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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재이 Dec 23. 2022

밖엔 눈이 쌓였어요




나는 눈이 모조리 녹아버렸으면, 하다가도 오래오래 있었으면 하고 생각했어요. 뽀득뽀득 밟히는 눈이 오래 남아 있어줬으면, 하고요. 뭔가가 쌓였다는 건, 그것이 사라진 시간보다도 새롭게 생겨난 시간이 더 많다는 뜻이니까요. 없어져버리기 전에 그 시간보다 더 빠른 속도로 사라지는 양에 더해 남아 있는 양까지 더 많이 생겨났기 때문이니까요. 그 흔적이 스르르 다-아 녹아버리면, 너무 아쉬울 것 같았어요. 그냥 그랬어요.







넌 이상을 추구하는 것 같애.

-응? 무슨 말이야?

이상적인 걸 바라고 또 그렇게 되려고 부단히 노력하는 게 느껴진달까, '이상적'이고 '이상을 추구한다'는 게 널 가까이 옆에서 보면서 내가 느낀거야.

-뭐야, 뭐 플라톤이야?


우스갯소리로 우린 이런 얘길했어요. 이상을 추구한다, 그럴까요. 역설적이게도 나는 '이상적'인 건 실재한다고 생각하지 않는데. "~라면 이상적이겠지만"하고 언제나 현실의 배반을 수용하는 편인데, 그렇게 느껴진다는 걸 보면 또 역시 나는 나만의 확고한 기준이 있고 그게 또 제법 엄격한가봐요. 이런 내가 스스로도 조금 피곤하긴 하지만 나 자신이 원망스러울 정도는 아니에요. 이런 나의 기준과 예민함과 까다로움이 없었다면 지금의 나는 없었을 테니까. 지금의 내가 있기까지, 분명 그 모든 것들이 도움이 됐다고 생각하니까. 그냥 대충, 적당히, 두루뭉술하게 치부하고 뭉쳐두고 지나왔다면 결코 이뤄낼 수 없었을 것들, 가지지 못했을 것들, 하나하나 소중하게 성취해왔다고 생각하니까.


열정이란 게 억지로 생겨나는 게 아니란 걸 알아버리니까 더없이 소중해요. 굳게 마음 먹는다고 해서 맘 먹은대로 움켜쥘 수 없는 그런 것들이, 너무 소중해요.

 






올 한해는 얼마나 겁없이 설치고 또 얼마나 겁먹고 몸을 사렸을까요. 하-얗게 소복히 쌓인 눈을 성큼성큼 밟으면서 나는 그런 생각을 했어요. 옆 골목으로 들어서자 눈이 빙판길을 만들어 골목이 제법 미끄러웠어요. 나는 보폭과 걷는 속도를 조금 줄이고 주머니에서 손을 뺐어요. 아까 전 골목에서 눈을 밟았을 때처럼 주머니에 손을 찔러놓고 빠른 속도로 저벅저벅 걷는 건 위험하단 걸 아니까요. 뭔가를 생각도 하기전에 나는 자연스럽게 그렇게 했어요. 넘어지면, 아프니까. 아프단 걸 아니까. 비단 골목길을 걷는데도 이렇게 자연스럽게 몸이 습득한대로 움직이는데 얼마나 많은 순간 망설이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용기를 내고, 안 쫄고, 혹은 쫄지 않는 척(?)해 왔을까요.


난 참 겁이 없다고 생각했는데, 겁 내선 안 된다고 생각했는데, 해가 지날수록 점점 겁이 많아져요.







너 머리 빨리 길어?

-응, 그런 것 같아.

그래?

-난 단백질이 머리카락이랑 손톱으로 다 가나 봐.

그럼 너 지금 머리 길이에서 가슴 밑 정도까지 기르려면 얼마나 걸려?

-음…글쎄, 한 세 달? 정도 걸리지 않을까. 좀 더 걸릴 수도 있고.

그럼 너 머리 거기까지 길 때까지만 평일에 한 번씩 나랑 밥 먹자.


