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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이상형은 글씨가 예쁜 남자

by 이재이



초등학교 1학년, 학교에 입학하자마자 내 마음을 뒤흔든 남자아이가 있었으니. 그 애는 피부가 아주 희고 키가 컸으며, 이름에 울림 소리가 많아 이름을 부르면 부드럽게 울려 듣기 좋았다.


처음엔 좋아하는 마음보다도 묘한 라이벌 의식이 있었다. 당시 담임 선생님께서는 받아쓰기 시험지를 채점해 돌려주고는 매번 "100점 맞은 사람 손!"이라고 말했고, 손을 들면 "자, 박수!" 하면서 반 아이들에게 박수를 치게 했다. 100점을 맞으면 다소 멋쩍게 손을 든 채로 그 짝짝짝 박수세례를 받았다. 그게 선생님 나름의 칭찬 방식(?)이었던 것 같은데(지금 생각해보면 불필요한 것도 같지만), 그땐 또 그게 굉장한 인정처럼 느껴졌다. 꼬꼬마였으니 뭘 알겠나. 그 별 거 아닌 박수 받으려고 매일 받아쓰기를 열심히 외웠더랬다. 그런데 호기롭게 손을 들고 뒤를 돌아보면 항상 그 아이도 꼿꼿이 손을 들고 있었다. 잘생기고 받아쓰기 잘 하는 아이. 그게 그 아이에 대한 첫인상이었다.


그러던 어느날 우연히 그 아이의 공책을 보게 된 나는 깜짝 놀랐다. 글씨체가 너무 예쁘고 꼭 '어른 글씨'처럼 보였기 때문이다! 연필로 꼭꼭 힘을 주어 눌러 쓴, 교과서에 나와 있는 신명조체를 아무리 열심히 따라 써봐도 영락없는 초딩 글씨인 또래 아이들과는 확연히 다른 글씨체였다. 그 아이는 연필을 잡는 폼부터가 달랐다. 손에 힘을 빼고 연필을 잡았고 슥슥 빠르게 글씨를 써내려 갔지만, 그렇다고 글씨체에 힘이 없거나 날려쓰지 않았다.


심, 쿵! 나는 그때부터 그 아이에게 마음을 뺏기고 말았다.


누군가를 좋아한다는 건 하염없이 시선으로 그를 좇게 되는 것임을 나는 무려 8살에 깨닫게 된다. 그 아이의 일거수 일투족, 사소한 말투나 행동까지 모든 것에 관심이 쏠렸다. 자연스레 그 아이를 관찰하게 됐는데, 그 아이는 바쁘거나 급할 때도 항상 신발을 가지런히 벗어 정리해 두었다.


가지런히 벗어놓은 실내화를 보면서 2차 심쿵! 그렇게 처음으로 좋아하는 남자애가 생긴 것이다. 서로의 생일 파티에 초대도 하고, 받아쓰기 때마다 선의의 경쟁으로 바쁘게 지내다 보니 어느새 2학년이 되었고, 그 애와는 다른 반이 되면서 자연스레 멀어졌다.






초등학교 6학년. 나름 연애 편지랍시고 고백이 담긴 편지를 받았다. 편지 봉투에는 '혼자 보세요'라고 적혀 있었다. 편지를 펼치니 이런 내용이 있었다.


이거 내가 직접 만든 샌드위치야. 맛있게 먹어주면 좋겠어.

노란색 볼펜이라 눈이 좀 아프네. 색깔 바꿔야겠다.

보라색으로 바꿨더니 좀 낫네. 이제 글씨 잘 보이지?

나 사실 너 좋아해. 앞으로 너만 좋아할거야. 해바라기처럼.


이게 내용의 전부다. 편지지 아래 부분에는 당시 유행했던 라이브 펜으로 그린 조악한 해바라기가 자리하고 있었다. 정작 나는 그 애가 직접 만들었다는 샌드위치나 열심히 그린 해바라기 보다도 삐뚤빼뚤한 글씨체가 가장 먼저 눈에 들어왔다. 이 아이는 키도 크고 운동도 잘해서 평소에 괜찮다고 생각했었는데 글씨가 너무 안 괜찮았다. 몽글몽글하던 마음이 짜게 식고 말았달까. 지금 생각해보면 어이없지만 저땐 나름 심각한 사건이었다. 그래도 다 추억이다. 아마 편지함을 뒤지면 고대 유물같은 저 편지가 툭 튀어 나올지도 모른다.






