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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재이 May 06. 2021

아쉬운 건 여름이별


    여름에 이별했다면 참 좋았을 거란 생각이 든다. 그랬다면 어땠을까, 우리가 여름에 이별했다면. 지금처럼 이렇게 무덥고 습하고 장대비도 쭉쭉 쏟아지는 이런 음울한 장마와 작열하는 태양이 공존하는, 이 한여름에 이별했다면.



    참 좋았을 거란 생각이 든다. 훨씬 빨리 탄성을 회복할 수 있었을 거라고도, 짐작해본다. 아니, 확신한다. 그해 여름은 길고도 짧았을 거라고, 나는 훨씬 견디기가 수월했을 거라고 맹목적으로 확신할 수 있다.

이별은 반드시, 여름에 해야 옳다.


    2월이 아니라, 졸업을 코앞에 앞둔 졸업식 직전이 아니라, 옷을 껴입어도 추운 한겨울이 아니라, 딱 6개월 전인 8월에 이별했다면.

    그랬다면 나를 둘러싼 상황은 정말 많이 달라졌을 텐데. 나는 왜 그러지를 못했을까. 기어이 2월이 될 때까지 기다려야 했는지, 나는 후회한다.

    졸업이 뭐가 대수라고. 중요한 것은 내 마음인데. 8월에 이별했다면, 얼마나 좋았을까, 얼마나. 그때는 이상하게 졸업 전에 이별을 맞이하면 졸업에 지장이라도 갈 것처럼 겁을 먹고 있었다. 나의 근거 없는 조심성에 개탄한다.

 



    폭염 덕분에 날씨가 더우니까 나는 훨씬 덜 떨어도 됐을 것이다. 마음이 꽁꽁 얼어붙다 못해 쨍하고 깨져버렸는데, 그 파편들을 채 추스를 겨를도 없이 찬바람이 내 피부를 사정없이 강타했다. 마음이 너무 시려서 오들오들 몸이 떨릴 지경이었는데, 밖에만 나가면 너무 추운 날씨 탓에 물리적으로도 덜덜 떨렸다. 바람이 매서울수록 또 그것에 의해 춥고 시릴수록 나는 더 비참해지는 기분이었다.

    안 그래도 나 너무 추워, 나 좀 내버려 두면 안 돼? 그런 원망 섞인 푸념을 백날 던져봤자 하늘은 무심하게 나를 무시하고 매서운 바람은 연신 내 피부를 때리며 지나갔다.

    날씨가 충분히 따뜻했다면, 아니 따뜻한 것을 넘어 뜨거웠다면, 무더운 폭염이 기승을 부렸다면 그때의 이별한 나는 그것을 그저 ‘온화하다’ 느꼈을 것이다. 냉랭한 마음의 온도가 40도의 징글징글한 여름 기온을 쾌적한 18도에서 20도쯤으로 떨어뜨려 주었을 것이다. 그래서 나는 날씨에 위로받으며 이별을 견뎌 나갔겠지.





    장마로 인해 비가 미친 듯이 쏟아지니까 훨씬 덜 울어도 됐을 것이다. 나 대신 울어주는 무엇이 있다는 건 끔찍이도 고마운 일이니까. 나는 그저 창밖에 내리는 비를 가만히 쳐다보고만 있어도 속이 시원했을 것이다. 마구마구 퍼부어 대는 장대비를 보면서 이 모든 것은 내일 쨍-하게 햇빛을 쏘기 위한 전초전일 뿐이라고, 별거 아니라고, 내 마음속에서도 마구마구 눈물을 퍼부을 수 있었을 것이다.

    그렇게 폭우가 온 세상을 미친 듯이 휩쓸고 나면 내 마음은 후련하게, 아주 후련하게 다시 해를 띄울 준비를 했을 것이 틀림없다.

    세상을 온통 물에 잠기게 할 기세로 비를 퍼붓다가도 다음 날이면 언제 그랬냐는 듯 이글거리는 태양을 띄우는 것을 반복하는 하늘을 보면서, 자연도 이렇게나 변덕스러운데 자연의 일부인 내가 감정의 기복이 어찌 없을 수 있겠냐며 손쉽게 합리화할 수 있었을 것이다. 나의 변덕이 얼마나 자연스럽고 당연한 일인지 새삼 안도하며 심심한 위로를 받았겠지.

    어떤 날은 아무것도 하지 않은 채 집에 틀어박혀 주저앉아 미친 듯이 울고만 싶다가도 어떤 날은 되려 큰 소리로 아무 생각 없이 웃고만 싶은, 그렇게 거짓 행복이라도 만들어 내고 싶은 내 불안정한 나날들의 연속.

그토록 변덕스러운 감정이 위태롭게 널을 뛰어도 날씨와 물아일체가 되어, 이 모든 기복은 다 날씨 때문이라고, 나는 애초에 날씨에 영향을 많이 받는 사람이니까 당연히 그럴 수 있다고, 날씨 탓이라도 할 수 있어 마음 한편이 언제나 든든했으리라.






   그렇게 장마가 지나고 나면, 내 생일이 기다렸다는 듯이 나를 반겨주었을 것이다. 안녕, 네가 탄생한 날이야. 너는 태어난 것 자체만으로도 네 존재를 증명한 셈이야. 그걸로 충분해. 참 경이롭지 않니. 슬프든 기쁘든 이 또한 지나갈 거야. 너무 염려 마. 단지 이날 하루만큼은 자신을 스스로 축복해. 봐, 너의 생일이야. 하고 한여름의 생일이 이제 여름의 끝이 머지않았음을 알리고 지나가면 나는 다시 힘을 낼 수 있었을 것이다.

이유 없이 기쁘고 자신감이 넘치던 8월생의 기분을 다시금 만끽하면서. 매번 생일을 같이 보냈었는데, 이번 생일은 혼자네. 하고 조금 울적해질 수는 있지만, 나는 충분히 슬픈 채로 기뻤을 것이다. 혼자 생일을 보내게 된 것에 조금 새롭고도 어색한 기분을 느끼면서도, 그렇게 비극적이지만은 않다고, 이제 나를 더 사랑해주어야겠다고 다짐하는 계기가 되었을 것이다.

    



    그렇게 폭염을 지나고, 장마를 지나고, 내 생일을 지나면 나의 마음은 데워지고, 감정의 기복을 자연현상처럼 여기며 받아들이고, 내 존재 자체에 감사하고 자신을 사랑하게 되는 절차를 밟아나갔을 것이다. 그때쯤이 되면 다시 날이 선선해지고, 쾌청한 날씨가 나를 반기면서 가을이 오고 있음을 피부로 느끼겠지.

    그러면 비로소 치열하게 앓았던 여름은 추억처럼 지나가고 또 새로운 계절이 오고 있음을 자연스럽게 받아들이면서, 나의 이별을 그저 스쳐 지나가는 계절처럼 그렇게 지나올 수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나는 겨울에 이별했으므로, 한 계절을 앓으면 될 것을 일 년씩이나 앓고 말았다. 어쩌면 그 이상인지도 모르겠다. 어쩔 수 없었겠지. 이별의 계절을 선택할 순 없었으니까.

    다만, 이제 나는 분명히 해야겠다. 지독한 신파여도 어쩔 수 없다.



    나의 연인들이여, 나를 떠나려거든 반드시 여름에 떠나주오. 나도 누군가를 떠난다면 그를 위해 기필코 여름에 이별을 고하리라.

  그것이 나와 당사자 모두에게 조금이라도 유익한 방향으로 흘러갈 수 있는 이별 요령이 될지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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