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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열은 늘 옳은가

by 이재이



오늘은 카페에 앉아 후다닥 써 내린 글을 몇 번이고 다시 읽으면서 퇴고했다. 어쩌면 글을 쓴 시간보다 퇴고의 시간이 더 길었는지도 모르겠다. 글 내용을 바꾸거나 구조를 바꾸기보다는 몇몇 표현이나 조사를 바꾸는 정도가 전부였다.


'너만 보면'이라고 썼던 걸 '만'이라고 하면 너무 단정적이고 항상성을 반영하는 어투 같아 다시 '너를 보면'으로 고쳤다. 다시 읽어봤더니 '너를'이라고 하니 미묘한 뉘앙스가 느껴지지 않는 것 같아 다시 '를'을 '만'으로 고쳤다. 이런 식의 퇴고를 반복했다.


3번 정도 퇴고를 반복하다 보니 맨 처음에 단숨에 써 내려갔던 글이 날 것의 감정과 의도가 가장 솔직하게 반영된 글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어색해 보였던 표현도 곱씹을수록 굳이 그 단어를, 그 조사를, 그 표현을 골라 썼던 이유가 있었다. 5번의 퇴고 과정을 거치니 결국 글은 맨 처음에 썼던 글로 돌아가 있었다.


좀 이상하게 들릴지 모르지만 처음 쓴 글이 제일 별로인데, 그래서 제일 좋았다.






글쓰기 과정은 세부적인 걸 생략하면 크게 개요 짜기, 글쓰기, 퇴고로 나뉜다. 어떤 작가는 엄청 고심하고 한 번에 글을 써내려 간 후 절대 고치지 않는다고 한다. 그야말로 일필휘지(一筆揮之)다. 그것도 엄청난 자신감이라고 생각한다. 나는 그러면 첫 문장을 쓰는 데 너무 오랜 시간이 걸릴 것 같았다. 절대 고칠 수 없다면, 후회 없는 한 문장으로 남기기 위해 얼마나 오래 고심해야 할지 가늠이 되지 않았다.


지금까지 나는 일단 쓰고 나서 고치는 쪽으로, 한 발 물러선 곳에서 최대한 객관적으로 내 글을 읽어보면서 검토하는 걸로 스스로 트레이닝(?)해왔다. 생각해 보면 애초에 내 글을 객관적으로 읽는다는 것 자체가 불가능하다. 그러다 보니 괜히 꼬투리 잡아보는 식으로 내 글에 딴지를 걸어보곤 한다. 이럴 수도 있는 거 아냐? 저럴 수도 있는 거 아냐? 하면서. 그 모든 걸 고려하고 의식하다 보면 자꾸 설명이 덕지덕지 붙고, 결국 글이 길어지고 만다.


최악이다. 트랜스 지방이 덕지덕지 붙은 몸처럼 사족이 붙어 지저분해진 글은 다이어트가 필요하다.







아나운서 준비생 시절, 카메라 앞에 서서 하는 30초짜리 자기소개를 수도 없이 반복 연습했다. 소위 '카테', 카메라 테스트를 대비하기 위해서다. "안녕하십니까, 누굽니다"라고 말하는 그 3초 동안 합격 불합격이 결정된다고 했다. 그리고 그건 시험을 보다 보면 어느 정도 사실인 것도 같다. 그 인사 한마디에 발성, 발음, 표정, 전체적인 이미지, 비율 등을 파악할 수 있고 그건 어떤 '인상'을 남기기 때문이다.


이 초반 3초에 심사위원의 시선을 사로잡으면 그 뒤 자기소개의 '내용' 자체는 합·불합에 결정적으로 영향을 미칠 만큼 중요한 요소는 아니라고 했다. 실제로 공중파 3사 중 한 곳은 카메라테스트 당시 한 사람당 10초도 채 보지 않아서 아준생들 사이에서 논란 아닌 논란이 되기도 했다.






