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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재이 Feb 09. 2022

무수히 많은 자국을 남기는 일

월간에세이 02월호 게재 원고

    라디오 리포터로 첫 방송을 했던 기억을 떠올리면 시간이 제법 흐른 지금까지도 살짝 소름이 돋으면서 미세한 떨림이 전해진다. 차가운 겨울 아침 공기, 네모난 라디오 부스, 빨간 전자시계 숫자……그때 그 공기가 주는 떨림은 단지 계절이 겨울이었기 때문만은 아니리라. 

 방송 마이크는 감도가 좋아서 침을 꼴딱 삼키는 소리, 대본 넘기는 소리, 입술을 떼는 소리까지 너무 적나라하게 들렸다. 행어 잡음이 들어갈까 노심초사하며 마이크 앞에서 분주히 입을 움직였던 그 순간의 기억. 

 내가 맡았던 방송은 아침 생방송 코너라 눈앞의 큼지막한 시계 숫자를 응시하며 상황에 따라 대본을 늘였다 줄였다 해야만 했다. 첫 방송이라 긴장도 되는데 시간 신경 쓰랴 이어폰 너머로 들리는 피디님 목소리 신경 쓰랴 정말이지 정신이 없었다. 아침이라 목이 좀 잠긴 것 같은데 내 목소리는 괜찮은가? 너무 빨리 말하진 않았나? 그런 생각을 하는 것도 잠시, 찰나처럼 방송 시간이 지났다. 

 ‘딸내미, 첫 방송 잘 들었어! 긴장 좀 했나본데?’하는 장난스러운 엄마의 문자를 뒤로한 채, 방송 된 내 목소리를 듣고 처음 든 생각. 

 ‘아니 잠깐만, 이 여자 누구야?’

처음 듣는 목소리였다. 정말 내 목소리가 이렇다고? 평소 알고 있던 내 목소리가 아닌 것 같았다. 어찌나 어색하던지. 창피하기도 하고 울렁거리기도 하고 뭔가 이상했다. 가족과 친구들에게 물어봤더니 ‘그냥 네 목소린데?’하는 게 더 신기해서 재차 확인했던 기억이 난다.

 흔히들 라디오를 아날로그 매체라고 한다. 영상매체가 나오면 라디오는 밀려날 거라던 수많은 억측 속에서도 라디오는 여전히 전파에 분주히 목소리를 실어 나르고 있다. 라디오 리포터로 일하면서 내 목소리가 소위 ‘전파’를 타고 있다는 것, 청취자와 내가 ‘주파수’로 연결되어 교감하고 있다는 걸 새삼 실감한 적이 있다. 

 아침 방송을 마치자마자 다음 날 방송 취재를 위해 한 사진전에 간 날이었다. 열심히 전시를 관람하고 있는 한 노부부를 인터뷰하고자 조심스럽게 말을 걸었을 때였다.

 “어? 아가씨 잠깐만, 아가씨 혹시 아침에 방송하지 않아요? 이름이 이 뭐시기 리포터였는데.”

 나는 당황스럽기도 하고 신기하기도 해서 잠시 멈칫했으나, 이내 정신을 차리고 그 ‘이 뭐시기’가 나임을 밝혔다.

 “아, 맞아요. 포항KBS 이유정리포터라고 합니다.”

 “아 맞다, 맞다. 이유정 리포터! 우리 매일 아침마다 그 방송 듣거든요. 어제도 아가씨가 방송에서 알려줬던 식물원 가서 구경하고 왔는데. 목소리 들으니까 딱 알겠더라고.”

 어르신께서는 신기해하며 이렇게 만나다니 너무 반갑다고 같이 사진이나 한 장 찍자며 수줍게 휴대 전화를 내미셨다. 오히려 신기한 건 내 쪽이었다. 그것이 청취자와의 ‘첫 대면’이었기 때문이다. 나는 감사한 마음으로 흔쾌히 사진을 찍어드렸다. 오늘 인터뷰는 내일 아침 방송으로 나가게 될 거라는 말을 덧붙이면서. 

 나는 문득 처음 느껴보는 낯선 감정의 감촉을 느꼈다. 이렇게 내 방송을 귀 기울여 들어주는 사람이 있구나, 내가 정말 어떤 사람들의 일상에 조금이나마 실질적인 도움을 주고 있구나, 그런 생각이 들어 너무 뿌듯하고 신이 나서 집에 돌아가자마자 길고 긴 일기를 썼다. 많이 신났던지 그날 다이어리에는 별표가 왕창 쳐져있다.

 또 한 번은 저녁 늦게 취재가 끝난 탓에 밤을 꼴딱 새워 편집하고, 아침 출근길에 급하게 택시를 탔을 때였다. 

 “KBS 방송국으로 가주세요.”

 목적지를 말하자 택시 기사님이 곧장 뒤를 돌아보았다.

 “어? 이유정 리포터 아니에요?”

 나는 순간 처음 보는 사람에게 내 이름 세 글자가 정확히 호명된 것에 놀라,

 “어떻게 아세요?”

 하고 제법 바보 같은 질문을 던졌다.

 “방송 들으니까 알지.”

 하는 기사님의 대답을 들으며 언뜻 보니, 주파수가 내 방송 라디오로 맞춰져 있었다.

 “8시 30분에 아가씨 나오더만.”

 “어, 맞아요. 잘 아시네요.”

 “잘 알지, 매일 듣는데.”

 기사님은 나를 목적지까지 쏜살같이 데려다주시고는 오늘 방송도 잘 듣겠다는 말을 남겼다. 택시 문을 닫으면서 문득 내가 이 작은 도시의 많은 사람들과 연결되어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얼굴은 몰라도 내 목소리를 아는 사람들, 알아봐주는 사람들, 내 이야기를 들으면서 아침을 시작하는 사람들이 있다는 것, 그런 사실들이 너무 빛나고 아름다워서 그 날 방송을 어떻게 끝냈는지 모르겠다.

‘주파수’로 연결되어 있다는 게 이런 거구나, 추상적인 게 아니라 이토록 구체적인 거구나.

 그런 일을 할 수 있다는 게 감사하고도 벅찼다.

 얼마 전, 친구에게서 문자가 왔다. 

 “내 친구가 고맙대.”

 뜬금없는 문자에 왜냐고 물었더니 “네가 쓴 기사 읽고 주식 샀는데 엄청 올랐다는데?”라는 답이 날아왔다. 친구들끼리 주식 얘기를 하다가 기사 리포트를 보는데, 이름이 낯이 익어 확인했더니 내가 쓴 기사였다며. 이런 뜬금없는 연락을 받을 때, 나는 즐겁다. 한편으로는 세상이 참 좁다고 느낀다. 일면식도 없는 사람들과 내가 남기는 흔적들로 연결되는 것이 이토록 즐겁고 보람된 일이구나, 하고 매번 새롭게 느낀다. 

 오늘도 나는 세상에 열심히 자국을 남긴다. 내가 남긴 무수히 많은 자취들이 단순한 ‘얼룩’이 아니라 누군가에게는 유의미한 ‘무늬’가 되길 바라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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