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이재이 Dec 12. 2022

밖엔 비가 투두둑 내려





나는 좋아하는 향의 바디워시로 따뜻한 물을 맞으며 오랜 목욕을 했어요. 김이 피어오르고 포근한 향이 온 욕실에 번지면 나는 눈을 감고 얼굴에 샤워기 물을 맞아요. 비를 맞듯이. 밖은 너무 추웠어요. 하지만 이곳에선 물에 흠뻑 젖어도 이토록 안전한걸요.


비 오는 날엔 역시 재즈지. 

키스 자렛과 빌 에반스를 듣다 역시 쳇 베이커로 마무리 해요. 아, 실은 쳇 베이커로 마무리 하기 전에 에이미 와인하우스의 곡을 몇 곡 들었어요. 'You know I'm no good'을 재생하자마자 투두둥 탁, 드럼소리와 둥- 둥둥 하는 베이스 소리에 단박에 설레고 말았어요. 순식간에 노래는 끝나버리고 나는 아쉬운 마음에 'Love is a losing game'을 바로 연달아 들었어요. Love is a losing game 이라는데 그런가요, 정말? 난 참 야속하게도 질 줄을 몰라요. 그게 내 잘못이라면 잘못이었을까요. 쏴아아- 하는 샤워기 물을 맞으며 다 잊어요. 사랑은 지는 게임. 지는 게임. 게임.







이제는 겨울이에요, 정말. 이상하게도 올해는 겨울이 영영 안 올 것만 같았는데 기어코 겨울이 오고 말았어요. 겨울비가 내리니 부쩍 쌀쌀해져요. 내일은 영하 10도까지 기온이 떨어질 거라고 해서 나는 덜컥 겁이 났어요. 올해만큼은 겨울이 안 왔으면 좋겠다고 생각한 건 언제부터 였을까요. 두 달 전 쯤이었던 것 같은데 까마득한 옛날처럼 느껴져요. 모든 감각이 무뎌져요. 나는 겨울을 어떻게 보낼지 고민해요. 예민한 것과 둔감한 것 사이에서 고민하다 올 겨울은 둔감하게 보내기로 해요. 예민한 건 필연적으로 피로를 낳을 테니까. 올해는 둔-하게 마무리하면 좀 따뜻할 수 있을까요.








"다채로움을 줄게. 너는 뭘 줄 수 있니."


나는 할말을 잃어요. 정말, 사실은 몰랐어요. 짜증날 순 있어도 이토록 성가실 줄은 몰랐어요. 정말로. 울 거라곤 생각을 못했어요, 단 한 순간도. 정말 진심으로 마음이 아플 수 있을 거라곤 생각을 못했어요. 아니, 마음이 아프다고 표현하니 또 너무 유치하고 웃겨져 버리는데, 뭐랄까. 달리 표현할 말이 없네요. 피곤했다고 하면 비슷할까요. 나는 단어를 고르고 고르다 포기해요. 그게 뭐 중요한가요. 나쁜 의도는 없었단 거 아는데, 나쁜 의도가 없었다 해도 반복적으로 고통스러워하는 상대를 알면서도 그런 말을 계속 하는 건, 스스럼없이 그런 행동과 말을 하는건, 다 들켜버리는 건, 정말 잘못이 없는 걸까요. '나쁜 의도'는 없었으니 그걸로 되는 걸까요. 결과적으로 그건 나쁜가요, 나쁘지 않은가요. 다채롭긴 하니 그걸로 된 건가요.








다양한 맛의 사탕을 쫙 깔아놓고 하나씩 맛보게 하는 거예요. 나는 내가 좋아하는, 내 입맛에 맞는, 맛있는 맛만 먹고 싶어요. 그리고 그게 무슨 맛인지도 대충 알아요. 그래도 강제로 이것저것, 좋아하는 맛, 싫어하는 맛, 그저 그런 맛, 그냥 다양하게 무조건 다 맛보는 거예요. 실은 나는 내가 좋아하는 맛이 뭔지 이미 어느정도 다 알고 있는데. 사람 취향이란 게 참 바뀌기가 힘들어요. 성향이란 것도 결국엔 크게 변하지 않는 것 같아요. 나는 10년 전이나 지금이나 내가 절대 참을 수 없는 것과 관대하게 용인해 줄 수 있는 영역이 어느 정도 비슷해요. 정말이지, 크게 다르지가 않아요. 그래도 내게 다채로움을 준다고 했으니 그렇게 그냥 아 어어, 이런 것도 있네. 하면서 강제로 다양한 맛을 맛보는 식이에요. 덕분에 '절대 싫은 맛', '무조건 뱉어버리는 맛'이 뭔지 확실히 알게 됐으니 그걸로 된 걸까요. 아무리 포장지가 화려해도 절대 먹지 않을 맛을 가진 사탕이 뭔지 나는 알아요, 확실히.








올해 가장 많이 웃었던 순간이 언제인지 생각하면, 그냥 진짜 별것 아닌걸로 깔깔 웃었던 게 언젠지 생각하면 나는 답이 명확해져요. 미안해져요. 고마워져요. 고맙고 미안하다고 말하고 싶어져요. 시답잖은 농담을 주고 받으면서, 말도 안 되는 노래나 같이 부르면서 같이 웃고 싶어져요. 그냥 그저 같이 웃고 싶어져요. 바보같은 웃음소리로, 비슷한 웃음으로, 웃고 싶어져요. 마주보고서, 웃고 싶어져요. 정말 별것도 아닌 걸로 많이 웃었는데. 그냥 웃긴 말을 하지 않아도 웃겼는데. 뭘 해도 웃겼는데. 말도 안되는 춤을 추면서, 말도 안되는 가사의 노래를 부르면서. 그냥 그걸로도 충분했는데. 웃겼는데, 엄청. 지금 생각하니 미친 것 같기도 하고 그래요.









