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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재이 Apr 02. 20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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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 좋아해?

-음… 종종 읽어.

아 좋아하는 것 까진 아니구나.

-왜?

이거.


네가 가방에서 꺼내 수줍게 내민 시집. 거의 던져지다시피 한 네 손바닥만한 얇은 그 책에서

나는 몇몇 단어와 문장을 눈으로 빠르게 훔친다.


욕망은 악착같은 것,

감정의 원근법,

우리는 의심의 회색사과를 나눠 먹을거야,


진실이여, 너에게 주고싶다

너울거리는 은유의 옷이 아니라 은유의 살갗을

벗기면 영혼이 찢어지는 그런 거,


사막은 결코 젖지 않고,


와 같은 몇몇 문장들의 잔상이 남았다.


-고마워, 시집 선물 오랜만에 받네.


너는 그제야 웃는다, 콧바람을 크게 내쉬면서.

난 또, 시 엄청 좋아하는 줄. 그렇게 말하면서.








새로 생긴 카페에 갔다. 플라타너스 나무 전망이 있는 카페였다. 남자 카페 주인은 긴 머리를 꽁지처럼 묶었다. 그의 눈썹만큼이나 진한 커피가 너무 쓰고 맛없었다.


음악 소리가 지나치게 컸고, 사람들의 이야기 소리가 웡웡 울려 귀가 아팠다. 음소거만 가능하다면 모든 풍경과 공간은 더할나위없이 좋았다.


유리 테이블에 앉았다.

유리는 예쁘다. 나는 유리를 좋아한다. 유리 접시, 유리 컵, 유리 티스푼. 하나같이 다 투명하고 정말 예쁘다. 무언가를 통과시키는 그 신비로움과 쨍그랑 거리는 소리는 애처로워 사무치게 아름답다.

하지만, 유일하게 유리 테이블은 좋아하지 않는다. 살갗에 닿는 느낌이 차가워서. 그리고 필연적으로 지문을 남겨 금세 얼룩덜룩 지저분해지고 만다.

근데 예쁘긴 예쁘다, 유리 테이블.


나는 팔꿈치가 차가운 유리 테이블에 닿지 않게 신경 쓰면서 커피를 마셨다.

그러다 어쩌다 닿으면 앗 차거, 하면서 깜짝깜짝 놀라곤 했다.


창밖엔 그림처럼 파란 하늘이 있고, 오고가는 차들이 있다.


근데 결정적으로 커피가 너무 맛없다. 여긴 처음 왔지만 마지막으로 온 게 되겠네, 나는 생각했다.

친구랑 같이 가보기로 한 새로 생긴 카페는 아직 많으니까, 아쉬울 것도 없지 뭐 - 하면서도 나는 조금 아쉬웠다.






나 운전 잘하지.

-글쎄, 내가 더 잘하는 것 같은데.

에이. 언제는 베스트 드라이버라며.

-아, 그건 노래 선곡이 좋아서.

그럼 그건 베스트 DJ 아닌가.

-드라이브를 신나게 해주면 그게 베스트 드라이버지 뭐.



너랑 드라이브하는 건 참 좋다. 네가 운전을 잘 해선 아닌 것 같고. 노래 선곡이 좋아서 그런가. 노래를 따라부르는 네 목소리가 참 좋다. 창문을 살짝 열고 바람을 맞으면서 네가 따라 부르는 노래를 들으면서 도로를 내달리면, 한 주의 피로가 싹 풀리는 기분이다.


해질녘, 노을, 터널, 컵홀더에서 찰랑거리는 커피 얼음소리, 살랑이는 바람, 모두 좋다.








어떻게 하면 주짓수를 잘 할 수 있나요.

-머리를 써야 돼, 머리를.

아, 머리 쓰기 싫어서 운동하는 건데. 하필 고른 운동이 머리 쓰는 운동이네.

-머리를 쓰면서 몸을 쓰는 거지.



운동을 하고 샤워를 하면 너무 개운하다. 아아를 한 잔 테잌아웃해 한 모금 마시면서 집까지 걸어갈 때의 그 상쾌함과 청량감은 이루 말할 수 없다. 가히 중독이다.






머리가 복잡해서 오랜만에 과학 잡지를 읽었다.


"목표를 세우면 도파민이 분비됩니다."


아, 그래서 내가 요 며칠간 목표 세우기에 혈안이 되었던 걸까.


□ 체크박스.


고등학교 때부터 그랬다. 나는 목표들을 세울 때  □ 이런 네모박스들을 맨 앞에 주루룩 그려넣고

그 뒤에 하나씩 목표를 적곤 했다.


친구들은 그런 나를 보면서

어, 또 네모 그리기 시작했다. 그렇게 얘기했었지.

네모네모네모네모네모네모


쳌, 쳌, 체크!

 

도파민이 절실했나.

수많은 목표들을 세우는 나를 보면서,

와 또 성취욕이 도졌나 왜이러지 했었는데.

고등학교 친구가 나를 보면 "어, 또 네모 그리기 시작했다"라고 했을테지.



그게 단지

도파민, 때문이었나.







한 바퀴에 400m인 트랙을 너와 함께 뛰었다. 우리의 목표는 10바퀴였다.

7바퀴를 제법 속도감 있게 뛰고 8바퀴째 달리고 있는데 네가 말했다.


심장이 너무 뛰어.

-나도.


우리는 나머지 2바퀴는 뛰지 않고 걸었다. 마지막 바퀴 트랙을 돌아나왔다. 너는 나를 빤히 쳐다봤다.


심장 계속 터질 것 같은데.

-우리 마지막엔 안 뛰고 걸었는데도?

응. 아까 뛰었을 때보다 더.

나는 더워졌다. 뛰었으니 당연히 몸에 열이 나는거야, 라고 생각하면서도 두 볼이 화끈거리는 게 느껴졌다.


얼굴 왜 빨개져?


역시 짓궂다.

-뭐어. 뛰어서 열 올라서 그렇지.


너는 내 머리칼을 아무렇게나 헝클어뜨리면서 웃었다. 이마에 맺힌 땀에 머리카락이 마구 달라붙는게 느껴졌지만 불쾌하지 않았다. 어쩜 하나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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