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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재이 Nov 17. 2024

캐롤은 좀 더 늦게 들을래요



카페에서는 벌써부터 열심히 캐롤을 틀어대고 있었다. 캐롤만으로도 연말 분위기가 물씬 났다. 연말이 되면 집에 자그마한 트리라도 하나 놔야 할 것 같고, 크리스마스 느낌이 나는 작은 소품이나 조명을 하나 올려 둬야 할 것 같은 괜히 달뜬 기분에 젖기 마련인데 올해는 왠지 달랐다.


벌써부터 캐롤을 듣고 싶지 않았다. 크리스마스는 아직 한 달도 넘게 남았어. 올해는 최대한 늦게, 늦은 연말을 맞이하고 싶었다.


세월의 가속이 있는 대로 붙은듯 한 해가 너무 빨리 지나가 버린 것처럼 느껴졌다.






이상은의 노래를 좋아한다. 그중에서도 제일 좋아하는 곡은 '비밀의 화원'이다. 청량하게 맑은 날씨에 산책하면서 들으면 그렇게 상쾌할 수가 없다. 발걸음이 절로 리드미컬해진다. 봄이나 가을 아침에 참 잘 어울리는 노래라고 생각한다. 무심한 듯 따뜻한 듯 퉁명스러운 듯 상큼한 그 목소리가 참 매력적이다. 목소리가 약간 중성적이라 그런가. 지나치게 남성적이지도 여성적이지도 않은, 너무 묵직하지도 그렇다고 방방 뜨게 가볍지도 않은 그냥 청춘이 묻어 있는 몽글한 목소리. 무엇보다 가사도 너무 좋다.


향기 나는 연필로 쓴 일기처럼 숨겨두었던 마음

기댈 수 있는 어깨가 있어 비가 와도 젖지 않아

어제의 일들은 잊어

누구나 조금씩은 틀려

완벽한 사람은 없어

실수투성이고 외로운 나를 봐

난 다시 태어난 것만 같아

그대를 만나고부터

그대 내 초라한 마음을

받아 준 순간부터 라라라라~


'사랑을 할거야'도 너무 좋긴 한데, 계절이 가을이라 그런지 '언젠가는'을 오랜만에 제대로 듣고 싶어서 들었다가 깜짝 놀라고 말았다. 언젠가는은 이상은이 직접 작사 작곡한 노래인데, 작사했을 당시 나이가 23살이었다고 한다. 아니 가사를 보면 도무지 그럴 수가 없는데.


젊은 날엔 젊음을 모르고

사랑할 땐 사랑이 보이지 않았네

하지만 이제 생각해 보니

우린 젊고 사랑을 했구나


언젠가는 우리 다시 만나리

어디로 가는지 아무도 모르지만

언젠가는 우리 다시 만나리

헤어진 모습 이대로


아니, 한창 젊음을 통과할 나이인 23살에 어떻게 '젊은 날엔 젊음을 모르고 사랑할 땐 사랑이 보이지 않았네'와 같은 가사를 쓸 수 있지? '하지만 이제 생각해 보니 우린 젊고 사랑을 했구나~' 하고 회상하는 나이가 23살이라니. 마치 초등학교에 갓 입학한 초등학생이 "유치원 다닐 땐 몰랐는데 막상 학교 와보니까 그래도 요구르트 먹고 하츄핑 보던 유치원 시절이 좋았어~ 그땐 참 어렸는데" 이런 느낌이랄까...? 무튼 엄청 대단한 것 같다. 가사는 이상은의 목소리와 너무 잘 어울린다. 회자정리 거자필반이 떠오르는 가사. 언젠가는 우리 다시 만나리.





알베르 카뮈의 '결혼'을 읽다가 또 놀라고 말았다. 결혼을 하기 전에 결혼에 대한 글을 썼네? 라고 생각했는데 '결혼'은 내가 생각했던 그 결혼이 아니었다. 바다와 하늘의 맞닿음, 대지와 물, 자연의 결합을 '결혼'이라고 표현한 거였다. 


이곳에서 나는 질서와 절제 따위는 남 줘버린다. 
나를 송두리째 휘어잡는 것은 저 자연과 바다의 위대하고 자유분방한 사랑이다. 이러한 폐허와 봄의 결혼 속에서 폐허의 잔해들은 다시 돌이 되어 인간의 손길이 낸 광택을 지워버리면서 자연으로 회귀했다. 

-티파사에서의 결혼 中


결혼을 썼을 때 알베르카뮈 나이 역시 23살이었다니. 아니, 저 나이 때 어떻게 저런 문장을 구사할 수 있을까. 이 글에도 실존주의 색채가 그득그득 묻어있는데, 정작 본인은 실존주의나 철학적인 색채가 짙은 작가로 분류되는 걸 싫어했다고 하니 참 아이러니하다.