머리가, 길 때 까지, 밥을, 먹자.




머리가 길 때까지만.



그 말을 들었을 땐 어 뭐, 그러지뭐. 하고 넘겼는데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오글거리고 왠지 느끼하지 뭐예요. 그 말을 생각하면 어색해져서 참을 수가 없었어요. 그냥 밥을 먹자는 제안이었는데.


올해는 유독 머리가 느리게 기는 해인지는 몰라도, 머리가 길기 전에, 나는, 그 약속을 지켜줄 수 없음을 분명히 했어요.


머리는 아직 가슴 밑까지 오려면 한참 남았어요.


하지만,

하지만.







방을 정리하면서 내 이름이 적힌 쪽지가 몇 개 나왔어요. 그런 걸 정말 잘 못 버리는데 나인데, 이번엔 한 번에 버렸어요. 쓸데없는 명함도 그냥 버려 버렸어요. 내 방에 계속 두기가, 싫어서.








오랜만에 친구와 마사지를 받았어요. 정말 추운 날이었어요. 우리는 마사지를 받으면서 뜬금없이 저출산 문제의 심각성과 해결책에 대해 논했어요. 아주 열띤 토론을 벌였 뭐예요. 그런 얘기를 하는 우리가 웃겨서 실컷 흥분해서 얘기하다가 근데 우리 지금  이런 얘기를 하는거야? 하면서 멈췄어요. 마사지를 받은 당일 주의사항으로 하루정도 뻐근하게 근육통이 있을  있고, 술이나 커피는 하루 정도  마시는  좋다는 얘길 들었어요. 우리는 마사지 샵을 나서자마자  근처 커피 맛집으로 달려가 연유라떼를 한잔씩 마셨어요. 마치 수업을 땡땡이 치고 나와서 담임 몰래 떡볶이를 사먹는 여고생 마냥 괜히 스릴 넘치고 신났어요. 금기는 깨라고 있는 거야. 친구와 나는 우리의 행동을  한마디로 정당화(?)했어요. 키득키득 웃으며 우리는  길을 걸었고, 매서운 바람이 우리 얼굴을 사정없이 강타했어요. 그런 와중에도 얼죽아인 우리는 차갑디 차가운 '아이스' 커피를 마셨지만 이상하게도 춥지 않았어요. 정말 이상하게도.  








따뜻한 생명을 안고 있으면 마음이 포근해져요. 콩닥콩닥 뛰는 심장 소리를 들으면 너무 편안해져요. 콩닥콩닥 뛰는 심장을 가진 따뜻한 생명을 안고 자면 모든 시름을 잊게 돼요. 그 생명체가 새근새근 곤히 잠든모습을 보면, 나는 너무 따뜻해져요.







이상한 노래와 이상한 춤과 이상한 데이트와 알 수 없는 말과 알 수 없는 미사여구와 알 수 없는 구호와 그럼에도 잘 맞는 식습관과 이상하고 알 수 없음에도 찰떡같이 맞는 소통의 순간들을 나는 기억하고 간직해요.





 





나는 골목 가로 걸어요. 갓길로, 갓길로. 갓길을 찾아 걸어요. 눈이 아직 녹지 않은 부분을 찾아 걸어요. 뽀득 뽀득 눈을 찾아 밟아요. 뽀득, 뽀득. 아직도 쌓여있다는 건, 녹을만큼 따뜻하지가 않아서일까요. 나는 아직도 눈이 남아있네, 이제 눈 좀 다 녹을 때 되지 않았나? 하다가도, 갓길에 쌓인 눈을 찾아 걸어요. 눈을 밟아요. 왜 일까요. 나는, 왜.


무의식 중에 하는 행동이라 몰랐는데, 나는 가만가만 걷다 오늘에서야 이유를 찾았어요. 그 이유를, 알 것 같아요.




 






나는 눈이 모조리 녹아버렸으면, 하다가도 오래오래 있었으면 하고 생각했어요. 뽀득뽀득 밟히는 눈이 오래 남아 있어줬으면, 하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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