그날은 절망처럼 퍼붓는 빗속에 내 마음은 더욱 주저앉았고 놀랍게도 죽음을 종용하는 사악한 회유의 소리마저 들려왔었다. 혼란스러웠다. 불길한 곡조가 뒤엉킨 불협화음으로 머릿속은 깨질 듯 복잡했다. 기도할 수도,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부를 수도 없었다. 그러나 결국 나는 절망 가운데 간신히 숨을 고르며 그 목소리를 향해 단호하게 말할 수 있었다. 아니 이번에도 내 안의 성령님께서 그와 같이 할 수 있도록 나를 붙드셨을 것이다. '나는 너를 안다. 악한 것! 내게서 떠나라!' 그렇게 나는 그 저열하고 파괴적인 회유를 밟을 수 있었다. 꾸역꾸역 아이들의 저녁식사를 준비하고 또 꾸역꾸역 저녁 온라인 수업을 마치고 아이들과 함께 삼겹줄 예배를 드렸다. 딸아이의 눈물도 잦아들었다. 아이들과 말씀을 나누고 서로를 위로하며 또 하루를 살아내었었다.


잘 해낸 걸까? 몇 가지 턱없는 실수로 몸서리를 치게 한 통역 구두시험과 각각 150 단어로 작성해야 하는 5개 문항의 에세이 시험에서 150 단어를 넘긴 3개 문항의 수정을 하느라 시간에 쫓겼던 필기시험은 아찔하기 그지없었다. 그러나 프레젠테이션 도중 테크니컬 이슈로 비주얼 PPT 자료의 페이지가 원활하게 넘어가지 않아 중간쯤까지 진행된 후 다시 처음부터 할 수 있는 기회를 얻은 것은 정말 기적이었다. 몇몇 학생들이 제한된 시간을 넘겼다며 발표를 마치지 못하고 중단하는 일도 있었기 때문이다. 시험을 마치고 초조하게 결과를 기다리는 동안도 내 마음은 늘 웅크린 채 울부짖고 있었다. 수업을 듣는 내내도 여간 위축되어 있던 것이 아니었다. 원어민이나 다름없는 사모아인, 마오리, 통아인, 이미 경찰관으로 근무 중인 중국인, 이곳에서 중국인의 이민 역사는 유구하여 일명 바나나, 겉모습은 아시안이나 현지인 교육을 받아 영어 실력은 원어민 수준인 중국인들, 이미 병원이나 난민 수용소에서 통역사로 일하고 있는 러시아 친구와 아프간 친구들까지, 모두 탄탄한 영어실력을 갖춘 이들 가운데 나이 들고 소심한 만학도인 나는 언제나 조용하기 그지없는 내향형 인물이었다. 2주간의 시험을 마치고 성적을 기다리는 동안, 나의 절실함은 눈물의 기도로 이어졌었다. 프레젠테이션으로 마친 과목의 성적을 받아 들고 감사기도를 하였다. 그런데 어처구니없는 실수로 가장 걱정스러운 구두시험이 있는 과목의 성적을 기다리는 동안, 불안함은 극에 달했었다. 하루 종일 초조하다 다만 삼겹줄 예배 때, 아들아이의 나를 향한 기도, "엄마가 그 쉽디 쉬운 공부의 시험 결과가 지나치도록 훌륭하게 나와 멋진 통역사가 되게 해 주세요." 어렸을 때나 서른이 넘은 어른이 되어서나 역시 아이들 때문에 웃는다.


금요일 오후, 드디어 성적이 나왔다. "주님! 감사합니다. 모두 주님이 하셨어요." 그리고 그날 저녁, 전 목장식구들의 저녁식사에 초대되었었다. 마침 결과가 나와 기쁜 소식을 함께 나눌 수 있었다. 어쩜 자신의 일처럼 기뻐해 주던지... 고마움으로 감동스럽기까지 했다. 토요일 오전에는 딸아이와 함께 미용실에 갔었다. 우리 교회 집사님 부부가 운영하는 곳으로 온 가족의 오랜 단골이다. 그리고 그 가정은 남편의 열매이기도 하다. 남편이 불신자와 초신자들을 양육하는 알파 코스의 담당 장로로 섬길 때, 그들을 교회로 인도하였고 이제는 부부 모두 바쁜 시간을 쪼개어 찬양대원으로 마더와이즈와 교회 카페봉사자로 섬기고 있다. 남편 집사님은 이제 불신자로 감지되는 손님들에게는 노련하게 전도를 시도한다. 그날도 2월에 이곳에 도착했다는 한 가족에게 적절히 밀당의 기술까지 활용하며 전도를 하고 있었다. 얼마나 감사하고 뿌듯했던지... 집사님에게 더블 엄지 척으로 감동을 표하니 아내 집사님은 "머리 자른 지 얼마 되지도 않아 다듬을 것조차 없을 때에도 나타나셔서 밀당 전도하셨던 장로님처럼 하나 보죠." 라며 웃는다. 그리고는 아이들 픽업 다녀오겠다고 나갔다 들어오더니 "권사님 축하드립니다"라는 캡션이 화이트 초콜릿 플레이트 위에 아로새겨진 큼지막한 케이크를 내게 안겨 주었다. 이 가정도 나의 결과를 기도하며 기다리고 있었던가 보다. 감사함으로 목이 메었다. 목사님 사모님께 수줍게 카톡으로 소식을 전하였더니 따뜻한 격려와 사랑스러운 이모티콘으로 함께 기뻐해 주셨다. 남편이 맡았던 목장의 신실한 부목자였던 집사님이 남편이 떠난 후 목장을 맡아 주었다. 목자 집사님은 물론 목장 식구들 모두 기도해 주었기에 소식을 알리니 이 착하디 착한 집사님은 감사함에 목이 메어 말을 잇지 못하였다. 나 역시 그 사랑이 감사하여 목이 메었다. 주일 예배, 강대상을 향해 입장하시던 목사님은 내게 엄지 척으로 격려해 주시더니 예배를 마치고 나오시면서는 주먹콩! 악수를 청하신다. 조심스레 다가와 공부가 끝났는지 묻는 분들에게도 기쁜 소식을 알리니 모두 정말 본인의 일인 듯 기뻐해 주었다. 오늘 나의 BGM은 장조로 다듬어진 선율이었다. 나의 겨울날의 음률이 그날, 변주를 시작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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