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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름길은 없다

by 이재이



요즈음 한자 공부에 매진하고 있다. 공부하는 김에 급수도 따고, 이래저래 노력하고 있는데 한자를 공부하다보니 깨닫게 되는 의외의 사실이 있다.


가장 빨리 가기 위해선 결국 가장 가기 싫은 길을 지나야 한다는 것이다.






나는 한자를 싫어했다. 중, 고등학교 때까지는 그냥 내신 공부하면서 외워야 할 한자들을 외우는 정도였고 한국어능력시험을 준비하면서 기출문제에 나오는 사자성어와 한자 동음어/반의어 어휘들을 외우는 정도였지만 시험이 끝나면 알레르기를 일으키듯이 한자를 쳐다도 보지 않았다. 우리나라 어휘의 대부분이 한자어휘거늘 …어리석은 생각이었다.


평소에 글을 읽다가 생소한 어휘가 나오면 그때그때 사전을 찾아보고 정확한 뉘앙스를 익혀 두기는 했지만 괄호 안에 있는 한자까지 외우진 않았다. 영어 단어 10개를 외우는 것과 한자 10글자를 외우는 걸 단순 비교하면 한자가 훨씬 안 외워졌기 때문에 나는 최대한 한자 외우기를 요리조리 피해왔다. 기본기가 부족했고, 한자에 대한 단순한 거부감(?)까지 가세해 한자가 더 어렵게 느껴졌던 것 같다.


졸업 요건 중에 한자나 일본어 등 영어를 제외한 제2외국어 자격을 채워야하는 요건이 있었는데 그때도 나는 한자 외우기가 싫어서 일본어를 선택한 사람이다. 그런데 이 일본어를 공부하다보니 나중엔 결국 '칸지(일본식 한자)' 때문에 한자를 외울 수밖에 없었다. 이 때 야매(?)로 시험에 나오는 한자들 위주로 전략적으로 외웠고 무사히 졸업을 했다.


이후 일본어 실력을 향상하려고 할수록 결국 어휘 싸움이었고, 그건 한자 공부에 일정시간을 투자해야 한다는 사실과 다르지 않았다. 결국 나는 그놈의 한자 때문에 그즈음 일본어에 대한 흥미를 잃고 슬며시 공부를 접었다. 그래, 이 정도면 여행 가서 메뉴판을 읽고 주문도 할 수 있고, 어느정도 일상적인 회화도 가능하고 기본적인 비즈니스 회화를 하는 데는 지장 없잖아? 그런 식으로 자기합리화하면서.


중국어 공부를 하려고 보니 당연히 또 한자가 중요했다. 나는 또 피했다. 그러다 뜬금없이 '고전 읽기'에 빠져 논어, 맹자, 대학, 중용 등을 읽다보니 한글 해석이 각기 달라 '원문'을 보고 싶다는 데 생각이 미쳤다. 원문으로 읽어보면 뭔가 나에게 더 와닿는 해석이 있지 않을까 싶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원문을 읽으려면 당연히 한자 공부를 해야 했다.


요리 피하고 조리 피해도 결국은 한자, 한자, 한자가 내 발목을 잡았다. 계속 도망가던 나는 마침내 두 손 두 발 다 들고 항복을 외쳤다. "그래, 내가 졌다, 졌어. 공부할게. 하면 되잖아!" 나는 속으로 울부 짖으며 서점으로 달려가 한자 공부에 필요한 책을 사왔다.






한자 급수책은 보기만 해도 숨이 턱 막혔다. 무수히 많은 한자는 글자가 아니라 각기 다른 하나의 그림처럼 보였고 대충 훑어보기만 해도 토가 나올 것 같았다. 그래도 어쩌겠나. 공부하기로 결심해 버린 것을. 이번에 공부하지 않으면 영영 한자를 극복하지 못할 것 같았기에 다시 마음을 가다듬었다.


