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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재이 Oct 20. 2024

고맙다는 말의 비겁함과 미안하다는 말의 폭력성



고맙다는 말과 미안하다는 말은 꼭 필요한 말이고, 담아두는 것보다 말로 꺼내 표현했을 때 훨씬 관계에 도움이 된다는 공통점이 있다. 하지만 그 앞에 '어쨌든'이 붙으면 얘기가 달라진다.



"어쨌든 고마워"


무언가를 흔쾌히 수락하기 전에 '고맙다'는 말을 들어버리는 것만큼이나 난감한 말이 없다. 상대는 교묘하게 책임을 떠넘기며 회피한다. 나에게 카드를 쥐어주고 떠나버리는 말. 어쨌든 고맙다는 말을 들어버리는 순간, 나는 이 일에 책임감을 느끼게 되고, 어찌됐든 신경쓰게 된다. 일이 잘 마무리 되도록 하기 위해. 고맙다는 말뒤에 숨은 이기적인 본성의 그림자는 그래서 비겁하다.


고맙다는 말이 얼마나 좋고 아름다운 말인데.


평소에 사소한 것들에 고맙다는 표현을 많이 하려고 노력한다. 뭐든 당연한 건 없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서로를 당연시 하게 되는 순간 소홀하게 되는 게 아닐까. 상대가 당연하게 생각하고 내게 해주는 행동이라고 해도 고마워, 라고 꼭 말한다. 이제는 습관처럼 제법 의식하지 않아도 툭, 튀어 나온다. 고맙다는 말 한마디 하는 데 돈 드는 것도 아닌데 뭐. 고맙다고 표현하지 않는다 해서 상대가 전혀 서운해하지 않는다고 해도 표현은 할 수록 좋은 거니까. 가까운 사이일 수록, 친한 사이일수록 '고마워'라는 말을 많이 쓰려고 한다.


 내가 좋아하는 아기 '태하'도 일상 생활에서 엄마 아빠한테 사소한 거라도 꼭 고마워, 라고 표현한다. 엄마 물 좀, 고마워. 엄마 밥 맛있게 만들어줘서 고마워, 아빠 만두 먹지말고 남겨놔, 양보해 줘서 고마워. 40개월도 채 안 된 아기도 이렇게 사랑스럽게 매사에 고마움을 표현하는 걸 보면서 많이 배운다.


고맙다는 말에는 '어쨌든' 같은 건 붙일 필요가 없다. 고마운 건 고마운 거다.





"어쨌든 미안해"


미안하다는 말도 마찬가지다. 미안하다면 미안한거지, 어쨌든 미안한 건 또 뭘까. 어쨌든 미안하다는 말은 앞에 뭔가 장황한 변명의 말이 붙거나, 자신의 잘못의 순간을 스스로 설명해야할 때 주로 쓰인다. 그냥 덮어두고 이렇든 저렇든 미안하다는 식, 이 역시 지금 이 순간을 넘어가기 위한 하나의 회피다.


나는 잘못했다고 생각하진 않는데 어쨌든 미안,

아 됐고, 어쨌든 미안,

모르겠는데 어쨌든 미안.


이 말에는 상대방의 입장에서 찬찬히 곱씹어 보고, 진심어린 사과를 하는 '진실성'이 결여돼 있다. 어쨌든 미안하다고 하면 분명 사과를 받았는데 상대가 아무말도 하기 전보다 더 마음이 무거워진다. 내가 어쨌든 사과했잖아, 미안하다고 했잖아, 라는 말이 뒤따라 나오면 상황은 더 최악으로 치닫는다. 더이상 나는 상대를 책망할 수 조차 없게 되는 것이다. '어쨌든 미안'하다고 했으니까. 사과를 받고도 마음 속에는 더 큰 상처로 남는다.


미안하다는 말은 '미안'이라는 그 말 자체로서 의미를 갖는 게 아니다. 미안하다는 말을 하기까지의 과정, 상대의 입장에서도 생각해보고 자기는 미처 몰랐거나 깨닫지 못했던 부분을 알아 차리고 느끼는 것, 그게 더 중요하다. 그러니 과정이야 어찌됐든 결과적으로 미안하다는 말은 속이 비어있어 공허할 뿐이다.


감사와 사과는 온전히 전할 때 가장 아름답다.






그런 의미에서 고맙다는 말과 미안하다는 말은 가장 따뜻한 말이자, 가장 비겁하고 폭력적인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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