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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재이 Jan 15. 2023

오늘은 가사없는 노래를 듣겠어요




오늘은 하루종일 가사가 없는 노래를 들을래요. 그러고 싶어요. 눈이 펑펑 내리다 이내 잦아들어 자잘한 눈발이 내리는 날이네요. 창 밖 너머로 보는 건 참 아름다운데 저 풍경 속에 들어가는 건, 글쎄요. 난 그냥 오늘은 이렇게 우두커니 창문 앞에 서서 가만히 보기만 할래요. 온도도 감촉도 모른 채로 그냥 이렇게 보기만 할래요.







아무 가사가 없는 음악만 찾아 들어요. 이를테면 류이치 사카모토 같은. 가사가 없는 부분을 생각으로 채워요. 날씨는 흐리고 음악은 흐르고 생각은 선율에 따라 요동쳐요. 마음이 잔잔하게 고요해질 때까지 기다리려면 몇 곡 쯤을 더 들어야 할까요. 오늘 서울은 하루종일 '흐림'인데. 눈이 내렸다 그쳤다를 반복해요.








눈이 내리니까 차들이 느릿느릿 도로를 기어가요. 내 생각도 그 흐름에 속도를 맞춰요. 느리게, 느리게, 좀 더 천천히, 차곡차곡, 내가 가장 잘하는 건 이런거죠. 오늘 듣는 음악은 정말 가사가 필요 없어요. 한 마디도요. 내가 다 채우면 되니까요. 나는 속으로 이런저런 가사를 덧붙여요. 대충 노래랑 맞아 떨어지면 혼자 묘한 쾌감을 느끼기도 하고요. 눈이 내리는 속도나 도로의 차들이 움직이는 속도에 내 마음의 속도를 가만가만 맞춰보기도 해요. 오늘은 이렇게 오후를 보내는 것만으로도 충만할 것 같아요. 오늘 서울은 창문 안에선 이리도 안전한데.






나는 용서 못할 게 하나도 없어요. '용서'라는 단어를 떠올리기가 무색하게 그런 게 이미 필요가 없어요. 난 이미 다 용서했는데. 나는 나쁜 건 잘 잊어요. 기억이, 잘 안나요. 굳이 떠올리자면 아팠던 것도 같은데, 글쎄요. 저 뿌옇고 흐린 하늘처럼 이미 너무 희끄무레한걸요.






이토록 유익한 주말이네요. 가사가 없는 노래와 회색 날씨만 있다면요. 나는 몇 곡이나 들었을까요. 사각사각 과일을 깎아 먹어요. 혼자 가구를 좀 옮겼는데요. 어느 틈에 다친건지 왼쪽 엄지에서 피가 났더라구요. 몰랐어요, 전혀. 이것저것 해 뿌듯한 날이었는데. 다치긴 또 다쳤네요. 아무렴 어때요. 내 플레이리스트엔 아직도 클래식과 피아노연주곡과 뉴에이지를 포함한 많은 가사 없는 노래들이 남아 있어요.







따뜻한 차를 한 잔 마셔야겠다고 생각했어요. 물을 끓이고 귤피차를 꺼내왔어요. 나는 내가 좋아하는 유리잔에 정성스레 차를 우려 냈어요. 마음 놓고 마셔도 될 정도로 충분히 식었지만, 온 몸에 따뜻한 기운이 돌만큼 여전히 따뜻한 차를 나는 홀짝홀짝 마셨어요. 아, 나는 그 사이 내 머릿 속을 헤집고 부유하던 생각들이 각자 어느 정도 방향을 찾아가기 시작했다고 느꼈어요. 완벽할 필요는 전혀 없지만, 최선을 다해 각자의 방향을 찾은 생각들이 나는 고마워요. 한 모금 남은 차를 마저 마시면서 난 선명하게 깨달아요. 이제 어느 부분에서 에너지를 비축하면서 어느 부분에 더 열정을 쏟아야 할지.






왜일까요.  밖을 계속 보다가 나가야겠다는 생각이  . 나는 하루종일 틀어뒀던 음악을 멈추고 서둘러 옷을 챙겨 입었어요. 눈이 오고  뒤엔 훨씬 추워질 거라고 했는데.  전에 가야할 곳이, 만나야  사람이, 해야  말이 생각났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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