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가장 좋아하는 것들을
사랑하는 사람들한테 마구 양보해버린다.
마구, 양보해 버린다, 는 표현이 참으로 적절한 것 같다.
내가 정말 좋아하고 또 아끼는 건데,
그게 두 번 다시 가질 수 없는 것들이라고 해도
나보다는 내가 사랑하는 사람들이
그걸 가졌으면 좋을 것 같은
내가 훨씬 더 행복할 것 같은 느낌.
그렇게 재지 않고 함부로, 선뜻, 마구 양보했을 때
실제로 나는 행복하다.
그래서인지 나는 가끔 이런 황홀한 상실을 즐긴다.
어쩌면 나는 완전한 결핍으로 인한 고통도, 완전한 충족으로 인한 권태도
그 어느 쪽도 제대로 알지 못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고통스러울 정도로 결핍이 있었던 적도,
권태로울 만큼 넘치게 충족됐던 적도 없는 느낌.
언제나 그 사이 어딘가 쯤에 머무르면서 왔다갔다 거렸던 것 같은데. 그저 내 착각일 뿐인가.
잘 모르겠다, 정말.
그리고 이렇게 말 할 수 있는 것도
어찌보면 조금은 사치스러운 감정인지도 모르겠다.
뒷꿈치가 알 수 없는 유리조각 같은 것에 찔렸다. 피가 찔끔 낫다. 하, 이것 때문에 며칠을 못 뛰게 생겼네. 유리조각을 분명 빼냈는데도 걸을 때마다 따끔하거나 욱신거렸다.
나는 아주 미세한 조각이 혹시 빠지지 않은 건 아닐까, 저 깊숙이 박혀 버렸는데 너무너무 작아서 미처 못 빼낸 건 아닐까, 영원히 못 빼내는 건 아닐까 하는 생각을 했다. 유리조각은 제거했지만, 아직까지도 이 관념은 제거하질 못했다.
어른이 되면서 소리없이 웃는 일과 소리없이 우는 일이 늘어났다.
더는 엉엉 소리 내 울지 않는다. 그래서 그건 울음, 이라 말할 수 없다.
'눈물을 흘린다' 정도로 표현하는 게 맞으려나. 그런데 그건 필연 상쾌한 눈물이다. 눈물 이후에 개운함이 있다는 걸 안다. 눈물을 흘린다 해도 이제 더는 슬프지 않다.
뭐랄까, 요즘은 눈물 흘릴 일도 딱히 없다.
웃을 때도 그냥 피식 웃고 마는데, 이것 역시 크게 하하하 소리 내 웃을 일이 딱히 없달까. 그래도 웃는 건 최대한 크게 웃으려 노력한다. 여럿이 같이 있을 땐 웃음이 웃음을 부르는 게 있어서 소리내 웃다보면 그 웃음소리가 웃겨서 웃기도 한다.
나는 기꺼이 잃는다. 내게 유익한 상실이 뭔지 나는 안다. 이 상실은 역설적으로 내게 행복감을 주기 때문에 황홀하다. 그래서 잃어도 잃어도 잃은 것 이상으로 뭔가가 채워져 버린다. 의도한 건 아닌데 그렇다. 상실이라고 해서 꼭 공허함만 수반되는 건 아니다.
잃을 수 있어야 채울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