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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재이 Nov 10. 2024

가장 날카로운 날로 벤 문장


오랜만에 진은영 시집을 다시 집어들었다. 10여년 전 감명 깊게 읽었던 게 생각나 문득 그 감성이 그리워진 것이다. 접힌 부분은 다름 아닌 '시인의 말' 이었다.


 서른살 무렵, 죽을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그때 카프카가 죽은 나이까지는 살게 해달라고 빌었다. 그런데 하느님은 내 소원을 잘못 알아들으신 것 같다. 카프카가 쓴 것처럼 쓸 수 있을 때까지 살게 해달라는 이야기로, 그리하여 나는 그 누구보다 오래 살고, 어쩌면 영원히 살게 될지도 모른다. 

 이 불미스러운 장수와 질 나쁜 불멸에 나는 곧 무감해질 테지. 문학은 나에게 친구와 연인과 동지 몇몇을 훔쳐다주었고 이내 빼앗아버렸다. 훔쳐온 물건으로 배푸는 향응이란 본래 그런 것이지, 지혜로운 스승은 말씀하실 테지만 나는 듣는 둥 마는 둥. 소중한 것을 전부 팔아서 하찮은 것을 마련하는 어리석은 습관을 여전히 버리지 못했다.

   -2012년 8월 진은영 


스무살을 갓 넘겼던 그때, 이 페이지를 왜 접어 뒀는지 단번에 알 수 있었다. '소중한 것을 전부 팔아서 하찮은 것을 마련하는 어리석은 습관을 여전히 버리지 못했다'는 시인의 문장을 한참이나 곱씹었다. 


프란츠카프카는 40세에 죽었다. 진은영 시인은 시인의 말을 쓰던 당시 42세였다. 그 나이때 불미스러운 장수와 질 나쁜 불멸이라는 표현을 거침없이 쓰는 시인의 삶이란 과연 어땠을지 짐작이 갔다. 프란츠카프카처럼 죽기를 바랐지만, 카프카처럼 살아가고 있는 삶. 그렇게 생각하니 절망적이라기 보다는 퍽 낭만적이었다. 하찮은 것을 마련하며 꾸역꾸역 살아지고 있는 시인의 삶.


하지만 그 '하찮은 것'들이 다시금 펜을 잡게 하고 결국 쓰게 하며 기어이 숨 쉬게 한다는 것 역시 시인은 모르지 않을 것이다.




진은영은 꼬박 10년 후인 2022년 시인의 말에서는 이렇게 쓰고 있다.


"불행이 건드리고 간 사람들 늘 혼자지."
헤르베르트의 시구를 자주 떠올렸다.
한사람을 조금 덜 외롭게 해보려고 애쓰던 시간들이 흘러갔다.

- 2022년 8월 진은영


한 사람을 조금 덜 외롭게 해보려고 애쓰던 시간들…….

'나는 오래된 거리처럼 너를 사랑하고'라는 시집의 제일 처음 등장하는 시 '청혼'.

처음 시집을 넘기자 마자 그 한 편을 읽고 바로 사서 집에 왔고, 2년이 지난 지금도 여전히 그 모퉁이는 가지런히 접혀 있고, 아직도 시집 중에서는 청혼이 제일 좋다.


'과거에게 그랬듯 미래에게도 아첨하지 않을게

어린 시절 순결한 비누 거품 속에서 우리가 했던 맹세들을 찾아

너의 팔에 모두 적어줄게'


이 문장들에 밑줄이 그어져 있다. 이따금 거품 목욕을 할 때 소중한 맹세들을 팔에 거품으로 쓰는 이미지를 떠올리곤 했었지. 다시 읽어봐도 여전히 좋다. 마음이 울린다.


'월요일에 만나요'라는 시도 꽤 좋아했었다. 다음 연은 내가 가장 좋아하는 부분이다.


'사막은 결코 젖지 않고

툭툭 떨어진 붉은 머루알들이

무슨 요일인지 알 수 없는 저녁의 긴 장화 아래 터지고

구름이 일꾼들처럼 흩어지고

월요일은 없네'


이 시를 읽었던 날은 마침 어느 음울한 일요일의 비오는 밤이었다.