문득 피아노가 너무 치고 싶어졌어요. 덜 마른 머리를 아무렇게나 집게핀으로 고정 시켜놓고 즉흥적으로 아무렇게나 두들기는 피아노는 정말이지 너무 강력한 정화작용을 해요. 그야말로 카타르시스. 페달을 지그시 밟으면서 건반의 울림을 느끼면 그게 그렇게 행복할 수가 없는데. 그렇게 한참을 집중하고 나서 집게핀을 풀면 머리가 다 말라있곤 했던 그 순간이 나는 그리워져요.



내가 줄 수 있는 건 뭘까. 어떤 걸 줬을까 나는. 나는, 나는, 나는. 애석하게도 나는, 아무것도 주지 못한 것 같아요.










약점이 된다는 건 그런걸까요. 그게 내 약점이 될 줄 몰랐는데, 한해를 돌이켜보니 너무 선명해져요. 결국 그렇게 되었다고, 나는 생각해요. 물러진 게 잘못이라면 잘못일까요. 나는, 나는. 나는 당신을 잘 안다고 생각했지만, 사실은 아무것도 몰라요. 하나도 몰라요. 모르겠어요. 마음대로 생각해요. 사실 이런 건 조금도 중요치 않아요. 다만 나는 아주 조-금 두려워요.





상대는 내 약점을 이용할만큼 악질은 아니지만, 나는 약점을 들키지 않을 자신이 없어요. 그래서 그래요.








맨들맨들 보드라운 살갗이 거칠고 날카로운 표면에 사정없이 쓸려요. 살점이 떨어져 나가고 피가 줄줄 흘러도 안 아픈 척 할 수 있어요. 하나-도 안 아픈 척 하면 그만이에요. 안 아픈 척은 할 수 있는데, 피가 계속 나면 다친 걸 들켜버리잖아요. 딱지가 앉을 때까지의 시간이 필요한데, 딱지가 앉아야 하는데, 그걸 못 기다려요. 쓸리고 또 쓸려요. 딱지가 앉기 전에. 그래서 안 아픈 척 하지 않아도 될 지경이에요. 이젠 처음처럼 아프지 않으니까. 그래도 딱지가 앉기까진 시간이 필요해요. 새살이 돋아 딱지가 떨어질 때까지의 시간이 필요해요. 흉이 남지 않으려면 연고도 잘 발라줘야 하구요. 연고 바르는 건 귀찮다 해도 딱지는 좀 앉게 두자구요, 제발. 근데 그게 맘처럼 잘 안 돼요 -



 







특별할 것도 대단할 것도 없는데, 결국 다 사소한 것 때문에.









재밌으면 되고 즐거우면 되는데, 그냥 그거면 되는데. 같이 있을 때 재밌게 놀고 즐겁게 웃고. 이런저런 얘기를 나누고, 아무 얘기나 막 할 수 있는. 어린애처럼, 가장 순순했던 때로 돌아갈 수 있게 해주는. 켜켜이 쌓이는 그런 순간들. 그런 걸 나눌 수 있다면.



열심히 모래성을 쌓다 파도가 확- 덮쳐서 모래성이 와르르 무너져도 으아앙-하고 그 자리에서 울어버리는 게 아니라, "밥 먹자" 하는 엄마의 부름에 미련없이 무너진 모래성을 뒤로 한 채, 아니 오히려 밟으면서 밥을 먹으러 가는 그런 어린아이의 태도.


그런 건 어떻게 다시 가질 수 있을까요, 그런 마음가짐. 어릴 땐 참 잘 됐던 것 같은데. 누가 가르쳐주지 않아도.










"진지하게 만나보고 싶어요"


를 거절하는 게 많고 많은 거절 중 12월의 마지막 거절이 될 줄은 나는 몰랐어요. 그리고 이 거절을 이렇게 말하는 것은 이게 또 다른 내 약점으로 은연중에 자리잡길 원치 않기 때문이에요. 전력질주하다 팍- 넘어지면, 넘어져서 무릎이 까지고 피가 나고 아파보면, 다음 번엔 뛰면서 조심하는 법이잖아요. 그게 당연하잖아요. 아예 뛰지 않기로 결심하는 게 아니라 전력질주하지 않고 속도를 늦춰 조심조심 뛰기로, 주변에 돌뿌리는 없는지 주변을 살피면서 뛰기로 하는 건 당연한 거 잖아요. 나는 그렇게 스스로를 합리화 했어요.








창문을 열었더니 비가 너무 세차게 쏟아져서 얼굴에 빗물이 살짝 튀었어요. 내친김에 나는 창문을 활짝 열어 젖히고 창밖으로 얼굴을 내밀어 깜깜한 밤하늘을 봤어요. 하늘은 어둡고도 뿌얘서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지만, 나는 그렇게 했어요. 아까 샤워기 물을 맞았을 때와 비슷하게 빗물이 타닥타닥 내 얼굴을 사정없이 강타했어요. 다른 게 있다면 샤워기 물은 따뜻하고 빗물은 차가워요. 아주, 차가워요. 그때 따뜻한 물줄기가 볼을 타고 흐르는 게 느껴져 나는 창문을 닫았어요. 


따뜻한 물로 세수를 해야지, 나는 생각했어요.




 




이전 08화 불을 켜놓고 외출하는 마음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