연습 모니터링은 생각보다 아주 디테일하게 한다. 카메라 앞에서는 사소한 단점이나 비대칭이 실제로 보는 것보다 훨씬 두드러지게 티가 나기 때문이다. '아, 나는 웃을 때 왼쪽 입꼬리가 오른쪽 입꼬리보다 살짝 덜 올라가는구나. 신경 써서 웃어야지.', '왼쪽 쌍꺼풀이 조금 더 작은 게 화면에서 티가 많이 나네. 다음에는 왼쪽 눈 아이라인을 오른쪽보다 조금 더 도톰하게 그려야지.', '나는 입술을 진하게 바르지 않은 게 훨씬 잘 어울리네.', '"안녕하십니까"라고 말할 때 '까'소리가 너무 튀네.' 이런 식이다.


모니터링은 현직으로 일할 때도 필요하다. 라디오리포터로 일할 때 내 목소리를 방송 마이크로 들으면 너무 적나라해서 소름이 돋을 지경이었다. 아침 방송이었기 때문에 활기찬 아침을 시작하는 사람들을 고려해 목소리가 너무 가라앉아서도 안 됐고, 시사 라디오였기 때문에 너무 방방 떠도 안 됐다. 초까지 딱 맞춰 끝나야 하는 방송이기 때문에 PD의 콜에 따라 중간중간 말이 빨라지거나 느려지는 건 어쩔 수 없었지만, 마음이 조급한 걸 적어도 청취자에게는 들키지 말아야 했다. 물 밑에서는 바쁘게 다리를 움직이지만 호수 위에 평온하고 우아한 자태로 떠 있는 백조처럼 급박한 상황에도 여유와 자연스러움을 유지해야 했다. 그 선을 지키기 위해 매일 내 목소리를 들었다.


방송을 모니터링할수록 '그 누구에도 거슬리지 않는 것'이 중요해진다. 그러다 보면 '이렇게 해야지'보다는 점점 '이렇게 하지 말아야지'가 늘어난다. 나는 당황하면 중간에 '이제'라는 표현을 너무 많이 쓰네, 의식적으로 쓰지 말아야지. 이런 식으로 생각하다 보면 오히려 점점 더 경직되고 부자연스러워지는 딜라마에 봉착한다. 이 때문인지 캐릭터가 강한 연예인들은 오히려 방송 모니터링을 하지 않는다는 말도 들었다. 모니터링하다 보면 남들에게 거슬릴 수 있는 부분이 자기 눈에도 자연스레 보이고, 그걸 조심하다 보면 결국 캐릭터를 잃어버리기 된다는 이유에서다. 처음 들었을 때는 '그래도 모니터링을 해야 방송이 늘지 않나'하고 갸우뚱했던 말이지만, 지금은 정말 그럴 수도 있겠다는 생각에 어느 정도 납득이 된다.






그 누구에게도 거슬리지 않는 것에 집착하다 보면 결국 개성을 잃고 만다. 어차피 모두에게 '호'일 수는 없는데, 조금의 '불호'도 허용하지 않으려다 보니 '극호' 마저 잃게 되는 비극.


말 한마디도 너무 조심하려고 하다 보면 결국 말을 하는 게 피로감으로 다가온다. 아 몰라 그냥 말을 아끼자, 아무 말도 하지 말자, 이렇게 되는 것이다. 어느 누구도 불편하지 않아야 하고, 거슬리지 않아야 하고, 조금의 비난도 받지 않아야 하고, 그러다 보면 표현을 희석하고 또 희석하고 우회하고……. 그럼 결국 애매모호한 말이 된다. 자기 의견인데도 자기 의견이 아닌 말처럼 이상하게 들린다.


방송을 그만두고도 한동안 모니터링하는 게 버릇이 됐는지 일상적인 만남이나 친구를 만날 때도 그날 대화를 복기하면서 혹시 내가 잘못 말한 것은 없는지 자기 검열하는 나를 발견하게 됐다. 그리고 이런 지나친 자기검열이 스스로를 갉아먹고 위축시키는 일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이제는 그런 지나친 자기검열로부터 나를 놓아주었다. 더 이상 나는 말 한마디에도 의식적으로 머릿속 모니터를 돌리지 않는다.


시간을 되돌려도 나는 그때 그런 감정을 느끼고 그런 생각을 하고 그런 말을 했을 거야. 대신 매사에 조금 더 따뜻하고 부드럽게 말하는 버릇을 들이자. 다정하게 말하자. 그저 그런 생각을 할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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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요일 연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