그때 사막은 결코 젖지 않는다는 저 문장이 왜그리 아릅답던지. 투둑투둑 창문에 떨어지는 빗소리를 듣고 있어서 그런지 툭툭 떨어진 붉은 머루알이 터지는 소리가 들리는 것만 같았지. 나는 마지못해 월요일을 기다리면서 비에 젖은 솜처럼 무거워진 마음을 꾹꾹 누르며 불면의 밤을 보내고 있었다. 잠이 오지 않아 펼쳤던 시집을 덮으며 잠을 청하던 밤. 


시는 참 신비하다. 단 한줄의 문장을 읽는 것만으로도 그날의 공기 속으로 나를 단숨에 데려가버리니까.

 






오늘은 유계영의 시를 읽었다. 몇몇 시에 스태들러 연필로 거침없이 밑줄을 긋고 어떤 장은 모서리를 접었다. 모서리를 접은 시들은 공교롭게도 앞부분인 1부에만 몰려 있었다. 1부 부제는 '우리는 시끄럽고 앞뒤가 안 맞지'다.


1부 제일 처음 등장하는 '봄꿈'이라는 시에 

'눈에서 태어난 것들이 눈으로 죽으러 돌아와
사흘 내 잠만 자다 나가는 것을 두고 
슬픔이라고 부르는 것처럼 

모르는 것은 끝까지 몰라두거라
어른 같은 아이는 귀엽지가 않으니'  

이 부분에 밑줄을 그어뒀다.


2부 '손까지 씻고 다시 잠드는 사람처럼'에 처음 등장하는 시 '미래는 공처럼'에서


'손목이라는 벼랑에 앉아 젖은 날개를 말리는

캄캄한 메추라기

미래를 쥐여주면 반드시 미래로 던져버리는

오늘을 쪼고 있다'


이 부분도 좋았다. 읽기만 해도 떫은 감 따위를 쪼다 뱉어버리는 메추라기의 모습이 피어 오른다. 미래에 달고 맛있게 익을 감, 하지만 오늘은 여전히 떫은 감, 그 감을 미래로 뱉어 버리는 애처로우면서도 야무진 메추라기의 모습이.


유계영의 이 시집을 읽는데 왠지 몸이 서늘해져 조금 춥다고 느낀 건 요즘 부쩍 추워진 날씨 때문만은 아닐 것이다. 얼마나 많이 '나'를 잃고 또 되찾기 위해 방황하고 다시 찾았다가 또 잃고, 잃었던 나를 보내야 할지 잡아야 할지 고민했을지. 그 시간들이 시집에 고스란히 담겨 있는 것 같았다. 잃었던 나를 낯설게 바라보는 나, 미래로 던져 버리는 나. 하지만 끝끝내 마주하고 미래로 미래로 다시 끌고 가야할 나와 씨름하고 있는 모습. 그로써 시름에 젖는 모습. 그 친숙한듯 낯선 감각. 하지만 회복해야 할 감각. 


하지만 역시, 여전히 유계영을 처음 접했던 '온갖것들의 낮'이 조금 더 좋다. 그 시집을 생각하면 나무 식탁에 놓인 주황색 오렌지가 떠오른다.






별일 없으면 일주일에 한 권 정도 시집을 읽는다. 소설은 잘 모르겠는데 시집의 경우, 대부분 작가의 등단 초기작들을 소장하는 편이고 또 오래오래 다시 읽는 편이다. 세월이 흐를수록 시인의 작품은 차곡차곡 쌓여 가고, 그 역시 좋아하는 시인이라면 하나하나 다 읽어보지만 결국 다시 초기작으로 돌아가게 된다. 처음으로 강렬한 인상을 남긴 작품이라 그런가. 가장 날 것의 감성의 결이 살아 있어서 그런가.


이따금 그 날선 감성 속에서 한동안 갇혀 그때 느꼈던 충격과 감정을 고스란히 다시 느껴보고 싶은 충동이 인다. 거품 목욕을 할 때 한 번쯤 꼭, 굳이 욕조에 얼굴까지 담그고 잠수하는 것처럼. 좋은 향과 거품 속으로 꾸르륵 같이 가라앉고 싶은 것처럼.


시인의 언어도 어쩌면 칼날과 같은 걸까. 쓰면 쓸수록 날이 무뎌지듯 너무 많이 다듬어진 문장은 날이 무뎌진 칼처럼 충분히 날카롭지 못해 나를 베지 못한다. 가장 날카로운 날로 베어 낸 문장들이 남아 있는 작품들이 좋다. 그래서 요즘도 나는 늘 옛 시집들을 뒤적이나 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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