중학교 2학년. 빈둥대던 어느 일요일, 집으로 전화 한 통이 걸려왔다.


여보세요.

-어, 안녕? 나 OO이야. 친구들이랑 목욕탕 갔다가 집 가는 길인데 잠깐 좀 나올 수 있어?

응?

-잠깐 너네 집 앞으로 나올 수 있냐구.

지금?

-어 지금! 아니, 한 5분 후에. 아악 나 돈 없다!!

뭐?

-이거 공중전화인데 나 동전 이제 없어서 곧 끊길 것 같아. 그니까 빨리 대답해.

집 앞에 왜?

-그냥 나와. 기다릵…뚜 뚜 뚜……


그렇게 찝찝하고 애매하게 전화는 끊기고 말았다. 나는 쇼파에 대자로 누워 있다가 갑자기 뜬금없이 집앞으로 나오라는 전화에 난감해졌다. 조금 귀찮기도 하고 도대체 왜 나오라는 지 몰라 어안이 벙벙했는데 중간에 끊기긴 했지만 왠지 나올 때까지 기다리겠다고 말한 것 같아서 집 앞에 나갔다. 그 애는 나한테 삼각포리 커피우유를 하나 주고 갔다. 나는 그 당시(물론 지금까지도) 하루에 한 팩씩은 꼬박꼬박 마실 정도로 그 커피우유를 엄청 좋아했다. 커피우유를 주고 간 그 아이에게 전혀 감흥이 없었지만, 뜻밖의 이유로 나는 마음이 동하고 만다.


그 애는 모두가 틀리기 쉬운 맞춤법을 바르게 지켜서 문자를 보냈다. 문자에 '할께'가 아닌 '할게'라고 쓰고 내꺼야 라고 하지 않고 '내 거야' 라고 꼬박꼬박 맞춤법을 지켰다. 그걸 보고 심쿵했다. 그 정확한 맞춤법에. 그 아이는 글씨도 예뻤다. '오늘 집 가는 길에 책 무거우면 내가 들어줄게'라고 쓰인 쪽지 속 글씨를 하염없이 바라봤다. 줄게, 줄께가 아니라 줄게. '줄게'를 여러 번 속으로 되뇌면서 나는 기분이 좋아졌다.






내 취향은 참 한결같은지 어느 배우의 글씨를 보고 또 마음을 뺏기고 말았다. 바로 박보검 배우다. 그가 도종환 시를 필사한 걸 보고 내 글씨보다 더 예쁜 것 같은 필체에 반했다. 정말이지 여전한 취향이 아닐 수 없다.

화면 캡처 2025-03-13 140828.jpg


글씨가 예쁜 남자는 아무래도 지적인 느낌을 준다. 연필과 펜을 많이 잡아보고 정확하게 어디서 힘을 주고 힘을 빼는지, 고유한 자기만의 자음과 모음을 쓰는 방식이 있는지, 자기만의 개성있는 필체가 생기기까지의 과정이 글씨에 고스란히 드러나기 때문이다. 그게 참 섹시하다. 글씨체가 예쁘면 왠지 마음도 예쁠 것 같고 성격도 착할 것 같다.


어렸을 때의 이상형이 지금까지 유효한 건 글씨가 예쁜남자가 유일하지 않을까 싶은데. 음, 이상형이라고 하니 어감이 좀 거창하지만…. "글씨가 예뻐야 돼!"하면서 굳이 찾아보거나, 글씨가 예쁜 남자가 무조건 좋다기 보다는 우연히 필체를 봤는데 글씨가 예쁘면 속절없이 심쿵하고 마는 편이다.


나는 여전히 글씨가 예쁜 남자가 좋다. 반듯한 글씨처럼 마음도 바를 거라는 내 기대가 아직은 처참히 배반당한 적이 없기 때문일까. 나는 이 알량한 확증편향을 당분간은 버릴 생각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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