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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재이 Jun 02. 2024

너무 한낮의 캠퍼스



아주 오랜만에 학교에 갔다. 완연한 봄이다.

벤치에 앉아 햇살을 받으면서 책을 읽었다. 오늘 아주 광합성 제대로 하는구나. 마침 읽고있는 책 내용에도 미토콘드리아 나부랭이가 나왔다. 타이밍도 참 절묘하네, 나는 실소한다.


반팔티셔츠 위에 스웻셔츠 하나를 걸치고 나왔는데 너무 더워서 책을 읽다가 스웻셔츠를 벗어 던져 버렸다. 반바지를 입어도 덥구나. 그렇게 생각하고 있는데 개미 한 마리가 내 허벅지를 기어가고 있었다. 나는 개미가 제멋대로 기어 다니도록 그냥 내버려두었다. 그러다 따끔! 해서 손으로 툭 쳐내고 다시 책읽기에 집중했다.




캠퍼스에 나들이 온 가족들이 많았다. 그러다 문득 이렇게 햇살을 받으며 멍-하게 있어본 게 도대체 얼마만인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실로 오랜만이다.


아무 생각도 하지 않는다는 것은 참 어렵다. 버스 한 정류장만 먼저 내려 걸으면 되는 것인데 지금까지 왜 매번 학교를 지나쳐 곧장 집으로 갔을까. 마음의 여유가 없었던 탓일까. 캠퍼스는 푸르르고 학생들은 생기 넘치고 햇살은 따갑다. 스탠드 조명이 필요없는 최적의 독서 환경에 심취해 나는 책장을 빠른 속도로 넘겨댔다.


30분만 앉았다 가야지, 했는데 어느새 어둑어둑해지고 약간 쌀쌀해져 있었다. 나는 벗어뒀던 스웻셔츠를 다시 입고 마지막 책장을 덮었다.





장모 러그를 걷고 요가 매트를 깔아뒀다. 매일 아침 하는 명상을 자기 전에도 해볼까 싶어서. 아침에 명상하고 집에서 운동하고 저녁에 명상도 하려니 계속 요가 매트를 깔았다 치웠다를 반복해야해서 그냥 깔아둬 버렸다.




달리기 후에 성급하게 마시는 물 한잔을 좋아한다. 목구멍을 열어 젖히고 벌컥벌컥 마신다. 포카리스웨트나 파워에이드보다 물이 좋다. 업힐을 오를 때 허벅지에 묵직하게 가해지는 압박도 좋다. 근데 또 너무 업힐이 자주 등장하면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후들후들 다리가 떨려서 문제다. 반 강제로 개다리춤을 추며 걷는 수가 있다.





양말 한 켤레를 선물로 받았다. 무압박 수면양말인데 일본에서 유명한 양말 브랜드 제품이라고 했다. 포장지에 '프리미엄 원사인 고밀도 압축 탈텍사를 사용해 부드럽고, 발목 부분이 얇고 탄성이 좋은 무압박 밴딩으로 되어 있습니다.' 라는 설명이 써 있었다. 일본은 양말 문화(?)가 발달해서 양말이 용도에 따라 다양한 종류로 분류되어 있다고 했다. 실외용 양말, 실내용 양말, 수면양말 등이 다 따로 있고, 원단이나 신축성 등도 그에 따라 다르다.


양말이 달라봤자 얼마나 다르겠어, 하고 신는 순간 나는 깜짝 놀라고 말았다. 구름을 신는 것 같았다. 부드러운 촉감과 조이지 않는 발목, 그러면서도 밀착감 있는 원단의 편안함이 고스란히 느껴졌다. 속옷이나 언더웨어, 양말 등 살갗에 직접적으로 닿는 옷의 촉감에 신경쓰면 자존감이 올라간다는 말이 그냥 하는 말이 아니었구나. 나는 그날 그 구름같은 수면양말을 신고 꿈 속에서 퐁신퐁신 아주 즐거운 산책을 했다.

 



어렸을 땐 클래식을 정말 많이 들었는데, 크면서 힙합이나 재즈를 주로 듣다가 요즘 다시 클래식에 빠졌다. 클래식은 참 신비한게 같은 음악인데 언제 듣느냐에 따라 정말 다르게 들린다. 모든 음악이 그렇겠지만, 클래식이 가장 그런 것 같다. 피아노 독주보단 협주곡을 좋아한다.


클래식을 계속 듣다보니 빠르게 연주하면서 차분한 느낌을 내는 게 얼마나 어려운지, 또 느리게 연주하면서도 기쁘고 경쾌한 분위기를 자아내는 게 얼마나 어려운지를 실감한다. 세게 치는 것보다 여리게 치는 게 더 어려운 것도.


인생도 그렇다. 급발진은 쉬워도 한 템포 가라 앉히고 여유를 갖는게 어렵다. 절제하고 덜어내는 게 과잉 이상의 감동을 자아내듯 결국 단순함과 여유가 제일 어렵다. 하지만 그것만큼 좋은 게 없다.






가방 하나 메고 어디든 훌쩍 떠날 수 있는 단촐함을 못견디게 사랑한다. 여행 가방은 최대한 간단하게 꾸리는 걸 좋아한다. 여행 가방에는 속옷과 양말, 세면도구, 책 한 권이면 충분하다. 핸드백도 미니백이 제일 좋다. 직업 특성상 노트북을 항상 가지고 다녀야해서 일할 때 주로 백팩을 매고 다녔는데, 평소엔 지갑만 달랑 들고 나가는 경우가 많다. 카페에서 책이 읽고 싶은 날엔 작은 시집 한 권이 들어갈 정도의 작은 파우치같은 숄더백 하나만 들고 나간다. 가방엔 립스틱 하나와 책 한권, 볼펜 한 자루, 끝.




한낮의 캠퍼스는 눈부시다.

나는 '수면용 양말'을 쾌적한 독서를 위해 호기롭게 실외에 신고 나왔다. 걸을 때마다 기분이 좋았다. 분수대 앞에 위치한 벤치에 자리를 잡았다. 반짝반짝, 짜랑짜랑하는 피아노 소리를 들으면서 부서지는 햇살을 감상했다. 깨질 것 같이 아름다운 햇살을 훼손할 것만 같아 나는 눈을 살짝 찌푸린다. 짜랑짜랑 짜그라랑 피아노 건반 소리. 그 아래로 묵직한 첼로가 깔린다. 나는 가방에서 책을 꺼내 성급하게 눈으로 훑으려다 이내 덮고 잠시 내려 놓는다. 여름이 오기 전 아주 짧고도 귀한 시간인 봄의 한 가운데, 캠퍼스에서 이 계절을 온전히 느끼지 않는 건 유죄다. 그것도 너무, 한낮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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