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을 읽을 때 나만의 오래된 습관이 있다. 책 표지부터 책날개, 목차, 심지어 몇 쇄를 발행했냐는 마지막 장까지 책의 처음부터 끝까지를 전부 샅샅이 읽는 것이다. 이상하게 그렇게 읽어야만 책을 온전히 읽었다는 느낌이 든다.
최근 마사 누스바움의 '타인에 대한 연민'을 읽었다. 이 책은 표지를 보자마자 맥이 탁 풀리고 말았다. ‘타인에 대한 연민’이라는 제목 위에 ‘혐오의 시대를 우아하게 건너는 방법’이라는 문구 때문이었다. 혐오의 시대에 대한 대안이 타인에 대한 연민이라니 이 얼마나 안일한 사고방식이란 말인가. 비현실적이고, 지나치게 교과서적이며, 결국 뻔한 얘기를 하겠구나, 하는 것이 표지를 채 넘기기도 전에 느낀 이 책에 대한 첫인상이었다.
마사 누스바움은 혐오의 기저에 ‘두려움’이 깔려 있다고 말한다. 두려움은 인식의 과정이 필요하지 않은 원초적인 감각이므로 인간이 살면서 가장 먼저 느끼는 감정이자 동물들이 광범위하게 공유하는 감정이라고 규정한다. 분노, 혐오, 증오, 시기는 이 두려움을 먹고 자란다.
한때 ‘극도로 혐오’의 줄임말인 ‘극혐’이라는 말이 유행어가 됐던 적이 있다. 우리 사회는 단순히 혐오를 조장하고 이용하는 것에서 나아가 아무렇지 않게 소비하는 단계까지 나아갔다는 단편적 예다. 저자는 혐오는 언제나 두려움을 유발하는 특정한 생각과 결합 되고, 불안정한 시기일수록 혐오 집단의 필요성이나 낙인의 강도는 높아진다고 말한다. 사회가 혼란스러울수록 혐오가 양산되기 쉽다.
나의 이해관계를 따지기도 바쁜 현실 속에서 타인의 상황과 감정에 귀 기울이고 열띤 토론을 벌이는 건 지나치게 이상적인 모습일지도 모른다. 타인과 나를 경계 짓고 타자화하는 전략을 택하는 모습이 만연한 것은 이 방법이 가장 직관적이고 쉽기 때문이다. 나의 영역을 공고히 하는 가장 손쉬운 방법은 나와 다른 존재들을 구분 짓고 배제하는 것이다. 이 과정에서 혐오는 자연스레 학습된다. 뒤틀린 인식이 촉발한 혐오라는 감정은 혼란을 잠재우고 어떤 집단적 응집력과 결속력을 강화하는 일시적인 도구가 될 수 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는 결국 ‘뒤틀렸기’ 때문에 금세 힘을 잃고 내부 분열로 치닫거나 새로운 혐오를 양산할 뿐이다.
누스바움은 이에 대한 대안으로 타인에 대한 믿음과 사랑, 타인과의 연대, 타인의 고통에 대한 공감과 연민 등을 제시한다. 그리고 이 기저에는 ‘희망’이 있음을 역설한다. 희망은 사랑에 의해 유지되고, 타인에게서 최악보다 최선을 기대하는 영혼의 관대함이 사랑을 지탱한다는 저자의 논리는 ‘혐오할 수 있다면 연민(공감)할 수 있다’는 인식의 기초가 된다. 희망과 두려움은 맞닿아 있는 속성을 지니기 때문이다.
‘나’라는 존재의 취약성을 인정하는 것에서부터 모든 것은 시작된다. 결국 타인에 대한 연민은 나에 대한 연민이자, 인간이라는 존재의 근원적 취약성을 인정하겠다는 다짐이다. 혐오의 시대에서 개인이 할 수 있는 가장 숭고한 일은 이 두려움을 겸허히 인정하고 타인을 연민하는 일이다. 지나치게 이상적으로 들릴지 몰라도, 이를 토대로 한 타인과의 연대가 결국 세상을 바꾸는 희망의 원천이 될 거라고 믿는다.
갑자기 손예진의 풋풋한 옛날 모습과 연기가 그리워져 '내 머리 속의 지우개'를 다시 봤다. 와, 이게 벌써 20년 전 영화라니. 그렇게 좋아하는 영화는 아닌데, 다시 보니 영화가 그 시대의 '낭만' 그 자체다. 곳곳에서 그 때의 정서가 물씬 풍겨져 나온다. 세련되진 않아도 특유의 분위기가 너무 좋았다. 이미 너무너무 유명한 "이거 마시면 나랑 사귀는 거다" 장면은 역시나 더할나위 없이 아름답지만, 이 외에도 모든 장면이 너무 소중하고 로맨틱하다. 콜라 마시는 장면, 차문 없이 덜컹거리면서 도로를 질주하는 장면, 다 씻었냐고 하나하나 확인하는 장면까지 다 왜 이렇게 좋은건지. 정우성과 손예진의 풋풋한 모습은 그자체로 너무 아름답다.
보다 보니 2000년대 손예진의 연기를 좀 더 감상하고 싶어져 '아내가 결혼했다'를 봤다. 물론 지금 손예진의 연기는 훨씬 깊이 있어지고 감정 표현에도 연륜이 묻어나지만, 나는 이 때의 손예진이 너무 매력적이다. '엽기적인 그녀'의 전지현이 캐릭터 그 자체로 2000년대 초를 느낄 수 있는 하나의 상징이듯 '내 머릿속의 지우개' 속 손예진도 그 자체로 하나의 상징이다.
요즘 초당옥수수에 미친 나날들을 보내고 있다.
초당옥수수는 왜 이렇게 맛있는 걸까. 생으로 먹어도 맛있고 익혀 먹어도 맛있다. 냉장고에 넣어두고 생으로 먹으면 아삭아삭 시원한 게 너무 맛있고, 전자레인지에 딱 1분 돌려먹어도 알알이 톡톡 터지는 식감이 배가 되면서 그것대로 맛있다. 일반 옥수수보다 훨씬 달고 수분감이 많은 게 특징이다.
언젠가부터 나에게 여름은 '초당옥수수의 계절'이 됐다. 초당옥수수 때문에 여름이 너무 기다려진다. 제철을 맞은 초당옥수수는 옥수수 대 끝까지 알이 튼실하게 꽉꽉 차고, 맛도 좋다. 이 계절이 지나면 맛볼 수 없는 이 행복을 최대한 만끽하고 싶어서 부지런히 초당옥수수를 먹는다. 15개를 사뒀는데, 야금야금 먹다보니 벌써 다 먹어간다. 내일 또 20개를 사러 가야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