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떫은맛은 정말 극혐이야."
"그건 나도 그래. 혀가 굳는 것 같아."
"떫은맛을 좋아하는 사람이 있을까? 아마 한 명도 없을걸."
"글쎄."
"뭐가 글쎄인데."
"난 쓴맛은 좋아. 완벽하게 쓴맛."
뭔 소리야. 역시 넌 '보통 사람'은 아니구나. 쓴맛을 좋아하는 것도 특이한데 '완벽하게' 쓴맛이라니.
"완벽하게 쓰단 건 어떤 거지."
"나도 모르게 인상이 찌푸려질 정도의 쓴맛."
점점 더 심각해진다.
"그게 왜 좋은데?"
"음, 뭐랄까. 고통스러우니까."
하, 이 남자. 대체 뭐지?
"그래? 그런 식이면 극단적으로 매운맛도 고통스러울 수 있잖아."
"그렇긴 하지. 근데 그건 정말 통각으로 느껴지는 거니까 맛이라기보다는 통증에 가깝지. 아픔이잖아. 근데 쓴맛은 견딜 수 있는, 통증이 없는 극한의 고통이랄까. 그래서 그게 너무 매력적이야."
미친놈인가? 욕이 아닌 말 중에서 그를 표현할 수 있는 단어는 하나밖에 없었다(사실 그건 욕이다).
"변태 같아."
"내가 생각해도 그렇게 들리긴 하네."
알긴 아네, 아니까 그나마 다행이다(는 개뿔, 다행인건 하나도 없다).
이후에도 너는 '완벽하게 쓴맛'을 찾기 위해 열심이었다. 완벽하게 쓴 맥주, 완벽하게 쓴 커피, 완벽하게 쓴 한약(이걸 왜 좋아하는지 모르겠다, 그는 한약을 '맛있는 약'으로 표현하곤 했다), 그리고 완벽하게 쓴, 감정.
그때마다 완벽하게 쓴맛에 대한 선호를 단순히 너의 변태성으로 치부할 수도 없는 노릇이라 그러려니 넘겼다.
네가 일부러 '고독'이라는 쓴 감정을 찾아 나서는, 아니, 즐기는 사람이란 걸 알기 전까진.
그가 일부러 쓴 감정을 느끼고자 노력하고 또 그 고통 속에서 불안감을 해소하며 나아가 '편안함'을 느낀다는 사실을 알게 되자 문제는 심각해졌다. 단순히 이상하고 특이한 입맛쯤으로 여기던 문제가 ‘자학성’과 연관되자 전혀 다른 방향으로 발현이 되었다.
너를 어떻게 이해할 수 있을까. 일부러 고통을 찾고, 고통을 즐기며, 고통스러워야 안락함을 느끼는 너의 간헐적 고독 추구 성향.
너는 너 자신을 미워하고 있는 걸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