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는 참 쓸모없다. 하지만 시 없이 살 수 있냐 물으면 우습게도 나는 섣불리 그렇다 답할 자신이 없다.
쓸모 있는 사람, 쓸모 있는 인재, 쓸모 있는 구성원, 쓸모 있는 물건, 쓸모 있는 지식. 일상에서도 사회에서도 지겹도록 쓸모 쓸모 쓸모…쓸모를 갈구한다. 끝없이 쓸모를 찾는 세상에서 세상 물정 모르는 사람처럼 외친다.
"거 좀 쓸모없으면 안 되나요?"
노자는 “무용취시유용(無用就是有用), 대무용취시대유작 위(大無用就是大有作爲)”라 했다. 쓸모없는 것이 곧 쓸모 있는 것이 되고, 쓸모가 없을수록 더 큰 용도로 쓰이게 된다는 것이다. 장자 역시 무용지유용(無用之有用), “쓸모없는 것이 가장 쓸모 있는 것이다”라고 역설한 바 있다.
무용(無用)의 유용(有用). 시만큼 여기 딱 들어맞는 게 없다. 평소에 주로 경제학이나 역사 관련 서적을 주로 읽는 친구가 시를 읽으면 드는 생각이 딱 하나라고 했다.
그래서 뭐 어쩌라고?
그 반응이 너무도 적절해서 나도 실소를 터뜨리고 말았다. 그렇다. 시는 참 어쩌라는지 모르겠다. 근데 그래서 나는 시가 좋다. 시가 참 쓸모없기는 해도 그 몇몇 문장이 기어이 내가 삶을 살아가는 원동력이 된다. 이 얼마나 위대한 쓸모인지.
당장 쓸모가 없어도, 돈을 벌어다 주는데 눈곱만큼도 유용하지 않아도, 습관처럼 시를 읽는다. 시를 읽는다는 것은 어쩌면 지난한 일상으로부터 잠깐이나마 탈피할 수 있는 가능성을 부여받는 일인지도 모르겠다. 시에 아무 정보가 없어도, 시인의 언어가 썩 마음에 들지 않아도 시를 읽는다는 것은 그 자체로 의미 있다. 내 안에 감상하는 자아가 건재하다고 보긴 힘들지라도 그저 미미하게나마, 여전히 존재함을 일깨워주니 말이다.
나는 마음속으로 시어나 시구를 멋대로 조롱하기도 때론 찬미하기도 하면서 시에 공감하기도, 반기를 들기도 한다. 마음껏 감탄하고 때때로 의문을 품고 몇 문장에 울고 웃는다. 그러다 보면 어느새 시간이 몇 시간 훌쩍 지나있다.
시 없이 살 수는 있겠지만, 정말 시가 없다면 무슨 재미로 사나.
8년 전 김민정 시인의 시집 '아름답고 쓸모없기를'이 나왔을 때 제목을 보자마자 무릎을 탁 쳤다. 그래, 맞아! 이 세상에 참 시만큼 아름답고 쓸모없는 게 없다.
시는 행복의 속성과 맞닿아 있다. 행복이라는 것도 참 소소하고, 금세 사라지고, 결코 영원하지 않으며 절대적이기보다는 상대적인 것이 아니던가. 하물며 지극히 아름답다는 것조차 닮았다.
쓸모없지만 아름다운 기억들이 모여 행복감이라는 감정을 만들고, 이는 결코 영원히 존재하지 않는다는 불영원성 때문에 더없이 소중해진다. 찰나의 행복을 붙잡고도 싶지만 결국 흘려보내는 수밖엔 없다. 삶에선 끊임없이 행복과 불행이 밀물과 썰물처럼 교차하며 영원히 행복할 수도 그렇다고 계속 불행할 수도 없다. 똑같은 상황이지만 누군가는 거기서 행복의 실마리를 찾을 수도 불행의 씨앗을 줍게 될 수도 있다.
이 쓸모없는 행복, 하지만 불행의 순간을 견디게 해주는, 고난을 버티게 하고 결국 지난한 인생을 살아가게 해주는 이 아름답고 쓸모없는 것. 시도 어쩌면 그런 게 아닐까.
물론 살다 보면 일상에 치여 시를 잊고 살 수도 있다. 그래서 시가 내 일상 속에 존재했는지 조차 까마득히 잊을 수도 있다. 하지만 그러기엔 가슴 한 구석에 시 한 구절 품고 사는 재미를 이미 알아버렸는지도 모르겠다. 좀 오버하자면, 나는 이미 시를 사랑하게 되어 버렸기 때문에 시 없이는 살 수가 없다.
가슴속에 시 한 구절 품고 사는 삶의 미학. 그 아름다움. 참 쓰잘데기없는 것 같다가도 동시에 벅참과 감동을 주는 위대함과 아름다움을 나는 안다. 그 생명력과 행복감.
그래서 나는 아마 죽을 때까지도 돈을 버는 족족 시집을 잔뜩 사고 꾸준히 쓸모없는 문장들을 찾고, 좇고, 마음속에 품으면서 살 것 같다. 무용의 유용, 쓸모없음의 쓸모를 여전히 추종하면서, 그 안에서 한없이 안락함을 느끼면서, 쓸모없는 것들을 좀 더 성실히 탐닉할 수 있기를. 그 쓸모없는 탐닉이 내 안에서 찬란한 쓸모를 꽃피울 수 있을 때까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