스스로 한자에 대한 기본기가 부족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대충 주워들은 것들이 있긴 했어도 아예 처음부터 다시 공부하기로 했다. 맨 첫 장의 한자 제자원리부터 차근차근 공부했다. 상형, 지사, 회의, 형성 4가지 제자 원리를 확실히 익혀두고 기본 부수자를 다 외웠다. 그리고 나서 3급 한자부터 차근차근 외워가기 시작했다. 역시 의미없는 시간은 없는 법인지 일본어를 공부할 때 외웠던 칸지가 한자 공부에도 도움이 됐다.


영어 단어도 접두사, 접미사, 어원 등을 알면 모르는 단어라도 얼추 뜻을 유추할 수 있고 쉽게 외워지 듯이 한자도 마찬가지였다. '이런 부수가 이 위치에 오면 이런 의미를 내포하는 구나…' 이렇게 느끼면서 공부하니 한자가 재미있고 한자 암기에 걸리는 시간이 대폭 줄었다. 언어는 미친듯이 휘몰아쳐야 실력이 상승한다는 걸 알기 때문에 나는 속도를 높여 2급, 1급 한자들을 머릿속에 때려 붓기 시작했다. 몇 천자를 외워야 한다고 생각하면 시작도 전에 힘이 빠졌지만, 그냥 눈에 자주 익히자는 생각으로 부담없이 여러 번 읽으니 한결 나았다. 손으로 쓰면 힘들어서 지쳐버리니까 여러번 보다보면 외워질거라는 모종의 믿음(?)으로 '3번 쓸 시간에 10번 보자'는 심산이었다.


한문 문법은 가장 유명한 '논어'로 하려다 사서 중에서는 가장 짧은 '대학(大學)'을 처음부터 끝까지 달달 외워버리기로 했다. 노래 한 곡을 완곡하듯이 대학을 줄줄이 외울 수 있게 되니 자연스레 어조사나 순접, 역접 등이 머릿속에 들어왔다. 물론 지금도 아주 부족한 실력이지만, 불과 몇달 전의 나를 생각하면 놀라운 변화였다. 지금은 한자가 제법 익숙해져서인지 한자에 대한 거부감도 해소되고, 가아끔 아주 가아끔 한자 공부에 재미마저 느끼게 된 것 같다.






20대 때 한자를 피해 일본어를 선택해 졸업 요건을 채우는 대신 한자를 제대로 공부했다면 어땠을까. 아마 지금보다 훨씬 더 빨리 한자라는 벽을 넘을 수 있었을 테다. 일본어 단어를 외울 때도 훨씬 수월해져 일본어에 흥미를 잃고 덮어두는 일도 없었을 거고, 어쩌면 중국어에 흥미를 느끼고 공부를 지속했을 지도 모른다. 그러지 못했기 때문에 이렇게 돌고 돌아 이제서야, 그때보다 체력도 두뇌 가동속도도 떨어지는 지금에 와서야, 이렇게 더 어렵게 공부를 하고 있다. 쉽게 가려고 가기 싫은 길을 돌아돌아 갔지만, 결국 그 길을 지나가고 있는 것이다.


지름길은 없다. 결국 차곡차곡 그 길을 지나올 때, 험난한 길이라도 그 길을 온전히 거쳐갈 때 비로소 목적지에 도달할 수 있다. 꼼수 부리지 않고 정면돌파 했을 때 가장 빨리 그곳에 도달한다. 그걸 이번에 한자공부를 하면서 몸소 깨달았다.


쉬운 길을 가고 싶다는 유혹에 혹할 때마다 정신을 차리고 되려 가장 어려운 길을 택하라는 말을 들은 적이 있다. 쉬운 길은 성공해도 별 의미가 없고, 어려운 길은 실패해도 그 과정 속에서 남는 게 있다는 것이다. 그 말이 어떤 말인지 온전히 와닿았다.


어떤 일을 하기 싫을 때, 몸이 거부할 때, 오히려 그걸 똑바로 보고 돌파해 버려야지. 계속 회피하고 다른 대체할 거리를 찾느라 머리 굴리는 에너지로 그냥 해버리는 게 결국 그 일을 가장 빨리 정복하는 길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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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요일 연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