왠지 뒤를 돌면 네가 서 있을 거 같은 느낌. 뒤돌아 보지만, 너는 거기 없다.
직감.
나는 그걸 꽤 중요하게 생각한다.
왠지 이럴 것 같다는 예감, '왠지 모르게 ~할 것 같다'는 느낌은 그냥 하루아침에 생기는 게 아니기 때문이다.
그건 내 안에 축적된 수많은 데이터를 기반으로 한다. 나라는 사람 안에 새겨진 DB. 그게 ‘왠지’라는 느낌의 근간이 된다. 그래서인지 나는 내 직감을 믿는 편이다.
이 사람이랑은 왠지 가까워질 것 같다, 이 사람은 왠지 나를 힘들게 할 것 같다, 이 사람이랑은 사귀게 될 것 같다 뭐 그런 종류의 예감. 그런 순간들은 대부분 오히려 서로에 대해 아무것도 모를 때 찾아 온다. 처음 본 순간 냅다 운명을 직감하는 찰나의 순간들.
흔히들 말하는 '쎄하다'는 느낌도 비슷하다. 그런 걸 감지하는 데 특화된 걸까. 왠지 모르게 느낌이 좋지 않은 사람은 꼭 통수를 쳤다. 친구들의 연애상담을 해주면서도 뭔가 이상한데? 좀 더 신중히 알아 봐. 하고 얘기해주던 순간이면 항상 그 불길한 예감은 적중했다.
무수히 많은 '왠지'들이 내 예상을 적중시켰고, 그로써 불안을 해소해주었고, 내 직감이 제법 신빙성 있다는 믿음을 가지는 데 기여해왔지만 번번이 예상을 빛나가는 특정한 '왠지'의 순간도 있다.
그 순간에 나는 그 '왠지'라는 느낌이 맞기를 바라면서도 기어이 좌절되기를 바라는 양가감정에 휩싸인다. 믿었던 그 직감이 배반 당하고 비로소 좌절됐을 때 묘한 안도감 마저 들기 때문이다.
시린 겨울 냄새가 코 끝을 스치면 나는 이따금 네 냄새를 떠올린다. 네 향수. 르라보 가이악10.
너의 흰색 레인지로버 옆좌석에 타면 나던 냄새. 네가 실내에 들어오니까 좀 덥네, 하며 니트를 펄럭일 때면 은은하게 나던 냄새. 네가 머리칼을 쓸어 넘길 때, 맨투맨 소매를 걷고 스테이크를 썰 때, 샤인머스캣을 알알이 정성스레 씻어줄 때, 구두 신고 계단을 내려오는 내게 팔을 뻗어 잡아 줄 때 나던 냄새.
도쿄 르라보에만 있는 향수. 한국에는 1년 중 딱 한 달, 9월에만 잠깐 판매되는 향수. 우연히 선물 받았는데 좋아서 계속 사서 쓰고 있어. 네가 그렇게 히스토리를 말했던 향수. 50ml에 50만원이 좀 넘던 향수. 흔치 않은 냄새. 그 냄새만 나면 나는 너를 떠올린다. 차가운 쇠 냄새와 포근한 섬유에서 나는 머스크향, 젖은 풀냄새와 약간의 가죽 냄새가 섞인 독특한 향. 차가우면서도 따뜻한 이상한 향. 메탈과 가죽에서 오는 세련된 이미지와 솜이불에서 오는 폭닥하고 부드러운 이미지가 혼재된 매력적인 향. 너와 참 잘 어울리는 냄새.
흔치 않은 향인 만큼, 길을 걷다 그 향이 나면 무의식적으로 돌아본다. 왠지 너일 것 같았지만, 너이길 잠깐 바라기도 했지만, 역시나 네가 아니다.
나는 실망하는 대신, 우습게도 조금 안도하고 만다. 네가 아니어서, 다행이다. 단지 너랑 같은 향수를 쓰는 사람이라 다행이다. 나는 그저 앞을 보고 저벅저벅 걸어간다. 실망조차 사치스럽다 느껴지는 차가운 겨울 속을.
사람은 담담해질 때 비로소 한 뼘 더 성장한다. 감정의 풍파를 겪고 본질을 객관적으로 바라볼 수 있게 되기 때문이다.
나는 이제 더 이상 너의 얘기를 하며 울지 않는다. 우리 이별을 얘기하면서도 그저 남의 얘기를 하듯 담담하게 얘기할 뿐이다. 그런 내 얘기를 듣는 사람들이 오히려 줄줄 눈물을 흘린다. 뚝뚝이 아니라 줄줄.
그건 어떤 실패라기보다, 내 삶의 한 과정일 뿐이니까. 그래서 그건 결말이 아니라 하나의 에피소드다. 그땐 그게 전부인 것 같고, 끝인 것 같아도 결코 끝이 아님을 이제 다 아니까.
청소를 하다 오랜만에 집에서 편지 한 통을 발견했다. 그건 다름 아닌 내가 쓴 편지였다. 10년은 더 됐으려나. 보내려다가 보내지 않았던, 감정이 너무 과하다 싶었는지 다시 쓰기 위해 버렸던 실패(?)의 편지였다. 마침표 하나까지, 단어 하나하나에도 이렇게 그득그득 감정을 담았나 싶을 정도로 낯선 말투였다. 요즘은 그렇게 편지를 쓰려고 해도 못 쓰겠다. 내 말투는 제법 건조하고 굳이 쓸데없는 말 같은 건 하지 않는다.
울퉁불퉁한 감정을 사포질해 매끈하게 만들었던 날들. 지금은 어디하나 튀어나오거나 거슬리는 부분 없이 맨들맨들 하지만, 그래서 어디 툭툭 걸리지 않고 데구르르 잘 굴러가지만, 왠지 모르게 조금 슬프기도 하다. 날 것의 감정을 잃어버린 것 같아서. 감정이 끓는 게 무서워 데워진다 싶기만 해도 불을 확 꺼버리는 게 익숙해 진 것 같아서. 하지만 이렇게 되기 위해 얼마나 노력했던가, 그리고 이런 게 다름아닌 어른이 되는 과정이라 생각했는데.
한 뼘씩 미세하게 성장한 순간들이 모여 지금의 내가 되었는데, 너무 담담하고 건조해진 내가 조금은 씁쓸하다.
요즘 부쩍 날씨가 추워졌다. 올해는 역대급 한파가 닥칠 거라는데 아주 무서워 죽겠다. 외출 후 집으로 돌아오는데 왠지 다음날 아플 것 같은, 몸살이 날 것만 같은 느낌이 들었다. 아니나 다를까. 호되게 감기에 걸렸는지 기어이 몸살이 났다. 열이 끓고 콧물도 줄줄 나고, 목도 간질간질한 게 근육통도 심했다. 이번 주말을 꼬박 몸살을 앓는 데 다 써버렸다. 혹시 몰라 집에 있는 코로나 검사 키트로 검사해봤는데 코로나는 아니었다. 집에 있는 상비약으로 대충 버텼는데 월요일엔 병원에 가야지.
그래도 일찍 자고 일어나면 내일은 왠지 오늘보다는 훨씬 몸이 가뿐해질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