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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재이 Aug 06. 2022

우습게도 나는



너를 처음 본 그날

아,

이 사람과 같이 늙어가고싶다

고 생각했다


평생 같이 늙어간다면, 하고.


너무도 쉽게.


우리는

가장 좋아하는 작가가 똑같았고,

그 중에서도

단연 으뜸인 작품을 꼽는데

공교롭게도

같은 작품이었다.


신이 난 우리는

충격을 받은 문장들을 공유했고

그 과정은 퍽 즐거웠다.


그 작가를

선배라고 부를 수 있다는 사실마저

똑같았다.


참 별거 아닌데

충분히 그럴 수 있는데


그때부터 난

너와 내가 서로를 위해 짜맞추어진

퍼즐 조각 같다는 생각을 했는지도.



나는 무의식적으로

너와 함께 책을 읽는 우리 모습을 상상했다.


어느 오후

한껏 게으름을 피우며 소파에 늘어져

여유있게 책장을 넘기는 모습.


네가 내 무릎을 베고 누워도 좋고

내가 네 배에 누워도 좋을 것 같다고,

꽤나 구체적으로 그리면서


머지않아 그런 날이 오리란 걸

직감적으로 알았는지도.



우리는 같은 시기

같은 음악을 들었고

같은 문화에 매료됐고

같은 취향을 만들며 성장했고

술을 싫어하고 콜라를 좋아하는

멍청한 입맛까지도 똑같았다.


그런 너와 함께 늙어가는 일이란

참으로 산뜻하고

정갈하고

편안하고

무해하고

행복할 것이라고

나는 생각했다


아니, 확신했다.



너를 처음 본

바로 그날.


너를 생각하면서

너도 나를 생각할 거란

강한 확신이 드는 게


참 어이없게도

좋았다.




참으로 거만하게도

너의 모든 단점들을

내가 안을 수 있겠다고 생각했다.

나 역시 네 앞에선

모든 가면을 벗어던지고

추악한 모습도 기꺼이 보여줄 수 있을 것 같다고

그저 막연하게

하지만 분명하게

확신했다.



우리는 같은 영화를 보며

같은 부분에서 울었다.



나는 그런 너와

평생 함께 영화를 보며

시답잖은 농담과

둘만의 지극히 사변적인 괴짜 평론을 주고받는

상상을 한다.


그렇게 늙어가는 건

너무 행복할 거라고.


그걸 난

너를 처음 본 순간

알았다,


우습게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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