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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너지를 응축하는 방식

by 이재이



주말 동안 온종일 폰을 꺼놨다.


연초라 그런지 평소보다 더 많은 연락이 쌓여 있었다. 해를 마감하고 새로운 해를 맞이하는 순간에 인사를 건네는 건 너무 고마운 마음이고 또 소중하지만, 하나하나 다 답변할 생각을 하니 동시에 약간의 피로감도 있었다. 건성건성 대충 읽고 대충 답하고 싶지 않았고 그건 또 예의가 아니라 생각했기 때문에(이런 생각을 하는 시간에 그냥 빠르게 답을 하는 게 더 나을 수도 있겠지만) 나중에 한 번에 몰아서 읽고 답장을 하기로 했다.


주말 동안만이라도 전화, 문자, 카톡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게 휴대전화 전원을 껐다. 그것만으로도 일상에 스며든 잦은 기계음으로부터 멀어질 수 있었다. 한두 시간만 폰이 꺼져 있어도 그 사이에 중요한 연락이 왔으면 어쩌지 하고 조바심이 나고 불안했는데, 이젠 그렇지 않다. 하루이틀 폰 꺼놨다 해서 크은일이 나는 경우는 지극히 드물다는 걸 이젠 안다.






오랜만에 멜론에 로그인을 했다. 열심히 음악을 디깅해서 듣던 때의 내 재생목록을 슬쩍 보기 위해서다. 다양한 장르를 즐겼기 때문에 초기의 재생목록은 시티펍이면 시티펍, 재즈면 재즈, 힙합이면 힙합 같은 식으로 장르별로 묶어 저장해 뒀었다. 아니면 내가 생각하기에 음악적 색채나 분위기가 비슷한 아티스트를 묶어 재생목록으로 따로 저장했다. 그러다 이후에는 그냥 시기별로 그 무렵 듣는 음악들을 죄다 모아 '2019. 01~02' 이런 식의 재생목록을 만들었다. 신기하게 해당 시기의 재생목록만 스윽 훑어봐도 어떤 생각을 하고 있는지, 이땐 어떤 감정이었는지를 대충 알 수 있을 것 같았다.


요즘음 그냥 유튜브에서 알고리즘이 추천해 주는 음악들을 듣는데 그러다 정말 내 취향인 음악을 만나면 와, 세상 참 편하다. 어쩜 이리도 딱 맞는 음악을 큐레이팅해줄까 하고 감탄하기도 한다. 알고리즘의 추천은 시간을 대폭 줄여준다. 내가 직접 이 아티스트 저 아티스트를 뒤지지 않아도 되고, 앨범을 하나하나 들어보는 수고스러움도 없으니까.


하지만 그 재생목록은 왠지 '내 것'이 아닌 느낌이 든다. 내가 만든 게 아니라 그런가. 오직 내 취향으로만 딱 맞게 짜여진 재생목록과는 달리 중간중간 별로인 곡들도 섞여 있다. 스킵을 하거나 귀찮아서 그냥 카페에 흘러나오는 곡 듣듯이 흘려듣는 경우도 있다. 내 재생목록을 들을 땐 처음부터 끝까지 그런 일이 없다. 그런 곡들은 애초에 내 재생목록에 들어오질 못하고 제외됐을 테니까.


올해는 시기별로 재생목록을 만들어 두는 일을 다시 해보면 어떨까 생각했다. 조금 귀찮더라도 그렇게 해두면 일기를 쓰거나 그림을 그리는 것과 다른 방식으로 또 내 역사가 기록되는 기분이랄까. 음악이 그 시기 내 일상의 일정 부분을 대변해 준다. 그리고 노골적이고 직접적이기보다는 그걸 간접적으로 '느끼는' 방식이라는 게 좋다. '음 이 시기에 이런 음악들을 들은 걸 보니까 마음이 심란했나 보구나' 하고 느끼는 건 '요즘 심란하다'라고 적힌 일기를 읽는 것과는 확실히 다르다.






브이로그 같은 걸 잘 안 보는데(그냥 요즘 모든 영상 콘텐츠를 잘 소비하지 않는다) 꼬박꼬박 보는 영상이 몇몇 있다. 그 사람들은 자기가 어떤 일을 하면 기분이 좋아지는 지를 귀신같이 아는 사람들이다. 좋아하는 골목길을 산책하고, 맛있는 음식과 커피를 찾아 마시고, 좋아하는 시집이나 책을 읽는. 양말 하나에도 기뻐하고 연필 한 자루에도 감격하는 그런 감성을 지닌 사람들.


감성적인 사람은 지극히 사랑스럽다는 공통점이 있다. 설령 그 감성의 결이 나와 맞지 않는다 할지언정 자신만의 감성을 구축하고 그 안에서 안락함을 느끼는 모습을 보면 생명체로서의 가장 사랑스러운 순간을 마주하는 느낌이라 나까지 절로 정화되는 기분이다.


좀 더 많은 사람들이 더 솔직하게, 더 적극적으로 자신의 감성을 찾고 지켜나갔으면 좋겠다. 자신만의 감성이 있는 사람은 적어도 마음이 가난하지 않으니까. 수없이 많은 시행착오를 겪으며 견고하게 다져온 감성이 곧 자기 재산이니까 내가 한없이 초라하게 느껴질 때도 그 감성에 기대어 자기 자신을 지탱해 나갈 수 있을 것이다.


그들은 내적인 에너지를 응축하는 방식을 안다. 에너지가 무분별하게 분산되지 않게 차곡차곡 내 안으로 에너지를 응축시킨다. 그리고 그 에너지를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아낌없이 나눠준다.






일상은 에너지의 응축과 분출의 반복이다. 좋은 에너지를 방출하기 위해서는 유의미한 응축의 과정이 필요하다. 인풋이 있어야 아웃풋이 있듯 좋은 에너지를 응축하고 흡수해야 좋은 에너지를 방출할 수 있는 건 어찌 보면 당연하다. 그 아름다운 선순환을 지속시키기 위해 내 감성을 갈고닦는 게 아닐까.


올해는 책도 음악도 꼭꼭 씹어 소화시켜 좀 더 유의미한 에너지를 많이 응축하는 한 해를 보내야겠다. 그 에너지를 마음껏 방출하면서 행복한 한 해가 될 수 있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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