"젊음이란 무엇보다도 마구 방출되는 듯한 삶의 서두름이다" 라는 말을 23세에, 젊음을 마음껏 탕진하는 시기에 어찌 할 수 있는지. "이 넘쳐나는 풍요 속에서 삶은 느닷없고, 까탈스럽고, 방만하고, 거대한 열정의 곡선을 그려간다. 일생은 쌓아가는 게 아니라 불태우는 것이다"는 패기 넘치는 문장을 곱씹어 본다. 젊음의 정점을 지나는 시기의 작가가 뱉은 문장은 그 자체로 생명력이 넘실댄다. 






이따금 영화를 감상할 때, 뜬금없는 대사에 꽂히곤 한다.


수많은 N차 관람을 야기하고 무수히 많은 폐인을 양산했던 한 유명감독의 영화 감상 후 내게 남았던 대사는 의외로 "선배, 그 여자한테 왜 초밥 사줬어요?"였다. 붕괴니 뭐니하는 명대사들 보다도 이상하게 그 대사만 머릿속에서 맴돌았고 오랫동안 잔상을 남겼다. 선배, 그 여자, 왜 초밥, 초밥, 초밥, 왜 초밥, 사줬어요, 왜, 사, 줬, 어요……. 이유는 모르겠다. 초밥을 사준 순간, 이미 끝났기 때문일까. 당사자만 모르는 초밥을 사준 이유.


모든 캐릭터가 다 매력적이라 패러디의 패러디의 패러디를 낳았던 한 영화는 많고 많은 대사 중에서도 "상상력이 많으면 그 인생 고달퍼"이 한 줄이 남았다. 상상, 상상력, 고달퍼, 고달퍼, 고달퍼……. 


윤수익 감독의 영화 '폭설'을 봤다. 이번에도 영화가 끝나자 한 줄의 대사가 남았다.

오랜만에 재회한 설이(윤설)와 수안. 설이는 수안에게 왜 갑자기 다시 날 찾아와 이러는 거야? 묻는데 수안은 이렇게 대답한다.

"나는 그래도 되잖아."

자신있게 말하는 수안의 모습. 그 뻔뻔함 속에는 묘한 서운함이 내포돼 있다. 너도 네 마음대로 왔다가 네 마음대로 사라져 버렸잖아, 하는 식의. 그 무자비함에 나도 무방비로 노출됐었잖아. 그러니까 나는 그래도 되잖아, 난, 그래도, 되잖아, 되잖아, 난 되잖아…….


영화는 러닝타임 내내 꿈인지 환상인지 상상인지 사실인지 분간이 안 되는 장면이 나열되고, 마술적 리얼리즘도 살짝 가미돼 있다. 어떤 명확한 스토리 라인이 드러난다기 보다는 이미지 위주의 영화였다. 뭐랄까, 전체적으로 영화는 '환각'에 가깝다. 일부러 그렇게 연출한 거겠지만.


서핑을 하던 설이와 수안은 거센 파도를 만나 잠시 피신하게 되고, 거기서 한 오두막 같은 곳에 들어가 몸을 녹인다(이건 아마 수안의 상상일지도 모른다). 비로소 폭설이 그쳤을 때 설이는 '다행이다'라고 말하는 대신 '아쉽다'고 말한다. 둘만의 환상, 환각이 끝을 맞이하는 지점이다.


주인공 윤설(贇雪)과 폭설(暴雪)의 공통점은 파도처럼 수안을 덮쳐오는데 도무지 혼자 힘으로는 제어할 수가 없다는 것이다. (내 멋대로 주인공 이름인 '윤설'의 한자를 빛날·예쁠 윤, 눈 설로 정해봤다.) 윤설과 폭설을 수안은 온몸으로 맞는다. 눈을 맨몸으로 맞으면 감기에 걸리듯, 윤설을 날 것 그대로 맞이한 수안은 지독한 사랑의 병에 걸린다. 그런 의미에서 수안의 마음을 뒤덮은 윤설과 함께한 시간과 바다 한 가운데에서 맞이한 폭설의 경험은 크게 다르지 않다. 사랑의 폭압과 자연의 폭압. 나도 모르는 사이 나를 잠식하는 불가항력, 그 안온한 폭력(暴力)성. 


영화를 표현하기 위한 색채는 그리 많이 필요치 않았다. 하얀 눈밭, 시린 하늘, 하늘빛과 비슷한듯 다른 겨울 바다, 부서지는 파도, 입김. 회색, 하늘색, 파란색, 흰색. 한없이 차갑고 투명하고 시리다. 그러면서도 역설적으로 뿌옇고 모호하고 몽롱하다.


겨울 바다에 설이를 남겨두고 오는 수안의 마음은 어땠을까. 시리도록 차가웠을까. 덮쳐오는 파도처럼 감당할 수 없을 정도로 버거웠을까.





지금 이 글을 쓰는 동안에도 카페에는 캐롤이 흘러나오고 있다. We wish you a merry Christmas, We wish you a merry Christmas, We wish you a merry Christmas, And a Happy New Year-.


올해도 나는 물론 메리 크리스마스를 기다려요. 하지만, 해피 뉴이어를 맞을 준비가 아직 덜 됐어요. 그러니 캐롤은 좀 더 늦게 들을래요. 그러면서도 나는 무의식적으로 캐롤을 따라 불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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