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강 작가님의 얼굴 한 번 뵌 적 없지만 감히 '한강 선배님'이라고 말하는 것은,
같은 학교 같은 과 선배라는 이유로 굳이 나와 한 번 엮어보자는 심산이다.
괜히 '윤동주 선배님'이라고 한 번 불러 보면서 역사적 인물과의 거리를 확 좁히는 것과 비슷한 맥락이다.
맨부커상 수상자, 노벨 문학상 수상작가라고 하면 나와 너무나도 멀어 보이지만,
'선배'이라고 하는 순간 그 작은 접점 하나 생겼다고 심적 거리가 확 가까워지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 글에선 굳이 꿋꿋하게 '한강 선배(님)'라고 부르면서 글을 써보겠다.
오랜만에 차오르는 이 국뽕(?)과 들끓는 애교심(愛校心)이 기록해두지 않으면 연기처럼 흩어져 사라질까봐 두려운 마음도 있다. 이런 마음을 고히 간직하고 붙잡아 두기 위해 이 글을 쓴다.
10월 10일, '한강 노벨 문학상 수상'이라는 속보가 나가자마자 여기저기서 연락이 왔다. 아무래도 기자 동료들의 연락이 대부분이었다.
언론은 앞다퉈 [단독]을 붙여가며 경쟁적으로 기사를 쏟아냈다. 개중에는 출판사가 한강의 노벨상 에디션을 검토중이라는 기사도, 당사자가 아닌 한강 작가의 아버지 소설가 한승원 작가의 인터뷰 내용을 다룬 기사도 있었다. 기자 친구가 "한강 작가가 아버지한테 수상 전화 받고 보이스피싱 인줄 알았다는 말도 했다던데, 이런 식이면 '[단독] 한강, 수상 전화 보이스 피싱인줄' 이런 제목도 나오겠어"라며 우스갯소리를 했다.
특히 눈에 띄었던 것은 "세계 곳곳에서 전쟁이 치열해 날마다 주검이 실려 나가는데 무슨 잔치를 하겠냐"며 "기자회견을 하지 않기로 했다"는 한승원 작가와의 대화를 기사화 한 기사였다. 그것 역시 참으로 그녀다운 결정이자 행보라고 생각했다.
한강의 수상에는 많은 수식어가 붙었다. 아시아 여성 최초, 한국인 최초, 한국 문학사상 최초……. 그도 그럴 것이 일본 작가 무라카미 하루키가 몇년 째 노벨 문학상 후보로 거론되고 있는 시점이었다. 아르헨티나 작가 호르헤 루이스 보르헤스 역시 유력한 수상자로 거론되기도 했다. 이런 맥락 속에서 이번 수상은 문학계의 예상을 뒤엎는 것이었고, 그래서 더 주목을 끌었는 지도 모르겠다.
2016년 소설 '채식주의자'로 맨부커 인터내셔널상(이 역시 한국인 최초였다)을, 2023년 소설 '작별하지 않는다'로 메디치 외국 문학상을 수상했던 작가가 결국 '노벨 문학상'이라는 쾌거를 이뤄낸 것이다.
스웨덴 한림원은 "역사적 트라우마를 직시하고 인간 삶의 연약함을 드러내는 강렬한 시적 산문을 선보였다"고 수상 이유를 밝혔다.
이번 수상을 두고 혹자는 정치와 로비의 결과라고 수상 자체를 폄훼하기도 하고, 아시아 여성 수상자라는 상징적인 수상자가 필요한 시점에 맞닥뜨린 우연과 운이었다고 내려치기 하기도 하고, 순전히 번역 덕이라고 작가를 폄하하기도 하지만 이유야 어찌됐든 대한민국 국민으로서 수상이 자랑스러운 것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한강 선배의 작품은 학부시절, 평론 수업을 수강할 때 처음 접했었다.
"너네 선배 글이니까 더 꼼꼼히 읽도록."
교수님의 당부를 뒤로 하며 읽었던 한강 선배의 '채식주의자'는 속도감 있게 팍팍 읽어나갈 수 없었다.
문장을 읽어 내려갈수록 충격, 스산함, 쓸쓸함, 무력감, 괴기함, 그로테스크, 약간의 역함과 거부감 같은 감정이 복합적으로 밀려왔다. 그래서 조금 버거운 감정으로 힘겹게 읽었던 걸로 기억한다.
이후 읽었던 '흰', '소년이 온다' 역시 읽고 나면 마음이 무거워졌다. 한 개인은 사회가 주는 폭력으로부터 절대 도망칠 수 없는 걸까. 사회가 폭력을 휘두르면 무방비로 당하는 수밖에는 없는 걸까. 그런 생각을 하면 하루가 금세 잿빛으로 변했다. 어느 작품이든 읽고 나면 먹구름이 몰려오는 하늘처럼 어둑어둑하고 습한 여운이 짙게 남았다. 이후 '작별하지 않는다'를 읽었을 때도 이 생경한 감각은 도무지 무뎌지지 않았다.
'고통'과 '폭력'을 직면하는 일이란 좀처럼 익숙해지지 않는 법이니까.
한 친구에게서 "예전에 네가 준 시집ㅋㅋㅋ 다시 읽어봐야 겠다"라는 메시지와 함께 사진 한 장이 왔다. 시집 '서랍에 저녁을 넣어두었다' 책 사진이었다.
돌이켜보니 나는 7~10년 전 '서랍에 저녁을 넣어두었다'는 시집을 몇몇 친구들에게 선물했었다. 학부시절엔 황인찬과 최승자의 시를 퍽 좋아했었는데, 정작 친구들에게 왜 한강 선배의 시집을 선물했었는지 다소 의문이었다.
그때 왜 그랬나 찬찬히 곱씹어 보니 한강의 시는 지나치게 뜨겁지도 그렇다고 차갑지도, 과하지도 부족하지도 않은 감정과 온도라고 생각해서였던 것 같다. 뭔가 부담스럽지 않게 선물하기 좋은 책이었달까. 내가 좋아하는 시와 남에게 선물하기 좋은 시는 다를 수 있는 법이니까.
그땐 그 책이 저녁에 꺼내 한 두편 슬쩍 읽어보면 좋을 만한 시집이라고 생각했는지도 모르겠다.
최근 한 대형서점은 한국서점조합연합회와 한강 소설책의 지역서점 공급과 관련해 갈등을 빚기도 했다. 다행히도 현재는 갈등이 잘 마무리 돼 책 판매가 정상화되었다고 한다.
노벨상 수상 직후 책 소비가 급증했다는 기사 역시 심심찮게 나오고 있다. 한 택배사는 올해 10월 한 달간 배송한 도서 물량이 지난해 같은 기간보다 27.3% 증가했다고 밝혔다. 물론 가을이라는 계절적 요인도 어느정도 있을 것이다.
독서에 대한 열의와 관심이 증가하는 것은 반가운 소식이지만 단순히 반짝하는 관심으로 역사적 트라우마가 소비되는 것은 우려되는 일이다.
나는 요즘 한강 선배의 수상을 진심으로 축하하는 마음으로 오랜만에 그녀의 작품을 다시 꺼내 찬찬히 읽어보고 있다. 여러 논란이 존재하지만 '노벨 문학상 수상작'이라는 수식어와 필터를 벗겨 내고 온전히 작품 자체로 감상해 보기 위해서다.
작품을 역사적·정치적 도구로 이용하고 소비하는데 급급해, '폭력', '고통', '상처'의 구조를 찬찬히 그러면서도 맹렬히 직시하는 문장을 놓치지 않았으면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